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대학 교육이 부실하다는 지적은 늘 있었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그랬다. 만약 요즘 대학생들이 유난히 대학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게다.
하나는 취업난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겪는 취업 부담감은 과거 대학생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대학 문화다. 과거에는 '대학 강의실에서 배운 것은 별로 없지만, 학생회실과 동아리방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말하는 대학생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남을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를 익히고, 집단 내 민주주의를 체험했으며, 사회를 보는 눈을 키웠다고 회고한다. 비록 수업은 부실했어도, 그들이 대학 시절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요즘은 "강의실과 도서관보다 학생회실과 동아리방에서 더 많이 배웠다"라고 말하는 대학생이 드물어졌다. 취업난 등 여러 이유로 학내 자치 활동이 잘 이뤄지지 않는 탓이다.
물론, 지금도 인기 있는 동아리는 있다. 대체로 취업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역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학은 오로지 취업 준비만을 위해 있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취업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동아리에서 오래 활동했던 학생의 글을 싣는다. 이 글을 통해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들의 자발적인 문화 창작, 학생들의 자치 활동 등이 갖는 의미를 되짚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
아마추어 [amateur] - 본업으로 하지 않고 예술·스포츠 등을 애호하는 사람. '아마추어(amateur)'의 어원은 라틴어 'amator'이며 이는 영어의 'lover(애호가)'를 의미한다. <필자>
"마당극은 즐거워야 제맛. 그런데 대학생들은…"
2010년 5월 연세대 유일 잔존 춤패 "춤패탈"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 준비하면서 퀄리티 높은 춤 실력 같은 거에 연연하지 않은지 몇 년은 된 듯하고, 주제의식이 빛나는 마당극을 만들어보자는 치기 같은 게 득세한 적이 있나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부조리극일지언정 그게 후배들 세대(?)의 입맛이고 진심이라면 그런 공연을 만드는 것이 맞는 것일 거다 싶어서 꼰대처럼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고 멀찌감치서 구경이나 하다가, 공연날 가서 장단이나 쳐줬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본을 발로 써서 그런지 관객들이 내용 이해 못 하는 건 그렇다 치고, 공연하는 당사자들께서 '내가 지금 힘들이고 시간 들여서 뭐하는 거지?'하는 표정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참아왔던 꼰대짓을 했다.
"야! 너네가 무슨 프로라도 되는 줄 아냐? 어차피 탈춤 보려고 일반인들이 올 리가 없잖아. 알 만한 사람들 불러다 놓고 하는 공연인데 왜 그렇게 의무감처럼 공연을 하냐? 우리한테 최고로 중요한 의무는 솔직히 관객들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야. 우리는 아마추어고 아마추어의 제일 큰 의무는 자기가 즐겁게 하는 거야. 너네가 그렇게 의무적으로 할 거면 공연 안 해도 돼!"
2010년 2학기, 당연히 해왔던 거니까 또 공연을 하겠단다. 공연을 하자고 결정지은 이유는 애초에 모르겠지만, 공연은 해야 하고, 무슨 리모델링이 그렇게 많은지 학교 안에서 공간을 대여할 곳이 없다. 구하려면 왜 못 구하겠냐만 그거 필사적으로 알아보고 뛰어다닐 사람이 없더라. "할배(8년 넘게 졸업을 안 하고 동아리에 출몰하면 '옹'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가 구해주마"라며 다시 한번 꼰대를 부려 학교 밖에서 공간을 하나 들고 와서 쓸 테면 쓰라고 했다.
공연은 1주일 앞두고 취소되었다. 주연배우였던 녀석이 시험인지 알바인지 때문에 공연 당일날 못 오겠단다. 전형적인 꼰대들의 일갈이 위장에서부터 입까지 거침없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야! 그건 열정과 의지의 문제지. 환경이 나쁘다고 탓만 하면 되냐? 더 열심히 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 정말로 그 정도 여력과 의지가 없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꼰대들에게 벌써부터, 그리고 학생신분을 달고 있는 동안, 그리고 아마도 사회에 나가서도 후배들은 열정과 의지로 상황을 돌파하는 정신력의 숭고함을 예찬할 것을 요구받을 것이다.
후배들아 미안하다. 몇 년이나 지났다고 그새 너희가 살기 더 팍팍해진 걸 안다. 내가 입학했을 때만 해도 일주일에 이틀은 문학세미나를 나가고, 하루는 탈춤을 배우고, 하루는 사회과학 소모임을 나가서 같이 책을 읽고, 하루는 모여서 영화를 봤다.
하지만 너희는 동아리방보다는 중앙도서관에서 더 자주 서로 마주치는 걸 안다. 예전에는 동아리방에 있으면 꼭 누군가가 동아리 정체성에 대해서 개똥철학을 읊어대다가 가끔 싸우거나 화해를 하고 있었다. 이제 너희는 대부분 동아리방을 서로 숙제를 베끼느라 정신없거나 간밤에 몇 시간 못 잤다고 공강시간에 밥 먹고 쪽잠 자는 공간으로 사용하는 거 안다. 그리고 동시에 너희가 열정이 부족하거나 덜 열심히 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래서 아무도 너희를 탓할 수 없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냐? 그렇다고 내가 "너희는 할 만큼 했고, 환경이 너희를 궁지로 몰아가서 그래. 내가 한국사회를 뜯어고치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봐라"라고 흰소리할 순 없잖아? 나도 언젠가 프로가 될 준비를 하는 학생일 뿐인데….
▲ 동아리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사진은 본문 내용과 무관). ⓒ뉴시스 |
자기소개 대신 '자기직장소개'…승승장구하는 동아리의 비결
새 학기에 캠퍼스에서 동아리 홍보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학교에 저런 동아리도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동아리연합회 소속동아리만 지난 6년 사이에 열 개 넘게 더 생긴 것 같다. 그리고 그 와중엔 "잘 돌아가는 동아리"도 있다. 그리고 그 잘나가는 동아리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말 회원들의 열정이 차고 넘쳐서 잘 돌아가는 부류고, 다른 한 가지는 소위 "스펙"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들이다.
복학하고 나서 전공 공부에 재미를 좀 붙여볼까 해서 "전공학회"를 들었다. 전공학회들은 대학 내에서 잘나가는 공동체다. 정기적인 "리크루팅 기간"에 지원서를 내면, 면접까지 봐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야 하고, 지도교수님도 있고, 몇 학기 이상 활동하면 인증서가 발급되고, 심지어 개중에는 학점제한이 있는 곳도 있다.
학부생들끼리 얼마나 전문성 있는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영학과엔 분야별로 열댓 개의 전공학회가 있고, 아무튼 나도 지원 동기에 "학문적 동료들을 가지고 싶어서", "지도교수님께 반해서"라고 쓰고, 정장 입은 면접관들 앞에서 면접보고 학회회원이 되었다. (그래 봤자 한 학기 먼저 들어온 학생들인데 면접관들은 왜 굳이 정장 입고 면접을 보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우리 학회는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건가?)
스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학회 행사는 의무적으로 두 학기를 "출석"해야 하고, 의무인 두 학기 이상을 활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세미나에 앞서서 출석을 부르기도 했다.
사실 세미나는 좀 실망했다. 발표하는 사람들은 기사랑 보고서를 정리해서 세미나 때 PPT 만들어서 발표하고, 몇몇 열성적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주제 붙잡고 끈덕지게 고민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 년 간 활동하면서 지도 교수님께서 세미나에 참석하신 경우는 단 한 번이었고, 그나마도 일이 많아 신경 못 써서 미안하다며 일찍 떠났다. 도대체 이런 공동체가 어떻게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을까? 사실 취업원서에 한 줄 더 써넣기 위한 거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내가 내린 결론의 힌트는 세 가지다. 수강신청, 시험, 홈커밍데이(학교에서 졸업한 사람들을 후배들이 학교로 초대하는 날. <편집자>).
대학에서, 특히 인원이 많은 학과에서, 특히 소위 '고학번'일수록 인간관계는 가루가루 부서져서 우주를 부유한다. 내가 속해 있는 경제학과도 그렇다. 명목상 소속분반이 배정되지만 2학년 이후로 반에서 뭔가를 얻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졸업과 취업을 동시다발적으로 마스터하려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야 할 시점이다. 반 공동체에 남아서 후배들 뒤치다꺼리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래서 그나마 오래도록 반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①몇 년간 어울리던 같은 반 친구들 몇을 마지막 심리적 위안처로 남기고, 적당한 선에서 ②가끔 눈 마주치면 "오랜만이다. 언제 밥이라도 먹자"라고 말하는 사이로 남기거나, ③모른 척하는 사이로 인간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그나마 미리 비빌 언덕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광활한 우주공간에 위성 하나 없이 혜성처럼 독야청청 질주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놓인 학생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 학회다. 학회는 위의 ②에 해당하는 인간관계를 단기간에 제공해준다. 가입과 동시에 같은 과 선배들이 서른 명 가까이 생긴다(다른 과에 적을 둔 복수전공생이나 부전공생들의 지원율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중에는 내가 들을까 말까 고민하는 수업을 들었던 사람이 한 명은 있고, 내가 듣고 있는 수업 족보를 가진 사람이 한 명은 있을 것이다.
졸업한 선배 중에는 내가 고민 중인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고, 선배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홈커밍데이 때 자기소개를 가장한 자기직장소개를 한다. 이것이 승승장구하는 공동체들의 "공공연한 비결" 중 하나다.
하지만 그렇게 정체성을 잃어가는 학회나, 거기라도 비빌 언덕으로 삼는 우주 부유물들을 탓할 수는 없다. 혼자서 어떻게든 생활해 나가려니 단 한 번의 실수도 두고두고 발목을 잡아서 불리한 점으로 남는 프로사회도 무섭고, 그렇다고 같이 가려니 지혜가 전수되는 집단은 없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학회가 본래 목적보다도 생존 지혜와 노하우 전수의 장으로 이용되고, 반대편의 반공동체는 전수 되는 게 없으니 점점 더 컨텐츠를 잃고, 그래서 또 '고학번'들은 반 공동체 궤도를 이탈하고…. 이놈의 악순환 어쩌겠나? 행성이나 혜성이 갑자기 혼자서 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행성의 위성이라도 되어야겠고, 정작 그 행성들의 항성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수님들도 실적이 있어야 계속 연구할 수 있는 직장인들인데 말이다. 아무도 탓할 수는 없다. (심지어 왜 스스로 항성이 될 야망을 품지 못하느냐고, 학생들을 탓하는 분들도 있고, 자네는 나의 행성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 태양계를 떠나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연례행사는 이제 그만!…해체된 아마추어 리그가 그립다
걱정과는 달리 대학사회에는 아직까지 공동체들이 많이 남아 있고, 심지어 일부는 잘되기까지 한다. "춤패탈"도 그 이후로 공연을 한 번도 못했지만 11학번 새내기를 적잖이 받았고, 오는 2학기 때는 다시 공연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들을 하고 있다. 새로운 전공학회들도 자꾸 더 생겨나고, 반 공동체도 아직까지 연례행사들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생존하고 있을 뿐 얼마나 자기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성장해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1학년 때부터 활동해오던 사회과학 소모임은 얼마 전에 온라인클럽에 '전공자료' 게시판을 만들었다. 문학회는 이번학기 문집은 안 나왔는데, 동아리방 책상이 온통 전공책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시절에 따라 공동체들의 성격은 변해 갈 테고,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야 된다는 꼰대소리를 하기엔 아직 '경륜이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내가 속해 있는 네 개의 공동체가 전부 똑같은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면, 이건 변화 양상을 논하기 이전에 도대체 이게 무슨 시절인지 겁이 난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그렇게 변해가는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결코 더 밝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프로준비생들을 보며 해체된 아마추어 리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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