7월 24일 수요일, 국제에이즈대회가 3일째로 접어들고 있다. 대회 주최측의 집계에 따르면 약 2만 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의 절반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온 활동가와 취약계층 당사자 그리고 국제NGO활동가들이다. 이들 에이즈운동가들에게 하이라이트는 국제에이즈대회장 내에서 진행되는 수천 개의 행사가 아니라 워싱턴 거리시위였다. 24일 12시, 워싱턴 컨벤션 센터를 기점으로 워싱턴 시내 5곳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우리는 에이즈위기를 끝낼 수 있다(We Can End AIDS Crisis)"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에이즈확산을 중단시키고 에이즈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5가지 요구사항을 미국정부와 초국적기업 등에게 촉구하기 위해 모였다.
오늘의 시위는 국제에이즈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세계 각국의 활동가들이 거리행진 조직위원회(We can end AIDS coalition)를 꾸려서 준비하였다. 조직위원회의 집계에 의하면,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들 중의 1만 명이 국제에이즈대회에 참가한 에이즈감염인과 활동가들이고, 나머지 2만 명은 조직위원회가 준비한 35대의 버스를 타고 미국 전 지역에서 온 보건의료활동가, 인권활동가, 의료인, 대학생들과 워싱턴 시민들이었다. 행진 중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브라운과 보스턴 대학에서 의,약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고, 지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개인으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들도 만날 수 있었다.
▲ 거리 행진을 위해 모인 시위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
이번 거리시위의 캐치프레이즈는 '우리는 에이즈위기를 끝낼 수 있다(We Can End AIDS Crisis)'이다. 에이즈위기를 끝내기 위해서 지금 시급한 두 가지 과제를 내걸고 있다. 경제정의(Economic justice)와 인권(Human rights)이다. 3만 명의 참가자들은 경제정의와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정부를 비롯한 초국적기업과 국제기구의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간 것이다. 우리의 최종 집결지는 백악관이다. 이 두 가지 과제를 구체화한 다섯 가지 미션구호는 '첫째, 생명보다 이윤에 눈이 먼 초국적제약회사의 탐욕을 규제하라. 둘째, 미국 월스트리트 사태에 따른 에이즈기금 삭감의 책임을 가난한 자들이 아닌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에 세금을 통해 물려라. 셋째, 세계 모든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탄압, 인권침해를 멈추고, 건강권을 보장하라. 넷째, HIV감염인과 성노동자, 마약사용자를 범죄화하지 말라. 다섯째, 미국정부는 정의가 있는 무역정책과 폭 넓은 재정지원으로 에이즈 대응방안을 지속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중단하라'이다. 오늘 행진의 경로는 이 다섯 가지 미션구호별로 다섯 곳의 거점지역에서 행진을 하여 백악관으로 향하는 것이다.
전날 미리 대회장내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 1000달러가 넘는 비싼 참가비를 내지 못한 참석자들, 행사주최비를 내지 못하는 참석자들이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에서 각국의 활동가들은 거리행진의 거점 지역 다섯 곳을 확인하고, 행진참가자들의 안전과 거리행진코스를 에스코트할 사람들을 교육하고 발언할 사람들의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오전 11시에 한국에서 참가한 나와 청소년활동가는 성소수자 차별과 에이즈감염인 범죄화 반대, 초국적제약회사 규제와 FTA 중단을 촉구하는 플래카드와 선전물을 준비해서 집결장소로 갔다. 다양한 퍼포먼스 도구와 피켓, 플래카드 등이 참가자들 손에 하나씩 들려있었다. 11시 30분이 되자, 거리로 나가기 위해 행진을 시작했다. 이미 워싱턴 시내 다섯 곳에서 행진참가자들이 다섯 개의 구호를 내걸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가폰에서 싸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환태평양동반자협정=초국적기업의 탐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제약이다!
(TPP= Corporate greed! Generic drugs are what we need!)
시위자들이 말하는 경제정의란 "이윤보다 생명이다 (People over Profits)", "특허보다 환자가 우선이다 (Patient over Patent)"라는 구호속에 응축되어있다. 이 말에서 나는 '경제정의'가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윤보다 인간의 생명이 우선하고, 그러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제약회사의 특허권보다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미 한국은 한미 FTA를 작년에 비준함으로써 초국적제약회사들의 이윤에 대한 탐욕에 면죄부를 주었다. 아니, 죄가 있어도 그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던 죄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의약품 분야만 보더라도 한미FTA는 지금껏 체결된 FTA중 가장 최악이다. 즉 지적재산권 챕터에서는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보다 특허대상을 확대하고, 특허를 쉽게 획득하고, 특허기간을 연장하고, 자료독점권과 허가특허연계를 통해 독점기간을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의약품챕터에서는 약값을 비싸게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의약품의 허가, 약가결정, 보험등재 등 일련의 제도와 법, 정책을 변화시키려면 미국정부의 사전동의가 불가피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미국정부와 초국적기업은 한미FTA보다 더욱 초국적제약회사의 이해를 반영한 요구를 TPP(Trans-Pacific Partnership Agreement: 환태평양 동반자 협정)협상에서 강요하고 있다. TPP협상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지만 누출된 TPP 미국안에 따르면 한미FTA 특허분야와 의약품분야에 담긴 조항들에 더해 식물과 동물에 특허를 주도록 하고 인간, 동물의 치료를 위한 진단, 치료요법, 외과적 수술방법에도 특허를 주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TPP가 "21세기 무역협정(21th century trade agreement)"의 모범으로서, 가능한 가장 강력한 TPP협정을 협상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으로는 2007년의 신통상정책으로 돌아가서는 안되고, 최소한 한미 FTA협정안을 기본으로 해야하며, 위조방지무역협정(ACTA)보다 강력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TPP는 한미FTA plus이다.
▲ 한국의 활동가들이 27일 국제에이즈대회를 맞아 미국 워싱턴에서 벌어진 거리 시위에서 '화이자+오바마의 환태평양동반자협정=에이즈 감염인에게는 죽음'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화이자는 대표적인 초국적 제약회사다.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
노바티스, 세계의 약국을 파괴하는 소송을 중단하라!
행진을 시작한지 20여 분 남짓, 국제에이즈대회장이 있는 워싱턴 다운타운을 지나 우리는 초국적제약회사인 노바티스(Norvatis) 워싱턴 본사 앞에 도착했다. 일제히 사람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드러눕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이 먼 제약회사의 탐욕으로 에이즈감염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위선적인 너희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야 만족하겠느냐?" 몇몇 발언자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노바티스의 블록버스터 약인 백혈병치료제 '글리벡'에 대한 특허가 인도에서 거부되자 노바티스는 2006년에 인도정부를 상대로 인도특허법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노바티스가 승소한다면 초국적제약회사는 기존약에 사소한 변화를 가하는 것만으로도 특허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인도는 제네릭(복제약)을 생산하지 못해서 개도국과 저개발국가의 환자들의 생명이 위협당한다. 인도는 '세계의 약국'이라 불릴만큼 전 세계에 제네릭(복제약)을 공급하고 있다. 개도국에서 사용하는 에이즈치료제의 90%, 전 세계 에이즈 치료제의 50%를 공급하고 있고, 전 세계 제네릭 시장의 20%를 공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에이즈치료제로 제네릭이 아닌 오리지널약을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한 달 약값은 최소 100만 원이 훌쩍 넘고, 2차, 3차 치료제는 더 비싸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국적제약회사 로슈가 판매하는 에이즈치료제 푸제온은 2004년에 보험등재가 되었지만 로슈는 1년 약값으로 2200만 원을 요구하며 공급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제도를 통해 환자의 부담을 완충해주어 약값이 액면 그대로 비싸게 느껴지지 않지만 이러한 약값은 작은 돈이 절대 아니다.
하물며 개도국과 저개발국가에게 제네릭약이 아니라 오리지널 약을 사용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초국적제약회사는 소위 부자나라 북미, 유럽, 일본에서 팔릴 수 있는 최대의 약값을 결정한 다음 전 세계에 동일약값을 강요하고, 이 약값을 감당할 수 없는 환자들이 값싼 복제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세계의 약국'에 대한 공격은 인도뿐아니라 120여 개국의 개발도상국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노바티스앞에서 드러누운 이유다. 노바티스 소송에 대한 인도 대법원의 최종변론일이 8월 22일로 예정되어있다.
▲ 초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 워싱턴 본사로 행진하는 시위대. "노바티스는 제네릭약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문구가 보인다.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
론 커크를 해임하라(Fire Ron Kirk)!
우리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로 행진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미국의 무역정책과 무역협정이 비밀리에 만들어진다. 미 무역대표부는 환자와 시민들에게는 비밀의 공간이지만 초국적기업에겐 활짝 열려있다. 미 무역대표부는 무역정책을 수립할 때 초국적제약회사를 비롯한 초국적기업의 자문을 받아서 반영한다. Act-up 파리의 한 활동가는 이들의 행위를 조롱하듯 팝송의 가사를 개사하여 열창을 펼쳤다. 목소리가 찢어져라 한 미국 여성활동가는 "이들의 만행으로 세계의 에이즈감염인과 우리의 삶이 끝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하며 "미국 무역대표부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역정책과 전략의 실행을 즉각 멈추라"고 외쳤다. 우리들은 "오바마는 TPP를 중단하라(Obama stop TPP)", "론 커크를 해임하라(Fire Ron Kirk)"를 외치며 다음의 목적지인 레파예트 (Lafayette) 공원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다섯 개 거점에서 다섯 가지 미션구호를 외치며 행진한 참가자들은 라파예트 공원으로 집결했다. 여기서는 반인권적이고 비과학적인 에이즈정책과 이윤중심의 무역정책으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에이즈감염인, 성노동자, 마약사용자, 성소수자 그리고 여성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직위에서 준비한 빨간 리본을 나눠주기 시작했고,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콘돔, 알약, 달러를 본뜬 종이돈, 메시지를 적은 종이 등등의 물건을 꺼내어 빨간 리본으로 묶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백악관으로 행진할 계획이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의미는 세계적으로 에이즈구호기금과 재정지원이 줄어든 가운데 TPP등의 FTA를 강요하여 많은 취약계층들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미국정부에 책임있는 행동을 촉구하기위한 것이다. 오후 2시를 지날 무렵, 우리는 백악관으로 향했다. 워싱턴 당국의 허락을 받은 곳은 백악관 뒤뜰이었다. 경찰들이 깔려 있었지만 그 수는 행진참가자들에 비해 너무 적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몇몇 활동가들이 공원에서 준비한 빨간 리본을 백악관 뒤 뜰에 쳐져 있는 검은색 펜스에 하나씩 묶기 시작했다. 13명의 활동가가 체포되었다.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져 갔다.
▲ 미국 무역대표부로 행진하는 시위대. ⓒTreat People Right |
에이즈감염인을 위한 세상은 우리에게도 좋은 세상
3만 명의 외침이 백악 관앞에서 고조되면서 나는 작년 부산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에이즈대회에서의 경찰폭력과 인권침해가 떠올랐고, 국제대회에 와서는 에이즈감염인의 인권을 보호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거짓말하는 한국정부의 위선에 더욱 치가 떨렸다. 한국에서 에이즈감염인의 인권을 요구하면 정부 공무원들은 한결같이 '감염인의 인권도 보호되어야하지만 국민의 건강권도 중요하다'라고 대답했다.
과연,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까? 에이즈가 완치될 수 있다면 이 싸움은 끝날 수 있을까? 혹은 한국처럼 약만 준다고 에이즈는 해결될 수 있을까? 재정 지원을 보다 많이 늘리고 에이즈 예방을 철저히 한다면 해결될 수 있을까? 오늘 3만 명의 외침은 에이즈감염인만을 위한 것인가?
줄곧 느끼는 것이지만 나에게 에이즈는 단순히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에이즈 문제는 에이즈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취약한 삶의 조건에 처한 성노동자, 이주민, 성소수자, 재소자, 여성, 어린이, 마약사용자들의 삶과 직결되어있다. 이들은 소위 사회적 약자들이지만 비정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 에이즈에 취약하다는 것은 사회적 위치와 조건이 취약하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에이즈감염인들의 삶의 조건과 반인권적 정책을 그대로 둔 채로는 에이즈위기를 끝낼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각국의 법과 제도, 관행속에서 감염인과 에이즈 취약계층의 삶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한다.
질병이 범죄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정질병에 걸렸다고 범인취급을 할 것이 아니라 질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받을 권리와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동권과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누구나 크고 작은 질병으로 아플 수 있다. 그러한 질병이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질병이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정상이라는 기준 또한 누가 만드는 것인가? 단순히 싫다는 감정과 잠재적인 공포심만으로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해도 된다는 정당성이 있는가? 또한 에이즈감염인과 성노동자, 마약사용자,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등의 취약계층에 대한 싫다는 감정, 혐오감, 잠재적 공포심은 개인적 취향인 것처럼 표현되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여기 워싱턴에서 외쳤던 구호는 단순히 에이즈감염인만을 위한 메시지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워싱턴에서 3만 명의 시위대가 요구한 세상은 에이즈감염인에게도 좋은 세상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