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비슷한 주제로 이미 조윤호가 (법리적 쟁점과 별개로) 군인 최저임금의 사회적 정당성을 주장한 바 있으므로, 거기에 대해 크게 중언부언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조윤호는 의무복무자들에 대한 최저임금 문제 역시 '청년노동'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의무복무자들에 대한 처우가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 주었다. 무엇보다 조윤호의 논지 중에서 압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흔한 얘기로 '돈'이 없어서 의무복무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일반적인 반론에 대해 청년 자신들은 철저히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변명'들은 물론 우리 사회에 흔히 통용되곤 한다. 이를테면 단지 '매출'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경영상'의 이유로, 청년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이나,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임금지급을 '변명'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에 대한 노동자들의 유일하게 적절한 응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최저임금을 보장하지 못할 사업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국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여기에 대해 군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노동자'로 인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반론에는 크게 봐서 우파적 판본과 좌파적 판본이 있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국방의 의무는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권리와 무관한 것이므로 군인들 역시 최저임금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지닌 근로자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 군인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동계급'이 아니므로 군인에 대한 처우 문제를 노동문제로 끌고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 되겠다. 따라서 크게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군인 최저임금 문제를 청년노동 문제로뿐만 아니라 '노동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법리해석을 동반하는 문제이고 앞으로 소송 과정에서 자연스레 쟁점화될 것이므로 상세하게 논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은 군인 역시 노동자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구-)좌파적 반응이다.
물론 나는 사회경제적으로 약자나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서 "누구누구도 노동자다!"라고 외치는 무분별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단지 (상상 속의) 구좌파들을 도발하기 위한 인정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군인 최저임금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바라봐야 한다. 물론 군인, 공무원, 전통적인 분류상에서는 전혀 노동자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최저임금과 같은 사회적 권리들은 실제로 잘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저임금과 같은 '노동권'을 보편적인 시민권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이라는 것 역시 그러한 보편적 권리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비로소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시민사회에서 고립되고 있으며 심각한 위기를 겪는 이상 노동권을 보편적 시민권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방안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군인 최저임금 문제 역시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란 어떠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회적인 갈등은 일상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란 일상적인 경제투쟁에서 정식화된 '요구'들을 사회적으로 보편화하는 것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최저임금 및 사회보험 정책 등은 시작에서는 원래 단지 '일부'의 경제적 요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보편적인 권리로 정착되어 갔다. 실제 의미에서의 정치적 계급투쟁은 바로 그러한 우연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제기된 '요구'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서 출발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노동권을 보편적 사회적 권리로 확장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는 많은 예외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최저임금 등 기본적인 노동권으로부터 소외된 수많은 불안정 노동의 형태뿐만 아니라,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들의 요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에 대한 논의들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흐름에 전통적으로 사적/경제적 임노동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의무복무자들 역시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강제적 의무로서만 사고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좌파적 정치란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의 '예외'들을 철폐하는 지속적인 운동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할 때, 의무복무자들의 사회적 권리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새로운 형태의 기획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 (조윤호 등 다른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청년 시기에 병역의 의무를 지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대다수 역시 불안정한 노동현실을 겪어내야 하는 주체들이다.
무엇보다 의무복무자들을 최저임금 등의 법적/사회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국방의 의무를 둘러싼 불필요한 성대결 및 사회적 갈등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 이는 (다들 알고 있지만) 공공연하게 발설하기 힘든 부분인데, 현역병 및 전/의경으로서 병역의무를 수행한 대다수의 남성들의 젠더 정체성에 있어서 '원한감정'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자랑스러움'의 형태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군가산점제 논란에서 보듯이 그러한 '자부심' 이면의 '원한감정'을 숨길 수 없다. 정상적으로 군대를 다녀왔다는 '자부심'은 대개 뒤틀린 원한감정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사실 국가 역시 일반적인 사회적 권리 및 기회들을 희생해가면서 병역의무를 이행한 젊은이들의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포장하며 동일한 '자부심'을 고취하곤 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선전은 자부심 이면의 뒤틀린 원한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병역의 의무 등 시민이 마땅히 져야만 하는 사회적 의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숭고'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의무를 건강한 형태로 정착시키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여기서 군가산점제에 대한 요구는 병역 의무자들의 사회적 처우 개선의 문제를 탈정치적인 방식으로, 즉 상상적으로 봉합하는 방식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병역 이행자들에 대한 처우의 문제를 공무원 시험 따위에 혜택을 주는 선에서 봉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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