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교육방송, 그리고 MBC와 같이, 우리가 방송의 공공성이라는 틀 내에서 의미하는 그런 방송을 집권 세력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게 방송장악이고,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 방송인의 밥그릇을 뺏어버리겠다는 게 좌파적출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방문진(방송문화진흥회) 등 몇 개의 위원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 모든 것을 지휘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절친이라고 하는 최시중이다. 금융은 강만수라는 아주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서 통치했다면, 방송은 최시중이라는, 역시 흔히 보기 어려운 인물을 통해서 통치하려고 했던 것 같다.
KBS 사장이든, MBC 사장이든, 경영진의 인사권을 통해서 방송에 과다하게 개입을 했고, 그 방향 전체가 최시중이라는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통해서 수립되고 집행되는 중이다. 그러니까 공영방송 사장은 깃털이고, 몸통은 최시중 위원장인 셈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명이 방송이나 언론, 이런 문화 분야에서 아주 독특한 왕국을 만든 역사가 두 번이 있었고, 이 번이 세 번째이다.
▲ 생전의 임화수 씨. |
그리고 역사는 그를 문화나 영화에 대한 기여도 보다는 '정치 깡패'로 더 많이 기억한다. 한국이 아직 민주화라는 것을 시도해보지도 못했던 그 어두운 시기에 있었던 사건이 임화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한국 언론을 완전히 장악을 시도했던 허문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5공이 시작하면서 요즘의 언론장악과 비견할 수 있는 방송장악을 시도했고, 이걸 주관했던 사람이 당시 대통령비서실 정부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였다. 동양방송을 없앴고, MBC를 지금 우리가 보는 공영방송으로 전환시켰고, 연합통신을 만드는 일이 일사불란하게 허문도의 손에서 집행되었다. 그 시기를 '땡전 뉴스'의 시대로 우리가 기억하고, 그 때의 문화정책을 3S, 즉 섹스, 스크린, 스포츠,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 전두환에 이어, 그런 방송 혹은 언론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독특한 개인이 등장하였고, 그런 면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은 누군가를 내세워 방송 혹은 문화를 직접 장악하려했던 세 번째 지도자인 셈이다. 역사가 우리의 대통령을 독재자로 기억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방송 분야에서는 독재자들이 했던 누군가를 내세워 교통정리와 줄 세우기를 한 사람으로는 기록할 것 같다.
청와대가 직접 공영방송의 내용 하나하나와 출연진에 관여하는 게 옳으냐 혹은 주요 신문들의 방송 진출을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건 내용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나 형식에 관한 논의도 있을 수 있다. 특정 인물이 방송통신위원회를 장악하고, 여길 통해서 공영방송의 사장 임명권을 지독할 정도로 직접 행사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밑그림을 기계적으로 현실화시키는 방식이 과연 옳으냐, 이런 질문이 또 한 가지 있을 수 있다.
한국 정치가 독재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국의 공영방송은 최시중이라는 독재자가 있다. 많은 독재 국가에서 자신은 아무런 공식 직함이나 지위를 갖지 않고 독재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방송만으로 놓고 보면, 누가 KBS 사장이고 MBC 사장인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알아서 하거나, "쪼인트를 맞고 하거나", 그 차이만 있지, 결국은 방송장악과 좌파 적출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하면서 결국 부속 기구로 신문 자본을 방송에 진출시키는 것, 결국은 한 사람의 의중에 있는 그림이 독재의 방법으로 전개된 것이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런 독재와 폭주가 가능한 공영방송 시스템을 언제까지 가지고 갈 거냐, 그런 고민을 우리가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대통령과 친구, 이렇게 행정을 움직이는 일은 선진국이 되면 잘 벌어지지 않지만 어쨌든 우린 그런 시대를 맞았다. 만약 정권이 바뀌면, 손학규든, 유시민이든 혹은 정동영이든, 또 다시 자기 '절친'을 내세워 이번에는 반대편의 방송장악, 그리고 '우파적출', 이렇게 하는 게 옳으냐,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좀 길게 보자. 두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제작진의 자율성에 관한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이고, 방송도 마찬가지이고, 사주 등 경영진이 제작에 관여하는 게 옳으냐,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인정할 것이냐, 그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오래된 질문이기는 하지만, 최시중의 방송 장악 앞에서 더욱 더 시급해진 질문이 되었다. MBC PD 수첩의 방송 결방 사태부터 명확한 것처럼, 유형이든 무형이든, 블랙 리스트 같은 것을 만들거나 혹은 사규를 만들어 출연진 통제를 하는 게 과연 선진국 시스템인가? 고전적 질문이지만, 우리는 검열관을 없애는 형태로 언론과 방송을 발전시켜 왔다. 지금은 최시중 1차 검열관, 사장들 2차 검열관, 본부장 등 간부 등의 3차 검열관, 이렇게 국민들의 알권리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있다. 게다가 비선조직으로 청와대도 단단히 검열관 노릇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경영과 방송제작은 분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고, 언론 역시 사주와 편집권은 독립되는 게 맞다. 이게 지금까지의 우리의 사회적 합의였고, 대체적으로 선진국들이 가는 방향이다.
이걸 실시간으로 사장이 직접 전화 걸어서 간섭하든, 아니면 간부들을 장악하고 인사권을 활용해서 장악하든, 그건 결국 말장난이고, 기본적인 경영과 제작의 분리가 지켜지지 않은 게 최시중 아래에서의 공영방송의 운영 방식이었다. 제일 좋은 것은, 사회적으로 고급 간부가 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양식과 기본 절차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경영진의 양심과 상식에 맡겨도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제도를 강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절친'이라고 하는 최시중 같은 황당한 인사는 또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아리랑 TV의 운영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아들이 직접 관여를 한 적은 있지만, 김현철도 지금의 최시중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제작과 경영의 분리, 이건 사실 제도로 완벽하게 분리하기는 어렵다. 임화수, 허문도 그리고 21세기 버전의 최시중,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등장하지 않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에 대해서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질문은, 방송인 혹은 예술인의 사회적 발언을 2010년대의 한국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런 질문이다. 좌파적출이라는 이름 아래 김흥국씨가 억울하게 방송에서 하차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과도 유사하다.
프랑스 사회당 후보였던 미테랑의 홍보위원장인 세계의 가수였던 이브 몽땅이 맡았고, 우파 후보였던 작 시락의 홍보위원장은 당대 최고의 미남이라는 알랭 들롱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의 연설 격돌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진보든 보수든, 우리가 가야 하는 문화 경제에서는 문화인과 예술인들이 이렇게 대중 앞에 당당하게 리더로서 사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의 시대 그리고 문화의 시대에, 그런 사회적 영웅들이 자신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KBS와 MBC의 일부 인사들의 출현을 제한하고, 패널들의 사회적 발언을 금지하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의 발상이며, 문화 경제라는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당장 KBS와 비교되는 NHK를 생각해보자. 한국인 교수로 유명해진 강상중도 유명 출연진이었으며,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내놓는 키타노 다케시는 유명 코메디언이었으며, 방송 진행자이고, 세계적인 영화 감독이다.
그 대상이 김미화든, 김여진이든 아니면 김흥국이든, 방송의 질과 기여도, 그런 걸로 평가 받아야지, 사회적 발언으로 평가 받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런 식이면,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 사회 혹은 현대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던 강상중 교수는 NHK 패널 출연이 벌써 금지되었어야 한다.
우리는 2010년대, 지식과 문화로 더 많이 가야 하고, 창의성이 경제의 핵심이 되는 그런 시기를 살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는 건국 이후 세 번째로 국민들의 언로를 좌지우지 하게 된 최시중이라는 인사와 이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방송 독재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2012년 4월, 총선과 함께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최시중의 시대는 이제 1년도 안 남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이후, 우리는 어떤 공영방송 아니, 어떤 TV 정책의 시대를 열어야 하나? 최시중 내보내고, 그 밑에서 좌파적출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과 소통을 시도한 사람들을 몰아냈던 그 인사들을 다 내보내야 하는가? 그리고 최시중이 했던 것과 반대방향으로만 가면 공영방송의 공공성이 높아지는가? 그렇게 했다가는,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끝없는 보복의 역사만이 반복되는 것 아닌가?
앞으로 3번에 걸쳐서, 이런 질문들을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고자 한다. 최근의 MBC 사장의 발악은, 이제 종료 시한이 보이는 최시중 팀의 마지막 단말마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당장 내년 4월, 총선에서 우리가 이기면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고, 최시중의 시대, 검열관의 시대를 종료하고 다음 단계의 진화를 시작해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 때, 그냥 최시중의 시대를 끝내고, 그의 시대에 승진한 사람을 내치는 것, 그런 단순한 방식으로는 방송의 공공성이 생겨날 것 같지는 않다. 정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 공영방송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이 악몽과도 같은 최시중의 시대를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제는 '금융 민주화'다" <1> "대권주자에게 묻는다…외환은행, 어쩔 건가?" <2> "이헌재 손 잡았던 노무현의 실패, 반복할 건가?" <3> "'강만수의 꿈', 그 이후의 금융 패러다임은 뭔가?" <4> "환율, 국민만 '똥바가지'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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