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의료수가에 눈을 뜨다!
이번 포괄수가제 논란에서 시민들은 '의료수가'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의료수가는 우리가 진료받을 때 병원비를 지불하는 가격제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병의원(이하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사진을 찍고, 주사를 맞으면 각 의료행위마다 돈을 낸다. 이를 '행위별 의료수가제'라 부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제도에 익숙해진 까닭에 다른 지불 방식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포괄수가제는 미리 특정 질병군에 대해 가격을 정해 놓는 '진료비 정찰제'이다. 이번에 새로 도입되는 제도는 아니다. 이미 1997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시작되었고, 2002년부터는 병원이 자율 선택해 현재 전체 의료기관 중 71.5%가 참여 중이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포괄수가제가 시행되고 있건만 정작 병원비를 내는 시민 대다수는 이 제도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 모든 병원에서 백내장 수술, 맹장 수술, 제왕절개 분만 등 7개 질병군에 대해 포괄수가제가 전면 시행된다. 제왕절개 수술을 받으면 주사를 몇 번 맞든, 사진을 몇 번 찍든, 완치되어 퇴원할 때 미리 정해진 진료비를 납부한다.
지금까지 시민들은 경험해 왔다. 병원에 가면 1분도 제대로 진료하지 않으면서 또 오라고 하고, 툭하면 사진을 찍으라는 것 같고…. 의학적 지식이 없는 환자 입장에선 항상 찜찜한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혹 의료진의 미숙이나 실수로 환자 상태가 악화되더라도 그 추가 진료비는 환자가 책임져야 한다. 물론 그 진실을 사실상 환자가 알 수도 없지만. 사실상 의사들이 의료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공평하지 못한 방식이다.
얼마나 과잉진료가 행해지고 있을까? 국민 1인당 진료횟수 한국 13일, OECD 6.8일이고, 평균 입원일수가 한국은 14.6일, OECD 평균 7.2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자주 아프고 한 번 수술하면 오래 입원한다!
현행 행위별수가제가 의사 중심의 지불체계라면 포괄수가제는 환자 중심 지불체계이다. 포괄수가제는 호주,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선진국 대부분에서 실시하고 있는 제도다. 포괄수가제 논란을 보면서, 시민들은 자신이 느꼈던 과잉진료의 원인을 제도적 용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현행과 같이 진료량이 많을수록 의사 수입이 늘어나는 행위별 수가제에선 과잉진료를 할 개연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선 의사와 환자 간 신뢰도 생기기 어렵다. 이제 환자들은 자신의 질환에 따라 진료비가 얼마로 나올지 사전에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의사들에게 불이익을 전가한 건 아니다. 포괄수가제를 도입하면서 기존 행위별수가에 따른 진료비보다 18%나 높게 포괄수가를 적용해 주었다. 의사들의 동의를 얻기 위한 방안이다(의사들은 비급여 수입의 감소를 우려하지만, 과연 현행 비급여 진료가 타당한 가격으로 제공되고 있는지를 먼저 반문해 봐야 한다).
▲ 포괄수가제 반대 기자회견을 연 대한의사협회. ⓒ뉴시스 |
의료질 저하가 우려된다고? 표준진료체계를 세울 때다.
의사들은 포괄수가제로 사전에 진료비 가격이 정해지면 과소진료를 할 것이므로 의료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언뜻 생각하면 그러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포괄수가제 실시와 함께 표준진료 평가 지표가 마련돼 의사들이 함부로 과소진료하기가 어렵다. 만일 그러면 진료비 보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와 같은 병원 경쟁체제에서, 과소진료를 해서 의료의 질을 떨어뜨린 병원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진료비를 심사하는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평가 자료가 체계적으로 공개되고, 환자와 시민사회의 병원 평가가 소통된다면, 그 병원들은 환자들의 방문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정해진 진료비 한도 내에서 우리 병원은 더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홍보하고 그렇게 진료하는 경쟁이 펼쳐질 개연성이 훨씬 높다.
질병군에 따라 표준진료 기준이 강화되면 의사들의 '재량 진료'가 제약될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여기서 '재량'은 무엇일까? 의학적으로 정해진 '표준 진료'를 넘어선 진료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표준진료가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우리들은 자주 경험한다. 의사마다, 병원마다 진료방법이 달라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이번 기회에 표준 진료 규정이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표준진료가 명확한 7개 질병군부터 시작하는 거다.
이런 의문도 생길 수 있다. 환자의 상태가 각기 다를 텐데 진료비를 미리 정해놓으면 진료가 더 필요한 환자들에게 의료서비스가 제대로 공급될 수 있을까? 그래서 포괄수가제에서는 진료비가 질병군별 중증도를 반영하여 차등 설계되어 있다. 제왕절개수술은 7개, 탈장수술은 21개 등 전체 7개 질병이 78개 등급으로 분류된다. 또한 합병증 등으로 진료가 확대되는 경우는 '열외군 보상'이 제공되는 보완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포괄수가제,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하다!
별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포괄수가제 도입과정에서 기존 비급여 진료가 급여로 전환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비급여는 병원 임의대로 환자에게 가격을 매기는 진료이다. 포괄수가제 도입으로 특정 질환군에 대해 진료비를 사전에 정하기 위해서는 국민건강보험의 진료비 계산 내역에 포함되지 않는 비급여가 존재하면 곤란하다. 이에 포괄수가제 적용 질병군에서는 지금까지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던 비급여 진료가 급여로 전환된다. 지금은 급여, 비급여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의학적 효과를 지닌 비급여 진료들이 포괄수가제를 적용하기 위해 급여 진료로 전환된다.
비급여의 급여 전환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조치이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를 비롯해 많은 무상의료 운동 단체들은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무상의료'를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환자 1인당 연간 본인부담 총액을 100만 원으로 한정하자는 내용이다. 누구도 어떤 경우라도 1년에 병원비가 100만 원을 넘지 않는다면 사실상 무상의료이고, 병원비 불안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당연히 이 때 적용되는 100만 원은 모든 병원비를 대상으로 한다. 의학적 성격을 지니는 현행 비급여 진료를 모두 급여로 전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지금도 본인부담 상한제가 존재한다. 계층에 따라 연간 진료비가 200~400만 원을 넘는 금액은 모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책임지는 제도이다. 그런데 시민들의 병원비 불안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본인부담 상한제가 급여 진료만을 대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중증질환일수록 막대하게 나오는 비급여 진료가 방치되고 있어, 아무리 건강보험 급여에서 상한제가 실시되어도 여기서 벗어나는 비급여 비용이 훨씬 크면 소용이 없다.
비급여의 급여화!, 이번 포괄수가제 도입에서 시민들이 눈여겨 보아할 지점이다. 포괄수가제가 과잉의료 통제뿐만 아니라 무상의료로 가는 중요한 관문인 이유이다.
ⓒ뉴시스 |
다음 과제는? 포괄수가제 적용 확대와 국민건강보험 재정 확충
포괄수가제가 시행되면서 이제 비로소 무상의료를 실시할 수 있는 제도적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제 시작이다. '행위별 수가제'! 이 제도의 심각성에 대해선 이후에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아직도 7개군을 제외한 대다수 질병군에 적용되는 진료비 지불방식이다. 향후 보완장치를 마련하며 포괄수가제를 전체 질병군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는 전체 진료비 지출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며, 동시에 비급여 진료를 급여로 전환하는 일이다.
이와 함께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늘려 나가야 한다.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건강보험 재정 확충이 필수적이다. 그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조금씩 건강보험료를 더 내면(1인당 평균 1만1000원) 기업, 정부 몫을 합하여 필요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 최저임금처럼 매년 11월에 열리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국민 다수 찬성으로 의결하면 되는 일이다. 무상의료!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합심하면 이룰 수 있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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