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간 전국언론노조 연합뉴스지부. ⓒ연합뉴스 노동조합 제공 |
'무색무취'의 언론사였던 <연합뉴스>가 '찌라시' 소리를 들은 건 현 정부 들어서다. 친정부적인 기사가 연달아 나갔다. '닻 올린 4대강'이란 기획기사 시리즈에서 <연합뉴스>는 이 사업을 나라의 미래를 밝혀줄 장밋빛으로 색칠했다.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가 광주 5.18 묘지 참배에 갔다가 묘지 상석을 밟은 모습을 담았던 이 언론사의 특종 사진기사는 데스크로 송고된 지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께에서야 겨우 발행됐다. 속보싸움을 하는 통신사에서 데스크로 넘어간 기사가 3시간이 지나서야 나간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던' 이 회사 기자들이 23년 만에 파업에 나선 이유다. 기자들은 "더 이상 '찌라시 기자' 소리를 못 듣겠다"며 박정찬 사장의 연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최근 두드러진 <연합뉴스>의 일그러진 보도태도의 원인이 박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편집권 간섭이었다는 지적이다. 박 사장 취임 기간 개국한 보도채널 뉴스Y는 기자들의 노동강도를 더 키웠다. 이 과정에서 스포트라이트는 양보하기 바쁘던 이 회사 기자들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졌다.
박 사장 연임 여부가 결정될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20일, 연합뉴스 신사옥의 노조사무실에서 이 회사 기자조합원 네 명을 만났다. 입사 11년차인 이율 기자(증권부), 6년차 김남권 기자(산업부), 3년차 민경락 기자(사회부 시청팀), 2년차 차지연 기자(사회부 사건팀)는 박 사장 재임 기간 겪었던 사내 민주주의의 붕괴, 서서히 진행된 '찌라시화'를 체험한 심경, 파업이 준 불안함을 차분히 설명했다. 이들이 겪은 지난 3년여 '박정찬 체제'를 정리했다.
"내 기사 못 믿겠다는 댓글이 '베스트'더라"
▲"막내일 때 들은 '연합 찌라시'라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차지연 기자(사회부). ⓒ프레시안(최형락) |
수습기자 시절 집회 취재가 잦았다.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간단한 코멘트를 받으려 인사를 하면 "<연합뉴스> 싫어한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준비 끝에 서울 동자동의 쪽방촌을 한 달에 걸쳐 취재했다. 직접 그곳 쪽방촌에서 살아보기도 했다. 자부심을 갖고 뉴스에 달린 댓글을 살펴봤다. '베스트'에 오른 댓글은 충격적이었다. 누리꾼은 "연합 찌라시 기자가 한 달 동안 쪽방에서 살았을 리가 없다"고 했다.
가끔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연합뉴스>는 보수단체의 집회도, 진보단체의 집회도 '드라이하게' 쓴다. 그런데 진보 진영의 주장을 받아 적으면 사람들이 'MB 끈 떨어질 때 되니까 이런다'고 SNS에서 말했다. 차갑게 돌아선 사람들의 반응은 어느 쪽의 응원도, 욕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차 기자의 가슴을 때렸다. 어느새 그가 꿈꿨던 기자생활은 '정권 스피커'가 돼 버렸다.
김남권 기자는 2007년 수습기자 시절의 경험을 먼저 얘기했다. 당시 특정매체의 기자가 '진영논리'로는 자사와 사이를 척진 단체를 취재하게 됐다. 그 기자는 취재 거부가 두려워 '<연합뉴스> 기자'라고 사칭했다. 김 기자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그 기자가 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연합뉴스> 기자를 사칭할 수 있을까요?" 선배들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김 기자는 자신이 꿈꾸던 <연합뉴스>의 모습과 멀어진 현실을 절감하게 됐다.
김 기자가 사회부에서 일하던 때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김 기자는 '톤 다운(기사 보도 수위를 낮춤)'을 경험했다. 이처럼 큰 사건이 일어나면 <연합뉴스>와 같은 속보매체는 초싸움에 들어간다. 기사 비중이 있는 새로운 소식이 들어올 때마다 1보, 2보, 3보를 보도하고 종합기사를 쓰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박스기사를 쓴다. 뉴스 소비 공간이 포털로 변하면서 이런 경향은 점차 더 강해지고 있다. 그런데 부장급에서 직접 '영결식 기사가 많이 나갈 필요 없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기사량이 지나치게 적었다.
노 전 대통령이 봉화마을에서 검찰청까지 이동할 때 자사의 보도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이동하는 차량을 따라붙으면서까지 실시간 중계가 이어졌다. 물론 그 기사에는 '노무현은 나쁜 놈'이라는 문장이 들어가진 않았다. 그러나, 내부 구성원이라면 누가 봐도 보도의 중립성을 잃은 상황이었다. 사내 공정보도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보도채널 선정을 앞둔 그 때
2009년 뉴스통신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생긴 편집위원회의 초대 노조측 편집위원이었던 이율 기자는 회사가 '찌라시'로 전락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4대강 특집 기사, 반환점을 돈 이명박 정부에 대한 특집 기사가 찬양조로 질주할 때였다. 노조측 편집위원들은 관련 기사들의 공정성 상실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사측 위원인 편집상무,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은 기자들이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고의가 아니었다", "잠깐 자리를 비워서 기사 발행이 미뤄졌다"는 식으로 눙쳤다. 진지한 개선의지를 찾기 어려웠다. 이 기자는 "공회전하는 느낌, 벽을 보고 얘기하는 느낌만 남았다"고 말했다.
▲"청와대 대변인이 돼 버렸다." 이율 기자(증권부). ⓒ프레시안(최형락) |
민경락 기자는 '기자 정체성에 의문이 드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보도채널 선정이 확정되기 전인 지난 2011년 1월의 일이다. 당시 민 기자는 미디어과학부 소속이었고 방송통신위원회를 출입했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 통신장관회의에 참석했다. <연합뉴스>는 자비를 들여 민 기자에게 출장을 지시했다. 당시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진출을 바라던 모든 언론사들이 '일단 기자를 보내는' 분위기였다.
회사에서 내려온 지시가 이상했다. 기사 송고보다 정보보고(취재기자들이 현장에서 얻은 정보를 윗선에 보고하는 행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 위원장은 말레이시아에서도 매일 새벽 조깅을 했다. '조깅할 때도 따라 붙어서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듣고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말하자면 민 기자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보도전문채널을 따내려는 회사의 사원으로서 그 곳에 간 건지도 모른다. "그 출장비를 다른 중요한 곳에 투입했다면 비용대비 더 좋은 기사가 나왔을 것"이라고 민 기자는 말했다.
"사장이 회사 망가뜨렸다"
민 기자의 출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찌됐든 뉴스Y는 개국했다. 개국 과정에서 사측은 기자들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다. 민 기자는 "굉장히 중요한 사업인데도 충분한 논의가 안 이뤄졌다. 내부적으로 우려가 적잖이 나왔으나, 사측은 '방송이 텍스트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밀어붙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뉴스Y는 40여 명의 취재인력으로 출발했다. 24시간 보도채널이 이 인력으로 제대로 가동될 리 없다. <연합뉴스> 기자들이 투입됐다. 새벽부터 출입처 불을 밝히던 통신사 기자들이, 갑자기 방송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들게 됐다. 차지연 기자에 따르면, 준비는 엉망이었다.
수습교육을 끝낸 후 회사에서 방송리포트 교육을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했다. 단 나흘 간 기자들이 방송 리포트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중심은 맞춤법 강의였다. 이게 전부였다.
▲"최시중에게서 나온 정보를 보고했다. 기사 작성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라." 민경락 기자(사회부). ⓒ프레시안(최형락) |
시민들에게 받던 괄시, 기자로서의 무력감이 기자들의 '파견 사태'를 계기로 폭발했다. 업무 부담이 컸던 젊은 기자들부터 차례대로 성명을 발표했다. 공채 28기부터 31기(3년차 기자) 기자 56명이 지난해 12월 2일 성명서를 내 뉴스Y와 <연합뉴스>의 협업시스템이 가진 문제점, 그간 왜곡돼 온 회사의 보도태도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후배들의 자극에 선배들도 성명서로 화답했다. 민 기자는 선배들이 연달아 내놓는 성명서에서 공정보도에 대한 갈증이 더 선명히 부각됨을 느꼈다. 그간 희미하게 느꼈던 불안함을 자신만 가진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아마도 조합원들 대다수가 이 연이어지는 성명서를 통해 중대한 연대의식을 갖게 됐으리라. '올바른 기자의 삶'에 대한 갈증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느꼈던 셈이다.
이 성명서를 계기로 연합뉴스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일선 기자들의 설명대로 '(제대로 사측에 대들지도 않고) 소처럼 일할 줄만 알던' 순진한 기자들이 노트북을 덮고, 차가운 광장에서 민중가요를 불렀다.
차 기자는 지금도 수시로 출입처의 전화를 받는다. 메일함에는 '어디서 무슨 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의 소식이 쌓여 있다. 방금도 출입처의 전화를 받았다. "파업 중입니다"는 말을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차 기자는 기자의 꿈을 꿀 때처럼 그저 기사를 마음껏 쓰고 싶을 뿐이다.
먼저 입사한 대학선배들의 권유로 <연합뉴스>를 꿈꿨다는 김 기자는 "대학 후배들에게 우리 회사 입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든다. 그가 "어떤 일이 있어도 파업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후배들에게 <연합뉴스> 입사를 권장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김남권 기자(산업부). ⓒ프레시안(최형락) |
민 기자는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임을 절감하고 있다. 기자들의 목소리를 사측은 듣지 않는다. 노조가 경영실패의 책임을 진 사장에게 중도 퇴진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임기가 만료됐으니 다시 돌아오지만 마라는 게 노조의 요구다. 그러나 박 사장은 이번에도 단독 사장 후보자로 선출됐다.
23년 전, <연합뉴스>의 첫 파업 때 머리띠를 둘러맸던 사장은, 이제 다시 파업에 나선 후배들의 싸늘한 눈길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주주총회는, 후배들의 물음에 대한 박 사장의 대답이 될 것이다. '이제 선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후배들은, 박 사장이 정답을 선택하길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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