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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종훈에게 '백지위임장' 줄 건가?"

[한·EU FTA, 번역 오류만 문제가 아니다·③] "위험 수위 다다른 통상독재"

이달 초 프랑스 신문사 <르 피가로>에서 유럽 거북이가 한국 토끼를 기다린다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한·EU FTA 협정문의 한국어본에 숱한 오류가 발견되어 비준동의안을 3번이나 제출하면서 한국 국회의 처리가 늦어지는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은 2009년 10월 협정문 가서명 후 외교통상부 공무원 6~7명이 불과 한 달도 안 걸려 협정문 국어본을 완성했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은 21개 언어본을 준비하는 데에 1년이 걸렸는데, 이를 두고 한국 외교관들은 유럽연합이 거북이처럼 시간을 너무 끈다고 불평을 토로했었다.

협정문 번역을 서두르다 일을 망친 한국 정부를 보면, <맹자>에 나오는 고사성어 발묘조장(拔苗助長)이 생각난다. 이 고사성어에 나오는, 벼를 빨리 자라게 하려고 벼의 순을 잡아 뺀 어리석은 농부의 이야기는 그러나 비단 한국 정부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7월 1일 잠정발효일을 맞추려는 한나라당도 '어리석은 농부'와 다르지 않다. 협정문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고,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채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감성만으로 국회 통과를 서두르기 때문이다.

문제가 너무 없는 것이 문제라고 하던 한·EU FTA는 생각처럼 간단한 가벼운 협정이 아니다. 2006년 이후 유럽연합이 추진하는 가장 공격적이고 포괄적인 양자협정이 바로 한·EU FTA다. 실제로 한·EU FTA는 한·미 FTA보다 관세철폐 대상이 더 많고 관세철폐의 기간도 더 짧다. 서비스 분야도 한·미 FTA와 같은 수준으로 거의 모든 분야를 다 개방한다. 상품, 서비스 외에도 위생검역, 정부조달, 지적재산권, 경쟁법, 노동, 환경 등 국가의 공적 기능을 직접 제약하며 이른바 민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수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포괄적인 FTA를 국회가 제대로 심사하려면 협정을 체결했던 정부가 협상 내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국회에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제출한 한·EU FTA 비준동의안 원문에는 협정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 고작 2쪽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모두 708쪽에 달하는 비준동의안 대부분은 협정문이고, 설명자료는 따로 제출하지도 않았다. 그 동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는 '한·EU FTA 상세설명'이란 제목이 붙은 자료가 있지만 이것도 협정문 자체 분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내용도 정부가 입맛에 맞게 편집한 개조식 설명이다. 개정이 필요한 국내법도 누락했고, 심지어 사실과 다르게 설명하였거나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 것도 많다.

갈등 조정과 내부 소통의 부재

이처럼 부실한 설명으로는 국회가 조약동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조약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은 한편으로는 권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의무이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국회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의 소통 부족과 갈등 조정 능력의 부재이다. 정부는 국회와의 소통만 무시한 것이 아니라, 부처간 소통이나 지방정부와의 소통도 소홀히 하였다. 시민사회나 중소상인과는 소통을 아예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갈등 조정자로서의 정부 역할은 사라졌다.

소통 부재의 대표적인 사례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들 수 있다. 한·EU FTA에 따르면 학교급식을 정부 재정으로 조달하는 경우 유럽연합은 자국산 농산물을 우선 구매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EU FTA에서 WTO 정부조달협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한국측 양허안에 학교급식을 예외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WTO 정부조달협정에서 유럽연합은 학교급식을 예외로 빼 두었지만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한·EU FTA 협상을 할 때 유럽연합이 WTO 정부조달협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학교급식을 개방 대상에서 제외했어야 한다. 이런 오류가 생긴 가장 큰 이유는, 무상급식을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나 교육감들과 미리 협의하는 소통 과정을 중앙정부가 생략했기 때문이다.

500만 중소상인의 생계와 관련된 유통법, 상생법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이 법들은 한·EU FTA 협상 도중에 이미 문제가 되었다. 유럽연합은 유통법, 상생법이 한·EU FTA와 충돌한다는 명시적인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교섭본부는 이를 미리 해결하지 않았고, 협정문에 서명을 한 다음, 유럽연합과 분쟁해결 과정을 통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변명한다. 국회와의 소통을 중시했다면, 유럽연합이 이를 문제삼지 못하도록 협정문에 유통법, 상생법의 내용을 반영했어야 마땅하다.

대국민 계몽사업보다 사회적 합의 도출이 더 중요

한국은 1997년부터 WTO 중심의 다자주의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지역주의로 전환하였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논리를 동원하여 동시다발적 FTA 전략을 택한 것이다. 초기의 피해최소형 FTA 전략은 노무현 정권들어 이익극대형 FTA 전략으로 바뀌면서 거대 경제권과 포괄적인 FTA를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방정책은 경제적 변수만으로는 풀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고차원 방정식의 일종이다. 정부가 제시한 FTA 해법을 우리 사회가 수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부는 거대 경제권과 FTA를 하면 우리가 그 시장을 선점하고 우리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감성 위주의 홍보에만 치중했다. 하루에 무려 2조원을 수출하는 개방국가이고, 무역의존도가 85%로, 일본의 22.3%, 미국의 18.7%, 중국의 45%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현실에서 '개방과 쇄국'이라는 어이없는 이분법으로 무분별한 FTA 속도전을 펼치면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막연한 가정에 근거한 대국민 계몽사업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다 보니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작년에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한·EU FTA 상세설명 자료에는 한국보다 EU가 더 많은 품목의 관세를 철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한 비대칭적 관세철폐에 합의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공산품의 경우 품목수 기준으로 EU측은 99.4%에 해당하는 품목을 3년내에 조기 철폐하는 반면, 우리는 95.8%를 조기 철폐한다는 수치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관세가 없는 품목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관세율이 현재 0%인 품목을 제외하면 정부의 홍보와는 반대로 한국이 더 많은 품목의 관세를 철폐한다.

경제적 효과에 대한 홍보도 근거가 없다. 한·EU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 정부는 실질 GDP가 10년간 총 5.6%로 증가할 것이라고 홍보한다. 그런데 이 수치의 근거가 된 정부측 보고서는 생산성 증대 모형을 잘못 설정했고 생산성 효과도 중복 추계되어 결과가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정부측 보고서조차도 생산성 증대효과에 대해 수치 자체에는 의미를 두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스스로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한 수치에 집착한 정부측 홍보는 그 자체로 자기모순인 셈이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면 피해계층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EU FTA의 경우 피해 대책은 고사하고 최대 수혜자인 기업들조차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조기 발효만 서두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인증수출자 제도이다. 한국 기업이 한·EU FTA에 따른 특혜 관세를 적용받으려면 수출품의 원산지가 한국임을 증명해야 한다. 한·EU FTA는 원산지 증명을 수출기업이 자율적으로 하는 제도를 두고 있는데, 수출이 6천 유로 초과인 기업은 우리 관세청이 인증을 해야만 원산지를 자율 증명할 수 있다. 이를 인증수출자 제도라 하는데, 한국 정부는 비준동의안을 3번째 제출할 때까지도 인증수출자 제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유럽에 6천 유로 초과 수출기업 8206개 중 지난 3월 18일까지 인증수출자로 등록받은 기업은 7.6%에 불과하다. 1975년부터 인증수출자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유럽연합과 달리 한국은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인증대상의 80%가 인증수출자 제도 자체를 모르고 있다. 한국 기업이 원산지 증명을 잘못하면 FTA 관세 혜택을 받기는커녕 EU 관세법에 따라 물품 금액의 3배에 달하는 벌금을 물거나 심하면 6개월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도 있다.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뉴시스

국회는 국회법을 준수하라

비준동의안이 3번째로 국회에 제출된 4월 6일 국회의장은 소관 상임위인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뿐만 아니라, 9개 상임위를 관련 상임위원회로 지정하여 여기에도 비준동의안을 회부했다. 현재 국회에는 16개의 상임위가 있으니 절반이 넘는 상임위가 관련 상임위로 지정된 셈이다. 이는 국회법에 따른 적법한 절차로서, 소관 상임위는 관련 상임위가 의견을 제출할 충분한 기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고 관련 상임위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소관 상임위인 외교통상통일위원회는 비준동의안이 회부된 날 의안을 상정했고, 그 다음날부터 연이어 3일 동안 법안심사소위를 연 다음 곧바로 전체회의에 상정하여 비준동의안 처리를 시도했다. 국회의장이 의안을 회부한지 불과 일주일 만에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려는 외교통상위원회의 이러한 속도전은 관련 상임위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련 상임위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의견서를 낸 관련 상임위는 농림수산식품위원회 한 곳 뿐이고 나머지 8개 위원회는 의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조약에 대한 국회의 동의 절차는 대통령의 조약 체결을 국내법적으로 정당화해주는 행위이며 조약이 국내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지도록 하는 일종의 입법과정이다. 헌법에 부여된 이처럼 막중한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국회는 스스로 자기 권한을 포기하고, 동시에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의무를 어겼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통상 독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EU FTA는 통상교섭본부를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무역위원회'를 둔다. 다른 FTA와 마찬가지로 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고 협정 운영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명목이다. 그런데 이 무역위원회의 권한이 너무 강력하다. 협정의 내용을 고칠 수도 있고 규정에 대한 해석 권한도 갖는다. 각종 위원회를 관장하고 협정문에 없는 위원회나 작업반을 만들 수도 있다. 쉽게 얘기하면 FTA에 관한한 행정, 입법, 사법 기능을 모조리 통상관료들이 행사하게 된다.

무역위원회는 협상 과정에서 합의했던 관세율과 관세유형도 변경할 수 있고, 협정 규정에 대한 무역위원회의 해석은 분쟁해결절차에서 패널을 구속한다. 또한 무역위원회는 협정에 규정된 경우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15.4조 1항), 이 결정은 양 당사자를 구속한다(15.4조 2항). 여기서 당사자는 행정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무역위원회의 결정은 국회나 법원도 따라야 한다. 이런 내용이 포함된 한·EU FTA를 국회가 동의한다면, 통상교섭본부에 백지위임장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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