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형제들이 많다보니, 송면이까지 고등학교에 보낼 여력이 안됐다."
기숙사에 머물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다는 협성계공의 조건이 송면이에게는 좋아보였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진학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다 그쪽(협성계공)으로 선택 했던 게 잘못된 거"라는 형님의 말씀처럼 송면이는 몸이 안 좋아졌다.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건강하고, 크면서 아픈 곳도 별로 없었던 송면이었는데 말이다.
▲ 청년이 된 문송면. 열다섯 문송면이 살아있다면 지금 30대 후반의 청년이다. 사진은 유족이 열다섯 문송면을 청년의 모습으로 작업한 것이다. ⓒ일과건강 |
송면이가 아프다…
1987년 12월 5일, 송면이는 압력계기와 온도계를 생산하는 협성계공에 들어갔다. 송면이는 2주 정도는 압력계 도장실에서 페인트칠을 하거나 신나를 사용해 닦는 보조역할을 맡았다. 그 뒤 온도계 부서로 옮겨 수은 주입을 보조하거나 직접 했다. 환기시설이 미흡한 좁은 공간에서 10일 정도 일한 뒤, 송면이는 다시 압력계로 옮겼다. 머리가 아프고 몸살기가 있다는 말을 시작한 것은 다음해인 1월 말부터였다.
"송면이가 계속 몸이 안 좋다고, 감기기운처럼 쑤신다고 했다. 2월10일에 중학교 졸업식도 있어서 2월8일에 휴직계를 내고 시골로 보냈다. 졸업식 하고 올라와 동네 한약방에 데려가 침을 맞히고 한약 3첩을 해서 먹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때 구정이 2월 16일인가 17일이었는데, 명절 쇠러 누나, 송면이와 함께 시골에 갔다. 시골집에 가서도 누워있으면서 '저리고 아프다'고 했다. 구정 전날 아침에 송면이가 갑자기 눈이 뒤집어지고 경기를 했다. 그때 나도 경기라는 걸 처음 봤다. 태안 읍내에 있는 외과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명절 연휴라 못 옮기고, 2월19일에 고대 구로병원에 갔다. 고대병원에서 검사하는데, 정확한 병명을 못 잡아내더라. 혈압이 190까지 올라가서 중환자실로 갔다가 혈압이 떨어져 안정되면 일반병실로 가고를 반복했다. 차도가 없어 3월5일에 퇴원했다."
주위에서 귀신이 씌었다고 해 점집까지 찾아가고 굿도 해봤지만 송면이의 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월초, 더 악화되는 느낌이 있어 마지막 심정으로 서울대병원을 갔다. 그곳에 가서야 송면이의 병이 유해 중금속인 수은중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몸이 아픈지 3개월이 지나서였다.
직업병을 알게 되다
서울대병원에서 당시 주치의였던 박희순 선생은 형님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공장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듣고 직업병을 의심했다. 박희순 선생은 문근면 형님을 시켜 송면이의 혈액과 모발을 가톨릭의대 산업의학연구소에 보냈다. 결과는 수은과 구리 검출이었다. 검사 결과를 본 박희순 선생은 문근면 형님에게 구로의원 상담실을 소개시켜주었다. 그곳에서 김은혜 선생을 만났고 도움을 받으며 산업재해신청을 시작했다. 산재신청을 위한 진단서에 적힌 문송면의 병명은 수은중독증과 유기용제(신나) 중독증 추정 두 가지였다.
산재신청을 접수받은 노동부 서울남부지방노동사무소는 산재신청 서류를 반려하거나 시간을 끌었다. 사업주 날인이 없고 초진진단기관인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이라는 이유였다. 회사는 송면이가 수은 중독에 걸릴 일은 전혀 없다며 대응을 안 해줬다고 한다. 그 즈음 김은혜 선생의 소개로 박석운 소장을 소개받아, 송면이의 문제를 언론에 알렸다. 1988년 5월11일자 <동아일보>에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15세 소년이 두 달 만에 수은에 중독' 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언론 보도가 되면서 주변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형님은 "서서히 조금씩 알려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면이의 병세는 악화되고 있었다. 환청이 들리고 헛소리를 해 정신과 병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일은 해결이 안 되고 송면이의 상태는 많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직업병이라는 자체를 몰랐다. 송면이는 송면이대로 고통스러워했다. 빨리 직업병으로 인정받아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원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졌다. 회사는 회사대로 나를 박대하고. 남부사무소나 법률기관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는 송면이가 시골에서 자라서 농약중독일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얘기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 취급을 안 해주었다. 시간은 자꾸 지연되고, 어떤 진행이 없었다. 모든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이었다. 나도 하나씩 알아가면서 싸워야했다. 모든 것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도 경제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힘들었던 시기였다.
▲ 노동부 서울남부지방사무소의 산업재해 신청서 반려 이유. △사업주 날인 누락 △초진진단기관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 등을 이유로 산재신청 접수조차 거부했다. 당시에는 노동부가 산재보험을 운영했다. ⓒ일과건강 |
사망 뒤에 쏟아진 관심들
송면이의 현실이 언론에 알려지고 노동자 집회에서 작업장 현실이 폭로되었다. 노동부에도 계속 문제제기를 이어갔다. 송면이의 문제가 사회에 알려지자 양심있는 지식인, 의료인, 노동자들의 공감이 커졌고 노동부도 마지못해 문송면의 수은중독을 직업병으로 인정했다. 1988년 6월20일이었다. 산재 인정을 받아 6월29일 여의도 성모병원 직업병과로 전원을 했지만 이미 송면이는 서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호흡이 약해지고 응급상황이 자꾸 왔다. 그때마다 송면이 옆에는 문근면 형님이 있었다.
"응급상황 때마다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내가 갔다. 7월2일, 밤에 또 위급한 상황이라고 전화가 왔다. 밤 12시경에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슴에 관을 꽂았더라. 호흡이 안 된다고 심장에 직접 관을 꽂았다. 그때도 말 한마디 못했다. 괜찮아지려니 하고 주물러주고 있었다. 새벽1시가 넘어가는데 내가 깜박 잠이 들었다. 송면이 침대에 팔을 얹고. 2시 조금 넘었나? 간호사들이 '송면이가 숨을 멈췄다'고 얘기하더라. 나는 그 순간을 못 봤다."
형님은 송면이의 죽음을 시골에 계신 어머니와 형제들, 김은혜 선생에게 알렸다. 김은혜 선생이 박석운 소장에게 연락을 취했고 영안실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그리고 '이슈화'란 것이 되었다. 언론에 크게 알려지고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관심이 커졌다.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가 꾸려져 노동부와 회사의 소행을 시민과 사회에 알렸다. 선전, 기자회견, 노동부장관면담 요구, 집회, 회사와 서울남부지방노동사무소 항의방문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7월12일. 유족과 협상대표단, 회사측 사이에서 공개사과와 보상금 합의가 이뤄졌고 7월17일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장'을 결정한다. 문송면은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88년, 문근면 형님도 사회 초년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2년 되던 때였다. 송면이의 아픔부터 죽음까지를 함께 했던 형님도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 힘듦을 견딘 힘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송면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송면이를 빨리 치료해서 건강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별 쌍소리를 해도 송면이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송면이가 짜증도 내고 하면, 당장 앞에서는 뒤돌아섰다가도 얼마나 아프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빨리 치료를 해서 건강하게 해주고 싶었던 게 첫 번째였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사촌형들, 이종형들, 김은혜 선생님 등 주변에서도 용기를 많이 주었다."
형님은 송면이가 7월뿐 아니라 "20년 이상이 흘렀어도 문득문득 떠오른다"며 "좋은 일이든지, 안 좋은 일이든지, 생일이든지 많이 그립다. 마음에 묻은 거라 잊어지지 않는다"며 동생을 향한 진한 그리움을 토해냈다.
▲1988년 7월17일 치러진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장. 만장에 적힌 '세계제일 산업재해'는 24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구절이다. ⓒ일과건강 |
삼성이라는 최고 대기업의 직업병 외면
송면이의 죽음 이후 해마다 치른 '산재사망노동자 합동추모제'가 스물네 번째를 맞는다. 첫 합동추모제 때 참석했던 단체나 장례위원회에서 함께 했던 분들보다 새로운 단체나 그때 대학생들이 보건의료인으로 성장해서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문근면 형님은 15일 동안 장례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같이 밥 먹고, 같이 투쟁하고, 같이 얼굴을 맞댄 분들을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그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열다섯 소년 문송면의 수은중독과 사망은 개발독재시대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 현실과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시작이었다. 1988년의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형님은 "지금 세상은 노동자 권리를 많이 찾았다고 해도 아직 문제가 있다"고 하신다. 뒤이어 나온 이야기가 삼성의 직업병 문제였다.
▲ 고(故) 문송면 군의 형인 문근면 씨는 삼성 백혈병 사건을 두고 "세월이 흘렀지만 노동자들의 사망 사례를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일과건강 |
2012년에서 1988년을 본 것이다. 형님은 "보상보다, 치료가 빨리 되어서 다시 가족으로서 항상 같이 볼 수 있고 같이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바람이다. 죽어서 보상을 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픈 분들 빨리 쾌유할 수 있도록 회사도 적극 협조해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경제, 시간, 마음의 상처 모든 게 다 쌓여 힘들고 시련이 크겠지만 "그래도 자기 가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남은 가족이 이를 악물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가질 때 힘 받아서 끝까지 권리를 찾아야 한다"며 이 순간에 힘들 이들을 격려했다.
열다섯. 수은중독. 사망. 고 문송면.
중학생이었던 형이 감기에 심하게 걸렸을 때 학교 근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주고 비료포대에 사과를 잔뜩 담아와 형에게 건넸던 동생. 그 사과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형님 문근면은 또 다시 7월을 맞는다. 사업주에게 노동자는 사라지면 마는 존재감이지만 가족에게 그 노동자는 가슴에 묻은, 잊어지지 않는 기억이다. 24주기를 맞는 고 문송면 추모 '2012 산재사망노동자 합동추모제'를 하늘에서 바라볼, 그가 남겼던 한 마디로 글을 마친다.
"살고싶어…. 병 다 나으면…. 무서운 서울 떠나 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
<경향신문> 1988년 7월7일자 '행간(行間)' 중에서
2012 송면이를 만나러 지금, 갑니다 7월2일 고(故)문송면 기일을 맞아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일과건강에서는 6월30일(토)~7월1일(일) 포럼 '2012 송면이를 만나러 지금, 갑니다'를 개최합니다. 1988년 7월은 산업재해 추방운동이 뜨겁게 시작된 해였습니다. 좁은 공간, 미흡한 환기시설에서 수은을 다뤘던 소년 문송면의 수은중독과 사망, 유독가스의 위험성을 몰라 술 때문에 아픈 줄만 알았던 원진레이온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문제는 '직업병 예방'이라는 본질은 해결되지 않은 채 모습과 대상을 바꾸며 2012년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포럼은 직업병 예방을 위해 필요한 노력과 역할을 찾아보는 자리입니다. □ 프로그램 □ <세션1. 지역사회와 노동안전보건운동 6월30일(토) 15:00~18:00> - 발 제 : 노동안전보건으로 말하는 지역운동(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토론1 : 웅상지역 노동자의 더 나은 복지를 위한 사업현황과 시사점(임영국, 화학섬유연맹) 토론2 : 발암물질로부터 안전한 여수·광양만들기 사업본부 사업현황과 시사점(한인임, 일과건강) 토론3 : 안전한 성동만들기 사업현황과 시사점(이창식, 성동근로자복지센터) 토론4 : 대구 성서공단 사업현황과 시사점(김은미, 산업보건연구회) - 종합토론 <세션2. 직업병 수난사와 현시기 과제 6월30일(토) 19:00~21:30> - 발 제 : 지난 30년, 직업병 일지 읽어내기(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토론1 : 현 산업안전보건법이 보여주는 직업병 예방의 한계(주영수, 한림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노동건강연대) 토론2 : 숨겨진 직업병을 드러내기 위한 활동전략(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 토론3 : 예방으로 이어지는 직업병 투쟁, 이렇게 하자(문길주, 전남지역 노동안전보건활동가) - 종합토론 <2012 산재사망노동자 합동추모제 참가, 7월1일(일) 10:30> □ 포럼 : 2012. 6. 30(토) 15시~7.1(일) 10시 북한강 연수원(경기 남양주시) 추모제 : 2012. 7. 1(일) 10시30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위령탑 앞 참가문의 : 일과건강 ☎(02)490~2091, 2096 / http://safedu.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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