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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히딩크', 서남표는 왜 실패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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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히딩크', 서남표는 왜 실패했나?

[기자의 눈] "우리는 왜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는가"

돌아보면, 그때가 계기였던 것 같다.

1990년대 중반 어느 날이다. PC통신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사이언스 키드의 생애'라는 제목의 글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안정효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패러디한 제목이다.

'사이언스 키드'들의 절망…'신화 만들기'식 과학인재 정책의 그늘

글은 간결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군사정부가 청소년들에게 부추겼던 '과학기술입국'의 신화,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의 실제 현실을 다룬 글이다. '신화'에 눈이 멀어서 당시 인기를 끌던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다른 분야를 전공했더라면 더 만족스런 삶을 누렸을 터였다. 요컨대 법대나 의대가 더 어울렸을 이들이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럭저럭 잘 적응했고, 일부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외환위기가 터졌다. 경제가 무너지고 혼란이 닥치자, 날개를 편 것은 인맥 넓고 수완 좋은 이들이었다. 청소년 시절엔 입시 준비에 매달리느라, 대학 시절엔 전공 수업에 치여 사느라, 사회에 나와선 야근에 시달리느라, 인맥과 수완을 쌓지 못한 대다수 과학기술자들은 한순간에 찬밥 신세가 됐다.

한때 대단한 엘리트로 추앙받았던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이 무더기로 잘려나가서 슈퍼마켓이나 음식점 사장이 됐고, 그들이 다시 과열경쟁과 장사수완 부족으로 폭삭 망했다는 소문이 날개를 달았다. 때마침, 집집마다 보급된 인터넷은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때 신선한 충격이었던 '사이언스 키드의 생애'의 내용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됐다.

"미적분 못하는 공대생"?…보수 언론의 비뚤어진 공격

아이들을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이상한 제도를 운용하는 나라에서 이과생 수가 격감했다. 그나마 이과를 택한 아이들도 대부분 의대를 지망했다. 대학입시 수석합격자는 으레 물리학과를 택하던 시절은, 한순간에 멀어졌다. 과거엔 의사가 더 적성에 맞았을 아이들이 공학이나 자연과학을 택해서 불만이 생겼다면, 이젠 과학자로 성공할 재능이 뚜렷이 엿보이는 아이들까지 죄다 의대로만 쏠린다. 둘 다 비정상이다. 의사가 적성에 맞는 아이는 의대에 입학하고, 공학자가 적성에 맞는 아이는 공대에 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상식과 거리가 멀다.

이른바 이공계 기피, 또는 위기라는 말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게 됐다. 공과대학 교수들은 "요즘 신입생들은 수준 낮아서 못 가르치겠다"라는 말을 걸핏하면 쏟아냈고, 기자들은 이를 여과 없이 보도했다. 보수 언론에겐 호재였다. "미적분도 못하는 공대생들" 따위의 제목으로 중등교육을 공격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교육정책이 너무 느슨해서 이공계 신입생들의 수준이 떨어졌다는 논리다. 이는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을 더 쥐어짜야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논리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미적분을 아예 못하는 신입생을 받아서 뛰어난 과학기술자로 길러낸다. 이공계 신입생들이 옛날보다 미적분을 못한다면, 그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중등 교육과정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요즘엔 미적분을 잘 하는 아이들이 이공계 전공을 덜 선호하기 때문이다. 실제론 두 번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다.

"'낡은 상징'은 더 이상 안 통하는데…"

그렇다면, 이공계 교수들이 할 일은 당연하다. "왜 요즘 아이들은 과학기술을 전공으로 택하려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 해법을 내놓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대 교수들은 '요즘 신입생'들에게 불평을 쏟기에만 급급했다. 국내 최고의 이공계 대학인 카이스트(KAIST)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스트는 군사정부가 내건 '과학기술입국' 구호의 상징이다. 사관학교에서 군 지휘관을 길러내듯, 산업화에 필요한 과학기술 엘리트 역시 정부 주도로 키워낼 수 있다는 게 군인 출신 대통령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과학기술입국' 구호는 힘을 잃었다. '흰 가운을 입은 카이스트 박사'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엘리트에 대해 환상을 품는 이들은 이제 거의 없다. 군사정부 시절 초중등 교육을 받았던 세대에선 이런 경우가 아직도 꽤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이들과 다르다.

낡은 상징이 힘을 잃었을 때, 카이스트가 혼란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전통적으로 카이스트 학생들은 서울대생들에 비해 이공계 전공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훨씬 견고했다. 그런데 이런 카이스트에서조차 이공계 전공을 포기하는 이들이 대거 늘어났다. 경영학 전공이 인기를 끌었고,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자가 급증했다.

'이왕 이공계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면, 그래서 공부가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됐다면, 차라리 나중에 돈이라도 잘 벌 수 있는 전공을 택하자'라는 논리가 횡행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다른 대학에서도 있었지만, 이공계 분야에 특성화된 카이스트가 겪는 위기감은 더 컸다. 종합대학에선 몇몇 단과대학들의 문제지만, 카이스트에선 대학 정체성의 위기다.

'카이스트의 히딩크'는 실패했다

▲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 ⓒ뉴시스
그렇다면, 가장 절박한 심정으로 해법을 찾아야 했을 카이스트 교수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눈에 띄는 대응은 없었다. 다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해법이 있었을 뿐이다. 그건 미국인 총장 수입이었다. 미국에서 '스타 과학자'를 수입해 온 뒤, 그를 영웅으로 포장해주고, 그에게 대학 운영의 전권을 주면, 영웅이 된 총장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게다. 마침,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성공 사례가 이런 믿음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대학은 월드컵 축구팀이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러플린 총장을 영입했지만, 보수언론으로부터 '카이스트의 히딩크'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는 결국 중도 하차했다. 이어 한국계 미국인으로 세계 공학계에서 스타가 된 서남표 총장을 영입했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죽어가는 것만큼 선명한 교육 실패의 증거는 없다.

한국의 문제는 한국을 잘 아는 이들이 풀어야

서 총장을 옹호하는 이들은 말한다. "'인성교육', '교양교육'은 초중등 교육이 담당할 몫이 아니냐. 전문 지식을 가르쳐야 하는 대학의 총장에게 왜 초등학교 교장에게 필요한 덕목을 요구하느냐"라고.

일리는 있지만 한국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적이다. 직업과 학벌에 따른 격차가 심각한 한국에서 초중등 교육과정은 그저 대입 준비과정일 뿐이다. 게다가 대학 진학률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고교 졸업자 가운데 약80%가 대학에 진학한다. 그래서 한국에선 대학이 전문 교육기관이라기보다 보편 교육기관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초중등 교육의 열악한 조건까지 함께 고려하면, '인성교육', '교양교육'을 대학이 어느 정도는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물론, 정상적인 교육 논리와는 동떨어진 구조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바꿔야 하는 구조다. 그러나 당장은 이게 현실이다. 그런데 서 총장은 이런 현실을 무시했다. 아니, '무지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게다. 미국인인 그로서는, 사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초중등 교육이 완전히 정상화된 뒤라면, 서남표식 '개혁'도 찬사를 받았을 게다. 중·고등학교에서 충분한 인문 교양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대학 간판 때문이 아니라 조금 독특하고 강도 높은 교육과정을 원해서 카이스트에 진학하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힘든 전공 공부에 적응하지 못해서 학교를 관뒀을 때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이런 사회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한국의 문제는, 한국을 잘 아는 이들이 풀어야 한다. 외국인들의 조언은 참고자료일 뿐이다. 카이스트로 대표되는 한국 이공계 교육의 문제는,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을 부추겨서 지원자를 끌어 모았을 뿐 교육의 질은 형편없었던, 과거 군사정부 방식의 빛과 그림자를 잘 아는 이들이 풀 수밖에 없다.

'기러기 부모'들의 우상, 김현종의 '충격 요법'?

▲ 김현종 삼성전자 사장.
그런데 이쯤에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김현종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 사장이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미국 변호사인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과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FTA)'를 추진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명문고, 명문대학을 나와 전문직을 얻은 뒤, 한국에 돌아와 젊은 나이에 장관급 공직자와 대기업 사장을 지낸 그의 이력은, 지금도 이 땅의 숱한 '기러기 부모'들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이력을 지닌 김 사장과 상고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노무현 대통령이 의기투합했을 때, 다들 조금 의아해 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엔 공통분모가 있었다. 둘 다 '위기의식'이 강했다.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기는 힘든데, 중국의 추격을 견제하기도 어렵다고 봤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이야기한, 이른바 '샌드위치 위기론'이다. 또 그나마 선진국 수준에 다가간 일부 제조업과 달리, 법률이나 교육, 의료 등 서비스 부문은 수준이 몹시 떨어진다는 생각도 둘이 함께 갖고 있었다.

그래서 둘 다 '충격'을 원했다. 그래야 변화가 생긴다는 게다. 이런 충격이 내부에서 생기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오는 것도 괜찮다고 봤다. 이런 판단의 결과물이 한·미 FTA였다.

미국인 총장 영입과 '동시다발적 FTA 전략'의 닮은 점

군사정부 시절의 과학기술 인재 육성 정책이 효과를 잃어버렸는데, 새로운 대안은 찾지 못한 과도기에 카이스트가 시도한 개혁이 미국인 총장 영입이었다면, 한국 사회가 '정치적 민주화'에 걸맞은 경제·산업 정책을 찾지 못한 과도기에 시도된 게 '동시다발적 FTA 전략'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된 이공계 위기를 미국인 총장 영입이라는 충격 요법으로 풀려는 시도는 이미 실패로 드러났다. 야심만만한 미국 변호사에게 파격적인 권한을 줘서, 한국의 낙후한 서비스 부문에 충격을 주려던 판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 변호사와 그를 따르던 통상 관료들이 추진한 FTA 협정문에서 번역 오류가 쏟아진다. 이런 오류들이 바로잡히지 않은 채 FTA가 발효됐다면, 얼마나 많은 재앙이 생겼을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서 실력 있는 인재를 들여오지 말자는 게 아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 안다. 히딩크 감독이 성공한 것도 폐쇄적인 축구계 문화를 깼기 때문이다. 이런 충격은 앞으로도 계속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는가"

다만, '충격 효과'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게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 준비가 안 돼 있는 이들에겐 아무리 좋은 충격도 그저 독약일 뿐이다. 카이스트를 이끈 미국인 총장들이 한국 사회에 남긴 성과가 있다면, '우리는 왜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 점이다. 성공한 개방은 모두 준비된 개방이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해법을 궁리할 줄 모르는 집단을, 뛰어난 외부인이 지휘해서 성공한 사례는 히딩크의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 이걸 일반화해선 안 된다.

물론, '카이스트의 히딩크'로 불렸던 미국인 총장과 'FTA 전도사'를 자처한 미국 변호사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러플린과 서남표, 두 명의 전·현직 카이스트 총장들이 김현종 사장의 나이일 때는 자기 분야에선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김 사장과 그를 따르던 통상 관료들은 영어 번역조차 제대로 못한다. '히딩크 쇼크'로 이뤄낸 '월드컵 4강 신화'는 이제 추억으로만 남겨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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