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단순하게 한·EU간 관세율만 비교해보더라도 관세철폐에 따른 이익이 EU에 더 많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9년 현재, 한국의 단순평균 실행관세율은 12.2%로 EU(5.6%)와는 6.6% 차이가 나며, 공산품 관세율도 한국(6.6%)이 EU(4.0%)보다 높다. 또한 FTA와 관계없이 이미 무관세인 품목의 비중도 한국보다 EU가 훨씬 높다. 2007년 기준으로, 한국의 공산품 무관세 품목 비중은 35.7%인데 반해, EU는 62.3%에 달한다. 그만큼 관세철폐는 우리에게 불리한 효과를 가져 온다.
둘째, 한국의 대(對)EU 주력 수출품목 중 대다수는 이미 무관세이거나 저관세이기 때문에, FTA로 인한 관세철폐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선박, 무선전화기, 반도체, 철강, 컴퓨터 등 한국의 대(對)EU 전체 수출의 약 60%가 이미 무관세 품목들이다. 실질적인 관세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고관세 품목은 자동차(10%), TV 등 영상기기(14%), 섬유·의류(12%) 등 대(對)EU 수출의 약 30%에 불과하다. 따라서 실제적인 FTA 관세율 효과는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다.
셋째, 자동차 산업은 한·EU FTA의 최대 수혜 업종(연평균 1.5조원의 수출증대, 연평균 1.9조원의 생산증가)으로 선전되고 있지만, 이는 관세 철폐를 수출확대라는 유리한 측면으로만 일방적으로 해석한 지나친 과장에 불과하다.
한국 자동차가 '관세철폐'만으로 유럽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증가시키기란 쉽지 않다. 유럽 자동차시장은 중소형차 위주의 시장구조이며, 디젤 엔진차를 선호하고, 유럽 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두터운 수요를 특징으로 한다. 또한 높은 환경기준 등 비관세장벽도 견고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자동차업체가 단순히 가격경쟁만으로 유럽시장점유율을 확대하기는 힘들다. 또한 브랜드와 품질에서도 유럽업체에 밀리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산 자동차가 유럽에서 파격적인 할인과 출혈경쟁을 통해 겨우 3%대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세가 철폐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산 자동차의 급속한 시장점유율 확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본격화되고 있는 국내 자동차의 유럽현지생산의 국내생산 대체효과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현재 슬로바키아(연간 30만대), 체코(연간 30만대) 등 유럽현지에서 생산될 한국자동차 규모가 60만대에 이른다. 2009년 현재 대(對)EU 자동차 수출량이 약 40만 8천대이고, 유럽 현지 공장 가동률이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관세가 철폐되더라도 수출증대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편, 정부는 국내 자동차의 수출증대 효과는 부풀리는 대신, 유럽산 수입차의 국내시장잠식 가능성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고 있다. 수입차의 국내 자동차 시장점유율은 이미 7.9%까지 상승했으며, 이중 유럽차가 65%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EU FTA에 따른 8% 관세철폐는 유럽 수입차의 시장점유율을 상당히 제고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한미FTA가 발효되면, 특별소비세 개편 등에 따른 혜택을 EU산 수입차도 자동 적용받게 되므로, EU산 수입차의 가격인하 효과는 더욱 커진다. 2,000cc 이상 수입차의 경우 최대 12.7%의 가격인하 효과를 누리게 된다. 1억 원짜리 벤츠가 약 8천 7백만 원까지 하락할 수 있다. 이는 유럽 수입차의 국내시장점유율을 급격히 확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FTA 관세철폐 효과는 현지생산 확대, 강화된 환경기준, 동유럽 및 중국 등 저가의 경쟁차 등장으로 인해 그 시효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수입부문에서는 유럽차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와 FTA 관세인하효과가 결합될 경우, 수입차의 내수시장점유율이 급속히 증가하는 사태가 도래할 수 있다. 이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매우 불투명한 단계로 내몰 것이다.
제조업 기반 붕괴와 고용 감소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자체 분석(<한·EU FTA가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 2008. 3)에 따르면, 한·EU FTA가 이행되면 자동차, 섬유·의류·가죽, 전자기기를 제외한 제조업의 모든 업종에서 생산과 고용이 감소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자동차 부문은 유럽 현지생산의 확대라는 조건에 의해, 섬유·의류·가죽 부문은 저임금에 기반한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에 의해, 실질적인 국내 생산·고용 증가 효과는 저조할 수밖에 없다.
특히 화학, 전자기계, 의료·정밀·광학 기기 등 한국 제조업의 미래가 달려 있는 주요 부품소재산업의 생산이 감소되고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EU FTA가 제조업 전반에 걸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수입재에 대한 수요는 모든 품목에서 증가한 반면, 국내 생산재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산증가가 예상되는 섬유, 자동차 부문에서도 수입재에 대한 수요는 6% 이상 증가했다. 수입재에 대한 국내수요 증가는 수출증대를 통해 이익을 실현하지 못할 경우 내수기반마저 상실하여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재벌과 중소영세기업으로 양극화된 한국 산업구조의 현실을 고려하면, 수출증대를 통한 이익실현은 소수의 잘 나가는 대기업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對)EU 주요 수출 품목이 선박, 무선통신기기, 자동차, 디스플레이, 반도체, 컴퓨터 등 재벌이 생산하는 제품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EU FTA는 소수 재벌기업의 (수출증대) 이익을 보장해주지만 다수 제조업종의 내수기반을 무너뜨리고, 산업공동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정부는 한·EU FTA가 장기적으로 최대 25만 3천개의 고용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EU FTA로 인해 국내총생산이 장기적으로 5.62% 증가할 것이라는 과장·왜곡된 경제성장률에 근거한 고용추정치라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다. 또한 한·EU FTA는 전체 고용에서 88%를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에 치명상을 입혀 국내 제조업의 근간을 뒤흔다는 점에서 고용증가효과를 기대하기는 난망하다. 전체 고용의 25%를 담당하던 대기업의 고용비중은 2010년 현재 12%로 급감했다. 나아가 수출의 고용효과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실제로 수출의 고용유발효과는 2000년 10억 원당 10.6명에서 2007년 7.1명으로 8년 동안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대기업 위주, 수출중심의 경제정책이 일자리 창출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는 수출이 늘고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의 굴레에 빠져 있다는 의미이다.
한·EU FTA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제조업에서조차 암울한 전망을 제시할 뿐이다. 중소제조업체의 몰락과 급속한 산업구조조정, 내수위축과 산업공동화 가속, 고용감소는 해당 기업을 넘어 전 국민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 또한 이는 고부가가치 및 부품소재, 첨단 장비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다변화라는 한국경제의 미래까지도 희생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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