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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경찰서의 진풍경, 현대기아차의 살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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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초경찰서의 진풍경, 현대기아차의 살풍경

[기고] '돈 앞에서 불평등한' 집회의 권리

수학문제 하나.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오후 2시.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하고 싶었던 동희오토 해고자 이백윤 씨는 집회신고를 내기 위해 서초경찰서에 갔다. 그런데 민원실 앞에는 현대기아차 사측의 방어집회를 신고하기 위해 5명의 용역직원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 씨가 가능한 가까운 평일에 집회를 하고자 한다면 그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집회신고를 낼 수 있을까?

서초경찰서 앞 진풍경

요즘 서초경찰서 별관 민원실 앞에는 매일 진풍경이 벌어진다. 이곳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10여 명의 사람들이 집회신고를 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맨 앞사람이 집회신고서를 낸다. 이 진풍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신고서를 낸 사람이 다시 맨 뒤로 가서 줄을 서는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한 칸씩 당긴 다음 전혀 새롭지 않은 하루를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집회신고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 등을 적어서 언제든 민원실에 제출하면 된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이들이 모두 현대기아차 본사 앞 집회신고를 내기 위해 나와있는 용역직원 및 아르바이트생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당은 대략 12만 원. 최소 2교대로 운영한다고 해도 20명은 필요하니 현대기아차가 집회신고를 위해 쓰는 돈은 최소 하루에 240만 원인 샘이다.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현대기아차 본사 앞 살풍경

현대기아차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집회신고를 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속칭 '방어집회'때문이다. 현대기아차는 물론 현대제철, 모비스, 엠코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에 하청업체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양재동 현대기아본사와 관계를 맺고 있고 그만큼 많은 분쟁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본사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가 뜸한 원인은 바로 현대기아차가 집회신고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2일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소속 7명의 해고자들이 해고자원직복직과 노동조합 인정 등의 요구를 걸고 현대기아차와의 직접교섭을 주장하며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이제 그들이 매연으로 가득한 길바닥에서 지낸 지 한달이 지났다. 집회신고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해고노동자들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의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노숙을 선택했다. 집회를 할 수도 없었고, 현수막을 걸 수도 없었다. 천막이라도 치면 불법건조물로 철거될 것이 뻔했다.

경찰도 노숙하는 것은 관여하지 않았고, 구청도 불법건조물이 아닌 이상에야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오로지 현대기아차 사측만이 동희오토 해고자들의 노숙농성에 비인간적인 폭력으로 응답했다. 첫날부터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잠들어 있는 해고자들에게 모래를 뿌렸다. 시시때때로 용역경비들이 몰려나와 농성물품을 파괴하고 폭행과 욕설을 퍼부었다.

'불법주차'와 함께하는 교통질서 캠페인

현대기아차는 동희오토 해고자들의 노숙농성이 용역경비들의 폭력으로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지자 실제로 자신들이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부서별로 돌아가며 피켓을 들고 나와 교통질서를 확립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개중에는 '자연과 우리는 하나입니다'라는 뜬금없는 피켓도 섞여 있었지만 가장 웃지못할 아이러니는 그러는 와중에도 현대기아차의 버스 한 대가 동희오토 해고자의 1인 시위를 가리기 위해 '불법주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유령집회', '방어집회'라고 불리는 사측의 이러한 가짜 집회의 목적은 오직 자신들을 향한 비판의 화살을 막는 데 있다.

지난 8월 8일 현대기아차는 결국 용역직원을 포함해 150여 명을 동원, 대규모의 유령집회를 여는 와중에 동희오토 해고자들의 노숙농성장을 강제로 철거해 버렸다. 해고자들은 길 건너편으로 옮겨 노숙농성을 이어갔지만, 그들이 처음 자리잡았던 곳은 벌써 중장비로 파헤쳐지고 순식간에 화단으로 바뀌어 다시는 엉덩이를 붙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서초경찰서의 집회신고 접수, 합법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서초경찰서의 입장에서는 매일 10여 명의 인원이 경찰서 앞에 진을 치는 것도 골칫거리다. 동희오토와 같은 노동자들이 집회신고를 내기위해 그 대열에 합류하면 경찰서 앞은 며칠동안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집회신고 대기장소'다. 한줄로 설 수 있도록 가드레일을 만들어 놓았고 새치기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CCTV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만큼 합리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법적인 절차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집회신고는 말그대로 신고이기에 누구든 신고서를 제출할 수 있고, 만일 2개의 신고서의 시간과 장소가 겹친다면 접수한 시간이나 신고내용의 현실성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쪽의 집회에 불가를 통보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서초서의 방식은 오로지 줄서기에 따라 접수 여부가 결정되고 순서에 밀린 이는 신고서 제출조차 할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버렸다. 1년 365일 교통질서 캠페인 명목으로 1년 365일 집회신고를 하고, 게다가 실제로는 분쟁이 벌어질 때만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집회신고와 자신들의 절박한 요구를 위해 단 하루라도 정당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보려는 사람들의 집회신고가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오직 '선착순'으로만 비교되는 것이 과연 평등한 것일까?

'법 앞에 평등'이 '돈 앞에 불평등'이어서야.

문제는 이러한 방식과 관행이 일반인들의 대기업을 상대로한 집회신고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집회 한 번을 위해 10일이 넘는 시간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하루에 수백만 원을 써가면서 용역직원을 동원해 집회신고를 낼 수 있다.

사실 서초경찰서에는 현대기아차 이외에도 삼성, 두산 등의 대기업들이 유령집회신고를 위해 용역직원들을 배치해 놓는다. 만인이 법앞에 평등한 것을 법치국가라 한다면 만인이 돈 앞에 평등하지 못한 것이 자본주의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이야기하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지켜내고자 한다면, 4110원의 최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과 '회장님'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하룻밤에 240만 원을 쓰는 거대기업간의 평등이 무엇인지 말해야 할 것이다. 거대 재벌들의 집회신고 독점과 유령집회에 대해서 분명한 규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발언권이 우선시 되는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정답: 202시간

풀이.
12일: 10시간 (이날 신고를 하면 일요일에 집회가 열리므로 용역직원은 신고서 제출하지 않음) +
13일~17일: 24시간 x 5일 (매일 용역직원 1명씩 빠져나감. 총 5명) +
18일~19일: 24시간 x 2일 (신고가 접수돼도 집회 날짜가 주말이 됨) +
20일: 24시간 (9월 20일 월요일 집회신고 접수!) = 20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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