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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정치'다"

[복지국가SOCIETY] '건강 불평등'과 복지국가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지만, 필자가 토론토에 있을 당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과 '건강과 건강정책의 정치학'이라는 두 과목을 내 지도교수님과 함께 가르쳤다. 이 과목들의 첫 시간에 건강의 결정요인을 보는 다양한 관점의 철학적 기반에 대해 다루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 지도교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보건학은 가치중립적인가?"

과학과 과학적 지식은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과학이 당대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과학의 일부인 보건학도 가치중립적일 리가 없겠지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건학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신 내 지도교수님의 방식이었다.

즉, 임상의학이 병든 사람을 고치려는 것은 병든 상태보다 그렇지 않은 건강한 상태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판단을 이미 내재한 것이라는 점, 같은 이유로 보건학도 불건강한 상태보다 건강한 상태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건학은 건강증진을 위한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인구집단의 건강증진을 위한 다양한 과학적 방법과 사회적 기술을 동원하는, 종속변수(건강)에 대한 학문이다.

그렇다면 보건학에서 복지국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며, 복지국가를 지지한다면 그것이 인구집단의 건강에 좋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회역학과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한 논의가 복지국가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온 것은, 윌킨슨(Wilkinson)의 소위 "상대소득 가설"(Relative Income Hypothesis)의 공이 컸다. 주거환경, 가난, 노동조건 등이 건강수준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고민은 이미 비르효 등 19세기 의료인 및 사회과학자들로부터 시작되어 왔다는 점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이라는 아이디어는 사실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로 오면서는 링크(Link)와 펠란(Phelan)에 의해 1970년대 맥큐언(McKweon)의 작업이 재조명된 바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로저스와 프레스톤이 현재는 '윌킨슨(Wilkinson)의 테제' 혹은 '상대소득가설'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초가 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맥큐언(McKweon)의 논지는, 특별한 의료적 발전이나 공중보건적인 활동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경제적 및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지난 2세기 동안의 건강수준의 놀라운 향상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테제는 주로 '역학적 전환(epidemiological transition)'이라고 불리는 시기를 거치면서 그 실효성이 의심을 받게 되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상대적 소득 가설,' 혹은 윌킨슨의 테제이다.

이 가설은 선진국들에서는 경제적 수준에 의해 공공의 건강수준이 향상되는 시기(맥큐언의 테제)를 이미 넘어섰으며, 그 이후에는 절대적 경제수준보다는 상대적 경제수준, 즉 지니계수 등을 이용하여 측정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가 건강수준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윌킨슨(Wilkinson)은 주로 심리-사회적 경로(psychosocial pathway)를 중심으로 논지를 펼치게 되는데, 사회적 네트워크(social network)이나 사회적 원조(social support), 특히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로 분화되게 된다.

상대소득 가설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나뉘었지만, 사회적 자본에 대한 비판은 좌파와 우파 양측에서 이루어졌다. 소득불평등의 건강에 대한 상관관계를 사회적 자본이나 심리사회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유추하는 것의 한계는 경제적 불평등이 어떤 다른 변수들에 대한 '대리지표 (proxy measure)'이라기보다는 경제적 불평등 '그 자체'가 불건강의 원인이라는 오해(아래 주석 참조)에서 비롯되는데, 심리사회적 경로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신-유물론적 경로(neo-material pathway)는 소득수준이 심리-정신적 경로를 거쳐 불건강으로 이르는 경로보다는 큰 소득격차가 결국엔 더욱 열악한 빈곤층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이라는 상황으로 결과 되는 현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불건강으로 결과하는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국민의 건강수준은 복지수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프레시안(여정민)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특히 건강불평등의 정치경제적 결정요인들에 주목하는 측에서는 건강의 '정치적' 결정요인으로 그 초점을 옮기게 된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소득불평등의 사회적 생산(즉, 소득 재분배)에 주목하는 학파는 복지국가로 그 관심을 돌리게 된다.

나바로와 쉬의 연구는 에스핑-엔더슨의 복지국가 유형학을 보건학 분야에 적용한 최초의 연구라 볼 수 있는데, 세 가지 복지-자본주의 유형, 즉, 사회민주주의, 기독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분류에 따라 각 국은 서로 다른 정치-경제적 조건과 부의 불균형, 그리고 건강상태를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좌파정당과 그들의 평등에 준거한 이데올로기가 공중보건 수준을 향상시키는 정책들을 시행하게 하고, 또한 그 결과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와 문타네가 18개 선진국의 41개 년(1961년~2000년)을 함께 분석한 결과를 보면, 건강수준(영아사망율과 저체중아 출산율)은 복지국가의 유형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만이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게 더 건강하였으며, 다른 나라들 간의 차이는 유의성이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41년 간 영아사망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한 데에 비해, 저체중아 출산율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증가했다는 점인데, 특히 저체중아 출산율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 국가들과 다른 나라들 간의 차이 또한 1980년대를 경유하면서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1) 건강수준은 국가별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복지국가 유형에 종속되어 나타난다는 것, 그러나 2) 건강지표가 복지국가 유형에 민감성을 갖는 정도는 해당 지표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것, 그리고 3) 주류 세계화론이나 복지국가 위기론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1970년 이후에도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건강수준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다면 복지국가는 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복지국가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힘을 강조하거나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책을 강조하는 차이는 있지만, 종국적으로 의료정책을 포함한 사회정책이 복지국가 유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편이다.

따라서 사회정책 중 특히 산전산후 및 출산휴가를 포함하는 보육/여성/아동 정책과 노동시장정책이 관심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즉, 의료제도와 의료정책에 주로 관심을 갖던 건강정책의 영역이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그 중 하나인 다양한 사회정책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건강에 좋다. 이것이 보건의료를 연구하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복지국가를 지지해야 할 이유이다. 복지국가를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고용 형태와 업무 환경, 그리고 거주 환경의 개선, 이주 노동자에 대한 좀 더 평등한 접근, 실업 감소,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사회적 배제의 완화, 교육의 평등한 기회 확장, 주거 및 근로 환경 개선과 같은 평등주의적(egalitarian) 사회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이 부분에 투자하는 재정의 개혁도 필요할 것이다.

종국적으로는 국가적 수준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우선순위가 크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보다는 감소를 지지하는 정치적 분위기와 정치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주석) 이것이 오해인 이유는, 경제적 불평등은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 외재적 요인이 아니라 각국의 어떠한 정책적 행정적 특징에 의해 결정되는 내재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득의 상대적 수준은 그 자체가 건강수준과 직접적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득불평등성과 높은 상관관계에 있는 무언가가 건강수준과 강력한 연관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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