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100여 명에 이르는 삼성 반도체 피해 노동자 중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심사를 요청한 이들은 16명이다. 이중 10명이 이미 승인 불가 판정을 받았고, 비슷한 조사에 기초해 심사받게 될 6명도 불가 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 불승인 판정을 받은 이들 중 5명은 결과에 불복해 지난 1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지난 15일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이 산하 지부에 보낸 공문을 보내 삼성전자를 소송에 참여시키라고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더 커졌다. 요청을 받은 삼성은 유명 로펌의 변호사 6명을 선임해 소송에 참여했다. 분노한 가족들이 근로복지공단을 향했음은 물론이다.
"산재 불승인하고, 1년에 1조2000억 벌었다고 자랑?"
18일 2시 근로복지공단 민원실 입구에 5명이 들어섰다.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유미 씨의 부친 황상기 씨, 같은 증상으로 2004년 숨진 故 황민웅 씨의 아내 정애정 씨, 2005년 뇌종양을 진단받고 뇌 반쪽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은 한혜경 씨의 모친 김시녀 씨, 2001년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려 지금까지 투병 중인 유명화 씨의 부친 유영종 씨와 이들을 돕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였다.
ⓒ프레시안(김봉규) |
이들은 곧장 신영철 근로복지공단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후 민원실 입구에 주저앉았다. 이미 딸과 남편을 하늘로 보낸 황상기 씨와 정애정 씨는 고인의 영정을 가슴에 품었다. 공단 관계자가 다가와 다른 민원인들에게 방해가 되니 자리를 옮기자고 하자 그동안 참아왔던 고함이 터져나왔다.
"(산재) 신청하는 족족 다 불승인 때려놓고, 소송 거니까 삼성이랑 붙어서 대응하는 게 노동자를 위한다는 근로복지공단이야! 자기네 직원들은 공놀이하다 다치면 산재 보상하면서, 우리는 병원비 수천만 원씩 들어 당장 돈 걱정에 잠도 못 자는데!"
길게는 3년이 넘게 싸움을 이어온 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도사'가 돼있었다. 유영종 씨가 "노동자들 피해 보상하라고 만들어진 공단이 1년 흑자가 1조2000억 원이나 된다"며 "그 돈이 다 치료비 많이 들어가는 노동자들의 산재를 불승인해서 만든 거 아닌가"고 따져 물었고 몰려든 공단 직원들은 대꾸하지 못했다.
황상기 씨는 "3년 전부터 이사장을 만나 우리 사정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그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며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얼굴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밖에는 반올림 회원들이 집회신고를 한 장소에서 밤샘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 '삼성 백혈병' 피해 노동자의 가족들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을 비꼬는 현수막을 들어보이고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
"얼마나 많은 죄를 졌으면 나오질 못해!"
거듭되는 면담 요구에 공단 직원들은 "(이사장이) 회의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약 1시간을 기다리던 이들은 직접 이사장실로 가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5층 이사장실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모두 작동을 멈춘 상태였다. 유일하게 운행되는 1대는 직원들이 통제 중이었다. 계단이 있는 비상구도 자물쇠가 채워졌다.
가족들은 "지금까지 기다리라고 한 게 엘리베이터 멈추고 문 잠그려는 속셈이었나"라고 분노를 토하며 운행 중인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려 시도했다. 이들은 직원들과 뒤엉켜 10여 분간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1대 남은 엘리베이터도 작동을 멈췄다. 정애정 씨가 "(이사장이) 얼마나 많은 죄를 졌으면 나오질 못해"라며 울부짖었다. 황상기 씨도 "당신들이 계속 이러면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갈 거야, 그들이 계속 죽일 거란 말이야! 당신들이 나서서 이걸 끊어야 할 거 아냐!"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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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란 노무사는 "(산재 불승인 처분 이후) '소송을 걸면 이길 수 있다'고 하던 공단이 정작 소송을 제기하니 삼성을 끌어들였다"며 "예전에 공단을 방문해 항의를 하면 소란을 피운다고 끌어내고 전단을 붙이면 '아줌마 얼굴에 붙여버린다'고 위협하던 이들이 오늘은 저렇게 소극적인 걸 보면 찔리는 게 있기는 있나보다"라고 말했다.
이사장실로 가는 길이 막힌 가족은 로비를 배회하며 자신들의 사정을 호소했다. 산재 신청 당시 상담했던 보험급여국장을 발견한 김시녀 씨가 달려갔다. "우리 딸(한혜경 씨) 보셨죠? 휠체어 타고 왔을 때 봤죠? 우리 딸 지금도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목디스크 걸리고 혓바닥이 다 갈라졌어요. 머리가 지끈지끈 거린다는데 돈이 없어서 MRI도 못 찍어. 자랑도 아닌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얘기하는 거예요." 보험급여국장은 눈을 내리깔고 자리를 피했다.
▲ 이사장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가로막은 직원들과 피해 노동자 가족들의 다툼을 지켜보던 정애정 씨(故 황민웅 씨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
가족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밤까지 농성을 이어갔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다음날 오전 중에 이사장과의 면담 자리를 만들겠다는 공단 측의 전갈이 돌아왔다. 3년을 기다렸던 가족들은 20일 오전 이사장을 만나 3시간 동안 설득했다. 삼성을 소송에 참가시킨 데 대해 사과하고, 역학조사에서 제기된 소수의견을 적극 반영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산재와 관련된 전문 정보를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 소송에 참여하는 경우는 처음이 아니며, 현재 보험급여지급 시스템상 공단 측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기존의 해명이 되풀이됐다. 거듭되는 문제제기에 이사장은 "향후 검토해보겠다"라는 말을 마지못해 꺼낼 뿐이었다. 공단에서 만 하루를 꼬박 버텨 3년 동안 기다려왔던 면담 자리를 얻어낸 가족들은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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