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익숙치않은 사람이다. 유력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종종 거부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또 협정문의 번역 오류가 부각되면서, '송기호'라는 이름이 너무 자주 거론되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동시다발적 FTA를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게다.
그는 지난 15일 가까운 기자들에게 "당분간 인터뷰에 응하기 어려울 것 같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한·EU FTA 비준동의안이 이날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부결됐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다. 그는 이로써 우리 사회가 한·EU FTA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뜯어볼 시간을 벌게 됐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조금 미뤄둬야 한다.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위원장은 오는 19일 전체회의에서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다시 논의할 방침이다. 숱하게 드러난 번역 오류 때문에 두 번 철회되고 세 번째로 상정된 비준동의안이다. 정부는 끊임없이 드러나는 번역 오류를 땜질하듯 해결하기에도 숨이 찼다. 번역 오류를 넘어선, 한·EU FTA 비준동의안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해선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세간에선 FTA 협정문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외교통상부 관료들을 주로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을 비아냥거리거나 희화화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부지런한 부류에 속한다. 이젠 이런 뛰어난 인재들이 왜 실수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볼 때다. 협정문 번역 오류를 그저 관료들의 무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통상교섭본부의 관료들은, 말 그대로 교섭만 할 뿐이다. 협정문 문구 하나가 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그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그건 산업정책을 실제로 담당하는 중앙 부처, 국민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조율하는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이런 틀이 매우 부실하다. 국회 논의는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통상관료들의 독주체계였다. 협정문 번역 오류는 그 결과였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여당에서 통상 관료들이 제출한 비준 동의안을 기계적으로 승인하길 거부하는 의원이 나타났다. 지난 15일 외통위 법안심사소위 부결 사건의 주인공인 홍정욱 한나라당 의원이다. 홍 의원은 지난해 말 "앞으로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겠다"라고 한 약속을 지켰다. 이로써 급박하게 진행되던 한·EU FTA 비준동의안 처리 일정에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보수언론은 이렇게 생긴 여유가 마뜩치 않은 눈치다. 16일자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홍 의원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국가적 현안이고 당론이 정해진 FTA 동의안에 찬성하면서도 비켜섰다는 것"이라고 썼다. 홍 의원과 마찬가지로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의원들에 대해서도 "시류에 장단을 맞추며 잠시 박수를 받았을지 모르나 민주주의가 딛고 선 다수결의 원칙을 함부로 훼손해 놓은 셈이 됐다"고 평가했다. '제2의 홍정욱'이 나오는 것을 경계하는 뉘앙스다.
<프레시안>은 17일 저녁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수륜 법률사무소 회의실에서 송기호 변호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나눈 이야기, 이어서 전화와 이메일 등으로 주고받은 내용 등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첫 번째로 다룰 내용은 홍정욱 의원에 관한 것이다. 송 변호사는 이 사건이 한국 민주주의와 통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국회가 통상정책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참여정부 시절 논의됐으나 도입하지 못했던 '통상절차법'이 꼭 필요하다는 의견도 냈다. 두 번째로 다룰 내용은 '한·EU FTA 를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내용은 이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인터뷰: "한·EU FTA '원포인트 재협상', 가능한 대안이다")<편집자>
▲ ⓒ프레시안(손문상) |
"외국과 맺은 조약 심사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의무…홍 의원이 고맙다"
프레시안: 지난 15일, 홍정욱 의원이 국회 외통위 법안심사소위에서 '기권'했다.
송기호: 시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하다. 법률가로서, 홍 의원의 행동을 헌법 정신을 구현한 결정으로 평가한다. 한국이 1967년 가트(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입한 이래 지금까지의 약 40여 년 동안의 통상정책에 중요한 획을 그은 결정이다.
프레시안: 하지만 일각에선 홍 의원의 행동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본다. 당론을 무시한 돌출행동이라는 게다.
송기호: 아마 한나라당의 당론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 같은데, 그것은 무엇이 헌법인지를 모르는 말이다. 국회의원은 독립적인 헌법기관이다. 행정부가 외국과 맺은 조약에 대해 국민을 대표해서 심사할 의무가 국회의원에게는 있다.
헌법에서 당론은 국회의원의 위에 있지 않다. 정당 제도는 국회의원의 권한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미국 통상에선 결정권을 의회가 쥔다…우리는 왜 관료 독주를 방치하나"
프레시안: '헌법'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홍정욱 사건'을 굳이 그렇게 큰 틀에서 봐야 할 이유가 있나?
송기호: 헌법 제60조에는 외국과 맺는 조약에 대해 국회가 심사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국가 안에서 적용되는 법률과는 달리, 조약은 국회가 수정할 수 없다. 법률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국회가 조항을 수정할 수 있지만, 조약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FTA는 그 어떠한 단일법보다도 더 큰 영향을 시민과 기업에 미친다. 협정문의 문구 하나가 특정 산업, 특정 직업군에게는 결정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다.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통상 조약을 꼼꼼히 심사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막상 FTA 조항을 국회가 손을 댈 수 없다는 모순에서 이번 사건을 볼 필요가 있다.
▲ ⓒ프레시안(손문상) |
송기호: 중요한 질문이다. 바람직한 형태는 미국이나 유럽의 의회처럼 협상 과정을 의회가 통제하는 것이다. 즉 의회가 수용할 수 있는 협정문을 정부가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서명 절차까지 끝난 협정문이라고 하더라도 의회가 수용할 수 없는 경우, 특정 조항에 대하여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원포인트' 재협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한·미 FTA도 결국 재협상되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싱가포르에선 당시 협정이 결국 미국 의회와의 협상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고 평가했었다. 미국 통상에서 실질적인 결정은 의회가 한다.
"87년 헌법의 맹점…당시엔 아무도 FTA 체제를 예상치 못했다"
프레시안: 하지만 한국에선 국회가 통상 문제에 개입하는 모습이 아직까지 낯설다.
송기호: 지난 40여 년 동안 국회는 통상협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 한 ·EU FTA에서는 통상교섭본부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거치지 않은 채 한·EU FTA 비준동의 시한을 오는 6월 30일까지로 구두 합의했다. FTA 협상 내용에 동의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국회의 몫이다. 통상교섭본부가 미리 처리 시한을 못 박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며, 위헌이다. 이에 대해선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 중이다.
프레시안: 국회가 왜 이토록 무력해졌을까.
송기호: 나는 이번 일을 보다 큰 틀, 그러니까 헌법의 맥락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1987년 현행 헌법이 제정될 때는 누구도 WTO(자유무역기구)나 FTA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처럼 광범위한 통상협정, 그러니까 사실상 법전을 통째로 바꾸는 통상협정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헌법에는 통상 협정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다.
프레시안: 1987년 헌법체제가 WTO나 FTA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다.
송기호: 그동안 이러한 헌법적 결함을 이용한 통상 관료들의 독주가 방치돼 왔다. 홍정욱 의원은 이를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홍 의원이 지적한 대로, '빨리' 처리하는 역할 대신 '바르게' 심사하는 국회가 되는 게 맞다.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 심사권을 최대한 활용해서 실질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국회는 외국과의 통상협정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받아야 한다. 그리고 국회는 이에 대해 충분히 심사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둘 다 지금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중요한 통상조약은 국회가 진행상황 보고 받아야…'통상절차법' 필요"
▲ ⓒ프레시안(손문상) |
송기호: 헌법이 국회의 조약 비준 동의권을 규정한 점에서, 해석상 국회의 심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법률 입법이 가능하다.
우리의 FTA 상대국인 미국과 유럽연합에는 각각 미국 무역법(Trade Act)과 리스본 조약(EU 설립에 관한 조약)이 있어서 의회가 통상 조약 체결 과정에 개입할 수 있게끔 돼 있다. 우리도 그와 같은 통상절차법을 제정해서 국회의 심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프레시안: 지난 참여정부 때에도 통상절차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송기호: 그렇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참여정부 시절, 통상절차법 제정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무산됐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외통부의 독주는 그 결과다. 중요한 통상조약은 비준 동의뿐 아니라 체결 계획과 조약 문안, 심의 등의 진행상황을 국회가 보고받고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게 통상절차법이다.
"국내법과 모순되는 조약에 대해선 '재협상' 요구해야"
프레시안: 그렇다면, 아직 통상절차법이 없는 상황에서 국회는 FTA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까.
송기호: 국회가 수용할 만한 FTA 조항을 만들도록 관여하는 절차는 갖지 못했지만, 심사 과정에서 국회가 수용할 수 없는 조항, 기본적 국내법과 배치되는 조항에 대해선 재협상을 요구하는 권한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국내법은 한국 사회를 이루는 기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며, 국민의 대표자들이 합의한 내용이다. 이를 침해하는 조항에 대해선 재협상을 요구해서 수정시켜야 한다. 국내법과 통상조약이 서로 모순이 되는 상황은 생기면 안 된다.
프레시안: 양자주의인 FTA체제에선, 잘못 체결된 조약이 낳는 부작용도 더 커질 듯하다. 따라서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필요성 역시 더 커질 게다.
송기호: 그렇다. FTA가 WTO와 다른 점은 더욱 직접적으로 일대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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