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전력은 저장이 어렵고 발전소 건설에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계획을 통해 대비하는 한편, 단기적으로도 수요변동에 따라 발전량을 항상 조정해야 한다. 다른 상품과 달리 전기는 수급이 일치하지 않으면 시장가격에 의한 조정이 아니라 계통붕괴라는 물리적 조정에 의해 대규모 정전사태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력수급은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시장에만 의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시장이 아닌 정부 계획이 항상 전력수급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전력수급계획을 주도했는데도 현재와 같이 설비부족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의 상황을 보더라도 한국은 최대수요 대비 20% 안팎의 적정한 여유설비를 유지하지 못하고 때에 따라 60%라는 엄청난 과잉설비와 한자리수의 절박한 설비부족이라는 냉온탕을 오가고 있다.
이는 수요예측이나 설비투자 결정상 오류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그 근저에는 바로 경직적인 설비 중심의 수급계획과 그 핵심으로서 원전 문제가 있다.
원전 과잉투자가 불러온 전력산업 왜곡
원전은 건설에만 10년이 걸리며 이후 발전(發電)과정에서도 수요변화에 따른 공급조절이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원전은 장기수요의 불확실성이나 단기적인 수요변동에 대한 대응력 측면에서 매우 경직적인 설비다. 1980년대 이러한 원전의 과잉투자로 설비가 남아돌자 정부는 전기요금의 인하와 심야시간대 반값쎄일로 수요확대에 나섰고, 이는 결국 전력다소비 산업을 키우고 필요 이상의 전기수요 증가를 불러왔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고유가하에서 전기요금이 억제되자 전기수요가 급증했고, 하절기와 동절기 피크 때는 모든 발전소를 동원해도 불안할 정도로 전기수요가 고공행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과잉과 부족이라는 극단을 오간 지난 수십년간 정부 계획과 요금정책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MB정부는 온실가스 감축과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대규모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 계획대로라면 2030년 우리나라 발전량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60%가 되어 사실상 원전 '올인' 구조로 가게 된다.
원전설비가 정부의 요금규제정책과 맞물려 필요 이상의 전기수요를 촉발하고, 이것이 다시 원전 건설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이론, 즉 "공급은 그 스스로 수요를 창조한다"는 '세이의 법칙'(Say's law)이 한국에서 '원전판 세이의 법칙'으로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원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원전이 한국경제에 기여한 측면을 부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값싼 전기의 공급을 통해 경제성장에 기여했지만 과도한 전기수요를 촉발한 계기 역시 원전이었다는 점을 함께 파악할 필요가 있다.
향후 수십만 년간 미래세대와 자연환경에 부담을 주는 원전폐기물이나 피해액을 가늠할 수 없는 최근의 후쿠시마 사태는 차치하더라도, 원전에 올인하면서 모든 전력수급계획과 관련 산업을 이에 종속시키는 전략이 한국경제의 미래에 유용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 미국 뉴저지 인근 살렘 원전의 모습. ⓒAP=연합뉴스 |
공급중심에서 수요관리로의 전환
온실가스 감축과 전력수급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원전처럼 대규모의 경직적인 발전설비에 기초한 공급중심적 사고에서 친환경적인 발전원 혼합에 기초한 수요중심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전력계통을 생각한다면 원전 올인과 같은 경직적인 전원 구성이 아니라 적정 비율의 원전과 친환경적 발전원(신재생에너지, 가스발전, 청정석탄 등) 간의 혼합구성을 추구해야 한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철칙은 비단 금융투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신재생에너지, 가스발전터빈, 청정석탄은 원전보다 성장잠재력이 높은 분야이다. 또한 발전연료를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신재생에너지 여건도 그리 좋지 않은 한국으로서는 공급 확충보다 수요 절감에 중점을 두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
수요자가 전기를 절약하면 보상해주고 전기효율이 높은 가전제품이나 설비를 지원해주는 수요관리사업은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외화낭비를 억제하면서 에너지 안보도 도모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전기절약형 제품이나 설비가 이미 세계시장의 대세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효율과 관련된 영역은 무궁무진한 성장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수급안정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건설에 수년이 소요되는 발전설비와 달리 수요관리는 수일 또는 단기간 내에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직적인 공급설비보다 수급안정성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정부와 공기업 주도하에 수요관리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시행되진 못하고 다소 관행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수요관리가 강력하게 추진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기요금제도와 전력시장구조 때문이다. 시장원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의해 원가 이하로 책정된 전기요금하에서 수요자의 절약 유인이나 설비지원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전기사업자 역시 마찬가지다. 정해진 투자이익만 보장받는 총괄원가규제하에서 한국전력과 발전 자회사 간의 전력거래가 파이를 나누는 내부거래 방식을 취하는 한, 판매사업자인 한국전력이 수요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
전기요금제도와 전력시장구조 개편해야
수요관리가 본격화되려면 이를 통해 이득이 발생하는 시장구조가 되어야 하고 전기요금에 적극 관심을 가지는 대용량 사업자나 수요자계층을 이 시장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 수요관리가 하나의 사업으로서 성립하고 관련서비스 및 설비산업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총괄원가규제 방식을 넘어서는 대대적인 요금제도 손질과 전력시장의 구조개편이 필요하다. 설령 구조개편으로 전기요금의 상승이나 시장에 변동성이 생기더라도 이는 에너지 복지체계의 구축이나 수요자의 시장대응능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비만증세는 일시적인 감량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치료해야 한다. 외형상 저렴해 보이는 원전에 안이하게 의존하는 '전기 폭식'의 경제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서 그동안 계획과 규제로 일관해온 한국의 전력산업에 적절한 시장기능을 도입하여 계획과 시장 간의 조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전력부문 저탄소 녹색성장의 핵심은 원전 올인이 아니라 전기요금제도와 전력시장의 개편에 있다. 하지만 현 정부는 말로는 시장기능 활용을 언급하면서 오히려 계획 강화를 통해 원전으로 꼬인 문제를 다시 원전 올인으로 대응하고 있다.
반면 수요관리와 친환경적 발전원 혼합을 주장하는 측은 계획의 공공성과 공기업 통합만 강조할 뿐 수요관리와 친환경적 설비산업의 전제요건인 전력시장의 개혁에는 소극적이거나 반대하고 있다. 양쪽 입장 모두에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계획의 과소와 시장의 과잉'도 문제지만 '계획의 과잉과 시장의 과소' 역시 올바른 해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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