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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하루 100만 원짜리 인간이 됐습니다"

[김진숙의 크레인 편지]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지난 6일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그가 농성 이후 전화 연결을 통해 집회에서 한 발언과 써 내려보낸 편지글 중 일부를 발췌했다. <편집자>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물한 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되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잘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조합원들 운명이 뻔한데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렸는데 바닥이 참 따듯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 씨는…재규 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2011년 1월 6일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을 시작하며)


▲ 크레인 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민주노총 부산본부

"오늘 아침엔 밑에서 부르고 난리를 칠 때까지 늦잠을 자서 많은 분들이 놀랬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지닌 상처는 깊고도 아픕니다.

8년 동안 한 번도 주익 씨 이름을 편하게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주익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주익 씨가 눴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잤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마지막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던 내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끊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 하겠습니다."(2011년 1월 7일 저녁 촛불문화제)

"어제는 이 크레인을 접수한지 3일째 되는날. 첫 휴일이었습니다. 뭔가 기념이 될 만한 행사가 없을까. 오래오래 고민하다 발을 씻었습니다. 오십 평생 씻어온 발인데 내 발을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게 처음이었습니다. 왼쪽 엄지발톱은 발톱무좀으로 부스러지고, 새끼발가락엔 굳은살이 두껍게 박혔습니다. 50년 넘도록 무식한 주인 데리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고 쓰다듬어 줬습니다.

휴일 저녁 금쪽같은 시간에 나와 주신 동지들. 고맙습니다. 동지여러분 부디 감기조심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아직도 이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주익 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습니다. 그게 열사정신 계승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2011년 1월 9일 저녁 촛불문화제)

"1주일 전 이곳을 처음 오르던 새벽, 혼자 벌벌 떨고 앉아 동이 트길 기다리면서 마침내 동이 트자 조합원들이 하나 둘 모이는 걸 보며 제일 먼저 저 길 건너편 초등학교 정문 앞을 봤습니다.

그때 주익 씨는 내가 보였을까.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고 저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다 돌아가곤 하던 내가 보였을까. 그저 무력하게 쳐다보다가 돌아설 뿐인 그 사람이 낸 줄 주익 씨도 알았을까. 그때 주익 씨가 등지고 섰던 하늘은 파란색이었는데 여기 올라와 처음 본 하늘빛은 노란색이었습니다.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10년 전 그때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대량학살이 있었고 2년을 싸워 노사가 합의를 했건만 그 합의를 사측이 번복하던 날. 키 큰 사내 하나가 숨죽이며 올랐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갇힌 짐승처럼 이 크레인 위를 서성이며 오늘은 동지들이 얼마나 모일까 노심초사 내려다보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129일을 매달려 있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도크에 배가 빠지던 날, 육중한 배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뒤돌아서던 조합원들을 보며 끝내 유서를 썼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오늘 정리해고 명단 발표 소식을 들었습니다. 290명, 가족까지 1200명, 하청까지 수천 명. 그 중에는 아빠가 빨리 일을 다시 시작해 다시 피아노학원을 다니고 싶은 딸내미도 있을 것이고 다시 태권도를 배우고 싶은 아들내미도 있을 것이고, 이제나 저제나 우리 아들 직장을 걱정하는 늙으신 부모님도 계실 것이고 수십 년 새벽밥을 했던 마누라도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흩어지지 않기 위해, 다시는 울지 않기 위해 이 85호 크레인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이 85호 크레인의 달력은 2003년 10월17일부터 다시 시작하여 오늘이 2003년 10월23일입니다.

제가 평생을 짝사랑했던 한진중공업 동지 여러분.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아프지 마시고 술 많이 먹지 마시고 밥 잘 먹고 잘 버텨서 이 투쟁 기필코 승리합시다. 고맙습니다."(2011년 1월12일 저녁 촛불문화제)

▲ 2003년 당시 故 김주익 한진중공업노조 지회장 자살 사건 이후 거리선전전. ⓒ연합뉴스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스물한 살에 입사해서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향하리라 믿었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용접슬라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철판에 깔려 두 다리가 다 부러져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잔업에 그렇게 눈 딱 감고 살면 금방 부자가 될 줄 알았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여름이면 그늘에 앉아 쉰내 풀풀나는 땀 젖은 작업복을 볕에 널고 겨울이면 동상걸린 손가락 발가락 문질러가며 '딴 사람들도 다 이래 살끼야' 스스로를 달랬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두 다리에 다 기브스를 하고 누워있던 사람수보다 바퀴벌레가 휠씬 많던, 환자밥도 안 나오던 병원에 번갈아 죽을 끓여 들고오던 아저씨들이 계시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한결같이 작업복 입고 출퇴근 하시며 한 번도 서문 앞 횡단보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아저씨에게 "아저씬 소원이 뭐예요?" 물으니 "안 죽고 일하는 거다" 1초도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오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조합원들이 준 권력으로 조합원들을 억압하며 조합원들 위에 군림하던 어용노조가 지배하던 여기가 한진중공업입니다. 회사 눈치보다 노조의 눈치를 더 두려워하며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했던 어용노조 수십 년 민주노조 세우겠다고 수십 명이 해고 됐고 전과자가 됐고 훈련소 동기, 입사동기 박창수를 제 손으로 묻었습니다.

그 날, 제 청춘도 함께 솥발산에 묻었고 그렇게 저는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고 벗어나지도 못한 채 저는 한진중공업을 맴돌았습니다. 정규직보다 훨씬 많아진 하청노동자들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껴야 했고 명퇴라는 이름으로 쫓겨나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곳에 올라와서 저는 오히려 편안함을 누립니다. 힘내라고 문자 보내주시는 아저씨들. 미안하다며 술 먹고 우는 동생들. 이 추운 겨울날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크레인을 사수하시는 동지들. 찬바람 벗 삼아 온종일 이 곳을 지키는 동지들. 여러 동지들 덕분에 저는 잘 자고 잘 먹고 있습니다. 걱정하시지 마시고 모두의 마음을 모아 승리하는 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2011년 1월 13일 저녁 촛불문화제)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세월, 27년이 흘렀지만 전 아직도 제가 해고통보를 받던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대의원에 당선되면서 부서이동 몇 번 당하고 대공분실 끌러 갔다 오고, 대기발령 받고, 몇 달 사이에그 엄청난 일들을 당하면서 해고를 예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설마 했습니다. 일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상도 받고 했는데 설마 해고까지야 시키겠나.

1986년 7월 11일 해고당하면서 제 삶은 뿌리째 뽑혔고 그 후 한 번도 다시 뿌리 내리지 못했습니다. 어젯밤 해고통보를 받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살아남고 동생은 잘렸습니다. 형이 어떻게 동생을 버리겠습니까. 끝까지 동생을 지키겠습니다." 어떤 분은 "명단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 더 불편합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동생은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니까 안전화라도 팔려고 자갈치 시장에 갔더니 한진에서 안전화가 하도 많이 나와서 2만 원짜리를 15000원에 팔았답니다. 지난달 월급 7200원을 받고 아구찜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염치가 없어 마누라한테 차마 말을 못했다는 가장. 몇 년을 참아왔고, 가장 체면 말이 아닐 정도로 고통 받으며 기다려 온 결과가 결국은 정리해고란 말입니까.

전화를 해도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던 마누라. 아빠,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묻던 딸내미. 노인연금 받은거라도 부쳐 주시겠다던 어머니. 동지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산자 죽은 자는 저들이 갈라놓은 이간질일 뿐입니다. 우린 어제도 하나였고, 오늘도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한 100일이고 200일이고 저는 이 크레인을 지키겠습니다. 저는 이 크레인위에서 승리를 확신합니다. 끝까지 단결해서 꼭 승리합시다. 고맙습니다."(2010. 1. 14 부산시민문화제)

"지난 주말 그 추운 날씨에 크레인 밑으로 아빠를 보러 오겠다고 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빠~"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해서 아이를 안아주는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이의 미래를 죽을 힘을 다해 지켜내기 위해 이 겨울, 아빠가 집에도 못 들어간다는 걸 아이도 알까요.

며칠 만에 만난 마누라에게도 미안한 마음뿐. 집에서 애들이랑 뭘 먹고 사는지 묻지도 못하고 "춘데 말라꼬 왔노" 불퉁하게 한마디 던질 뿐입니다. 마누라의 가방에 삐죽 나와 있는 벼룩시장을 보고 또 마음이 내려앉습니다. 일자릴 알아보는 걸까요. 아니면 더 싼 집을 찾아다니는 걸까요. 애 딸린 마누라가 벌어봐야 편의점 알바이고 마트 비정규직일텐데….

아이가 뛰놀기에 공장은 너무 춥고 아이를 오래 바라보기도 마음이 고달파 서둘러 보내놓고는 추운 거리를 서성거리며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 뭅니다. 앞엔 허허벼랑인데 자꾸만 등을 떠미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해고통보를 받은 이후로는 사소한 일에도 화가 솟구치고 작은 일에도 설움이 북받치곤 합니다.

작년 겨울, 출근시위를 할 때 백일 떡을 받아먹었던 그 아들내미가 돌이라고 크레인위에서 돌떡을 받아먹었습니다. 예준이가 두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민석이가 세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유주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다림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도 현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이 공장에서 지켜보게 될 거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하루 100만 원짜리 인간이 됐습니다. 징역 살 땐 하루에 4만5220원씩 밖에 안쳐주더니, 제 가치를 이제야 인정받는 것 같습니다. 근데 이 투쟁 깨지면 저는 진짜 거시기 됩니다. 한진 자본은 2003년 시나리오와 똑같이 가고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크레인으로 하루 100만원을 벌어서 이 크레인을 운전했던 하청노동자에겐 얼마의 월급을 줬습니까?

한 이틀 디지게 추웠습니다. 안에 있던 것들도 다 얼어서 사과는 사과탄이 되고 바나나는 곤봉이, 시루떡은 보도블록이 돼있었습니다. 그 추운 밤에 이 크레인을 지켜주셨던 사수대 동지들 그리고 조합원 동지 여러분들이 피워 올리는 가슴속 장작불로 인해 저는 동상도 안 걸리고 감기도 안 걸리고 잘 견뎠습니다. 눈물겹게 고맙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수한 고비를 넘으면서 수많은 무용담을 만들어 오셨던 아저씨들. 그 무용담을 신화처럼 들으며 한진 조합원이라는 자긍심을 키워왔던 동생들, 서로 서로 잘 지켜줍시다. 부디 잘 이겨내고 잘 견뎌냅시다. 총 맞은 동지들 우리 단결이라는 방탄조끼 입었잖습니까? 버티면 이기는 시간싸움이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승리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어차피 구제역 때문에 설날 고향도 못갑니다. 저는 우리 한진중공업 조합원동지들 그리고 연대투쟁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동지여러분들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고맙습니다."(2011년 1월 19일 저녁 촛불문화제)

"완벽하게 사생활이 보장되는 이 공간에서 저는 마음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리가 뻗어지지도 않던 당감동의 자취방보다 좋고, 잔업하고 들어가면 맨날 연탄불이 꺼지던 영도의 자취방보다 따시고, 화장실이 없어 200미터 넘는 성당까지 뛰어다녔던 초읍의 자취방보다 뼁끼통 화장실이 가깝고, 밤에 늦게 들어가면 물 받는 시간을 못 맞춰 옆집 고무 다라이에서 물을 훔쳐 쓰던 가야의 자취방보다 물도 많이 씁니다. 그리고 주로 산만디에 살아서 높은데가 적성에도 맞습니다.

첨엔 잘 걷지도 못했는데 이젠 뛰어다닙니다. 다만 아쉬운게 있다면 높은데서 보니까 운동의 현실이 골목골목까지 세세하게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활동가 조직이 무너진 운동. 권력이 곧 원칙이 된 운동.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를 통제하는 걸 연대라 부르고 조합원들은 동원되는 쪽수이고 구호나 따라 외치는 앵무새 취급당하는 운동.

우리 한진 조합원들, 무노동 무임으로 몇 달째 임금 몇 천원 받고 삽니다. 몇 만원 받는 노동자는 귀족노동자입니다. 이 추운 겨울 집에도 못 들어가고 생활관에서 수백 명이 함께 먹고 잡니다. 정리해고 명단 발표된 이후에도 산자 죽은 자 구분 없이 굳건한 단결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조합원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는 건 이미 이기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2011년 1월 22일 열사회 주최 문화제)

"한진중공업 우리 남편들만 다닌 거 아닙니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한 동안에도 한시도 맘놓지 못했던 마누라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져라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도 다니셨습니다.

아직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 아직 엄마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어린 아이, 유모차에 잠들어 있는 아이, 얼마 전 큰 수술 끝내고 휠체어를 타고 온 아이, 저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퇴 안하면 퇴직금 반도 못 건진다는 헛소리에 넘어가지 않고 설 명절 잘 견디면 회사도 별 수 있겠습니까.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진짜 구리구리한 한진자본. 다들 힘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 우리 생존권 내 손으로 지킵시다."(2011년 1월 23일 가족한마당(미발표))

"지난 일요일 가족문화제를 한다고 가족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아직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애기들, 이제 막 걸음마를 한다고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들, 아직 엄마 뱃속에서 머잖아 세상구경할 날 준비를 하는 태아들.

제 눈엔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생들이 누군가에겐 하늘보다 크고 넓은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빠들이었습니다. 자기랑 놀아주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았던 아빠가 정리해고를 당했다는데 정리해고가 뭔지를 아이들에게 어찌 설명하겠습니까.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남편이 왜 구조조정 대상이 돼야 하는지 아내들이 어떻게 납득을 하겠습니까.

웃으며 출근했다 웃으면서 퇴근하는 일이 참 힘든 세상이 돼버렸지만 저는 머잖아 다시 그런 행복을 찾게 될거라 믿습니다. 늘 마음다해 걱정해 주시고 진심으로 아파해주시는 동지여러분 고맙습니다. 노동자가 연대하지 않으면 단결하지 않으면 그 책임은 우리 노동자들이 져왔다는 거 늘 잊지맙시다. 고맙습니다."(2011년 1월 25일 저녁 촛불문화제)

"오늘이 21일째입니다. 저는 여기 와서야 비로소 늦잠이라는 걸 자보는데 아침마다 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야 아침식사를 하러 가시는 동지들 마음도 알겠고, 밧줄에 밥이나 물을 달아 올리고는 왜 밧줄을 밑에서 꽁꽁 묶어 놓는지도 어제야 알았습니다.

마이크 잡고 열사정신 계승을 부르짖고 단결을 약속했던 사람들은 이젠 안 오는 이 자리를 지키는 건 2003년에도 끝내 이 자릴 떠나지 못한 동지들임도 이젠 알겠고 주익 씨가 마지막 보고 간 얼굴들도 저 힘없는 조합원들이었음을 이젠 알겠습니다.

주익 씨가 앉고 눕고 섰던 이 자리에 와서야 어떤 날 웃었고 어떤 날 울었고 어떤 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절망했는지도 알겠습니다. 129일 동안 되풀이되던 절망가운데서도 어쩌다 오는 희망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도 이제 알겠습니다.

깊은 상처는 세월이 흐른다고 아무는게 아니라 그 상처에 새살이 돋아야 비로소 아문다는 것도 이제 알겠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것뿐이지만 제겐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죽을 쑤어 오시고 손수 짠 양말을 들고 오시는 얼굴도 모르는 수녀님을 꼭 뵙고 싶고 촛불집회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오는 19살 동현이 얼굴도 보고 싶습니다. 굴국을 끓여 와서 위아래서 함께 먹었던 아직 얼굴도 모르는 초선 대의원도 꼭 보고 싶고 정관에서 매일 오시는 지회장님께 막걸리도 한잔 받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8년 동안 이 크레인을 단 한 번도 똑바로 보지 못했던, 술만 먹으면 우는, 김주익, 곽재규라는 이름을 평생 낙인처럼 달고 살아야 할 우리 조합원 동지들. 그 동지들이 더 이상 아픔 없이 정리해고 불안 없이 웃으며 일하는 걸 꼭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일 1시간씩 운동을 합니다. 96년만의 추위라던, 그래서 만지는 것마다 손에 쩍쩍 들러붙던 그날도 운동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르내리는 운동. 제 발로 걸어 내려가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섭니다. 제가 잠그고 올라온 문이지만 제힘으론 저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제가 걸어 내려가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 여러분들은 문 여는 법을 잊지 말아주세요."(2011년 1월 26일 민주노총 결의대회)

"오늘 인천에서 대우차 비정규직 동지들이 오셨습니다. 지회장은 천막도 없는 공장 앞에서 한달을 넘게 단식을 하고 사방이 다 뚫려 누울 곳은 커녕 서있기도 힘든곳에서 비닐 하나로 이 추위를 견디며 황호인, 장준삼 두 동지는 정문 아치에 올라가 두달째 고공농성 중입니다.

저희보다 훨씬 힘든 조건에서 저희보다 훨씬 어려운 정규직화 쟁취 투쟁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한진 동지들에게 힘을 주겠다고 인천에서 오신 겁니다. 어제는 서울 기륭전자 동지들이 오셨었습니다. 해고자 10명이 남아 꿈쩍도 않는 회사와 맞서 6년을 싸운 동지들이 마침내 정규직 쟁취라는 승리를 쟁취해냈었습니다.

진짜 신기했던 게 그 투쟁의 와중에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만들어서 안고 왔습니다. 해고된 하청 노동자들이 해고를 막겠다고 싸우는 정규직들에게 연대를 와서 이 크레인 중간지점까지 올라와 힘내시라 구호를 외치는 대우차 동지들을 보면서 많이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이 공장에서 강제로 쫓겨난 수많은 형님들과 동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 됐을 겁니다. 우리 또한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공간에서 이렇게 잘 견딜 수 있는건 동지들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믿지 못한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 바람에 흔들거리는 이 크레인을 어찌 지키겠습니까.

조금만 더 버팁시다. 평생을 하청으로 떠도는것보다 지금 버티는 게 남는 겁니다. 쫓겨났다는 상처를 평생 안고 사는 거 보단 지금 쫌 힘든게 낫습니다.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달려와 주는 동지들이 있는 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2011년 1월 27일 저녁 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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