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 이런 얘기가 있었다. 밤만 되면 이순신 동상이랑 유관순 동상이 돌아다닌다는 둥 하는 얘기 말이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대부분의 학교에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 이런 걸 '괴담'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들 알듯이 이런 괴담은 수많은 사람을 속일 수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없다. 괴담은 내버려두면 잊혀진다. 괴담을 없애겠다고 유포자를 추적하고 응징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국민의 절반이 6년 동안 한미 FTA 괴담을 믿어왔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그 괴담이 더 커지기 전에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날치기를 했다. 결국 우리가 믿던 얘기는 괴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날치기가 이를 증명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경제자유구역과 한미 FTA
2002년 김대중 정부가 경제자유구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외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장밋빛 미래를 펼쳐 보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실상을 보면 날치기 통과된 한미 FTA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지금 경제자유구역에는 썰렁한 찬바람만 분다. 처음보다 규제를 더 완화하고 특혜를 주겠다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경기개발연구원이 지난 8월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06∼2010년에 경제자유구역에 외국인이 직접 투자한 비율은 전체의 4.15퍼센트에 불과하다.
▲ ⓒ보건의료단체연합 |
처음 영리병원을 도입하기로 했을 때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에 들어올 외국인 전용 병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정부는 외국인 전용 병원이 절대 한국 의료체계를 뒤흔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몇 년 뒤 경제자유구역법이 개정됐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외국인이 들어오지 않자, 외국인 병원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며 내국인 진료를 허용한 것이다. (☞관련 기사 : "제주도發 '영리병원 블랙홀', 동네병원 '줄초상' 난다")
그래도 투자자가 나서지 않자 이번에는 외국인 병원 설립에 국내 자본 투자를 허용했다. 인천 송도 영리병원에는 삼성과 KT&G가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그래도 잘 안되니까 의료인력도 내국인이(외국 면허만 가지면) 할 수 있도록 고치려고 했다. 결국 내국인을 내국인이 진료하는 영리병원을 국내 기업이 만들도록 허용한 것이다.
한미 FTA는 전국적으로 이런 효과를 낼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자유구역만 빼면 영리병원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경제자유구역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추진할 때 제주도를 포함해 4개였던 경제자유구역이 지금은 7개다. 2011년 현재 경기, 강원, 충북, 전남에서 경제자유구역 신규지정 신청을 한 상태다. 경제자유구역당 병원 한 개만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한미 FTA에는 '내국인 대우' 조항이 있다. 외국 투자자들에게 내국인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인데 거꾸로도 가능하다. 국내 투자자들이 왜 역차별하냐고 한국 법원에 제소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영리 병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소수 부자들에게 비싼 의료비를 받고 화려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명품' 병원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명품 민영보험이 생길 것이다. 당연히 이런 명품이 늘어나면 의료비를 인상시킬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박탈감을 안겨 줄 것이다. 나중에는 국민건강보험을 없애자는 얘기도 나올 것이다. 때마침 이명박 정부는 건강보험 제도를 뿌리부터 뒤흔들겠다는 김종대 씨를 공단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관련 기사 : '건보 해체' 김종대 논란 확산…MB정부 의료민영화까지?)
환자와 의사, 불신
환자들을 볼 때 가장 불편한 일은 내 앞에 앉아 진료를 받는 환자의 눈에, 의사인 나에 대한 불신이 가득 담겨 있는 경우다. 무척 조심스럽지만 확실히 불신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이런 환자들이 나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아주 객관적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돈을 번다는 사실 말이다. MRI 같은 값비싼 진단장비를 많이 이용하면 인센티브를 받는다는 얘기도 적잖이 들었을 것이다. 그건 고스란히 환자들 부담이 된다. 환자들에게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의사들에 대한 불신은 결과적으로 환자들이 자신을 지키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렇듯 나도 이런 환자들 앞에서 좀더 조심스러워진다. 한편에서는 무척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의사들이 자기 수입을 생각하며 환자를 진료하는 상황 자체가 달라진다면 훨씬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기 전까지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불신'을 버리지는 말라고 얘기한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운동 진영 내에는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다. 나는 이 불신도 거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사들에 대한 환자들의 불신만큼이나 민주당에 대한 불신도 우리 운동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평범한 노동자들에게서 표를 얻지만 선거자금과 당 운영비는 기업주·부자들에게서 얻는다. 한미 FTA를 통과시키면 표를 잃을 것이 명백하지만 선거자금이 없으면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의사들의 진료가 그들의 수입이 된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인 것처럼, 민주당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지키고자 하는 바로 그 1퍼센트 집단에 의지하는 정당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몇 달 동안 동요하던 민주당은 한미 FTA 날치기 앞에서 무기력했다. 본회의 소집이 알려지고 비준안이 통과되기까지 1시간 반이 지나도록 민주당 의원은 절반도 나타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벌어준 소중한 시간에도 의장석을 향해 몸을 던지거나 한나라당 의원들과 몸싸움이라도 벌이는 민주당 의원은 없었다. 언론사 카메라를 내보낸 것이 민주당 의원들을 배려한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는 판이다.
따라서 이들이 언제든 우리 뒤통수를 치고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들이 주도권을 쥐게 내버려 뒀다가는 나중에 엄청난 액수의 부당 청구서를 받게 되는 수가 있다.
솔직히 지금 이미 중간정산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민주노동당이나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민주당에 좀더 경계심을 갖고 있었더라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날치기 후폭풍 속에서도 민주당은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 대비하려면 국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미 FTA도 "재협상" 하겠다고 한다. 여전히 원래 한미 FTA는 좋은 것이었다고 우기는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의원직을 버리고 거리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들이 국회에 머무르는 한, 다시 말해 그들이 상황을 주도하려 하는 한 한미 FTA 폐기는 불가능하다. 거리의 힘을 키워 밀실 협상 따위가 운동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 26일 한미 FTA 비준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한 시민. ⓒ프레시안(최형락) |
저항의 세계화
이집트 민중이 혁명을 밀어붙이고 있다.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낸 데 이어 이제는 군부 독재를 몰아내기 위해 싸우고 있다. 형제 자매들의 희생을 딛고 일어선 그들의 투쟁이 승리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재정 위기로 엄청난 수준의 내핍을 강요받고 있는 유럽 노동자들도 싸우고 있다. 이들의 저항 때문에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이 치르게 하려던 유럽의 부패한 정부 관료와 자본가들의 계획은 차질을 빚고 있다.
저항의 불모지로 여겨지던 미국의 중심지 뉴욕 월가에서 젊은 청년들이 '점거' 운동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이에 화답했고 오클랜드 등지에서는 항만 봉쇄 파업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투쟁은 서로 연결돼 있다. 1퍼센트를 위해 99퍼센트를 희생시키려는 정부에 맞선 투쟁이다. 이 투쟁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서로를 고무하고 있다.
한미 FTA를 폐기하는 운동도 이런 전 세계적 투쟁의 일부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투쟁에서 배우고 우리의 경험을 전 세계에 전해야 한다. 이 투쟁의 승리야말로 우리가 전 세계 노동자 민중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한미 FTA를 완전히 폐기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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