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동 문제'의 정치적 중요성
90년대 중반 이후 제기된 탈(脫)산업사회론과 지식기반사회론 등에 크게 동의하는 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핵심 갈등'을 꼽으라면, 그것은 여전히 '노동 문제'임이 명백하다. 이러한 노동문제는 비정규직의 확산, 심각한 임금격차, 구조적 고용불안, 소득불안 등의 형태로 서민들 다수의 삶을 옥죄는 핵심적인 의제가 되고 있다.
다만 노동문제에 있어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있다면, 80년대 이후에는 그것이 파업, 민주노조 건설 등으로 '조직화된' 양상을 보였다면, 지금은 노동조합운동의 구조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살율의 증대, 빈곤층의 확산 등 '비조직적'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문제'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해법은 여전히 정치집단과 사회운동 집단이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핵심적인 화두임에 분명하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노동 문제'의 대안일 수 있는가?
2010년 6.2지방선거는 한국정치 및 선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은 사건이었다. 그것은 무상급식이라는 정책을 매개로 사상 최초로 '선별적(=잔여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쟁이 대중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복지국가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2007년 7월 <복지국가혁명> 출간과 함께 창립된 이후 꾸준히 한국사회의 비전으로 '역동적 복지국가론'을 주창해온 바 있다. 그러나 역동적 복지국가론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아직 그리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나 보편적 복지국가를 구현하고 있는 스웨덴 등의 북유럽 국가에서는 노동운동이 자신들의 정치적 과제로 이를 제기하고 구현했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세력은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이 매우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에 관한 이해와 공감의 수준 역시도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
이에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소외의 구조적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고찰에 기반하여 역동적 복지국가는 한국사회의 노동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소외'의 구조적 본질 - 마르크스의 강제노동론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한 이후, '노동 문제'를 가장 심도 있게 분석한 사람은 단연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평생에 걸친 방대한 문헌을 통해 노동문제를 핵심적인 화두로 탐구했다.
토지에 평생 속박되어 있던 봉건제적 농노는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거주 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을 포함한 신분 해방과 법률적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 노동자는 특정한 작업장에 평생 속박되지 않아도 되는 '그만둘 자유'(=작업장 단위 강제노동의 금지)를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노동은 본질적으로 '강제노동'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이뤄지는 노동'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인은 물론 '자본가'다. 마르크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노동자는 일할 때 고통 받고, 일하지 않을 때 오히려 행복해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노동이 '타인을 위한 노동'(=소외된 노동)이라는 명백한 사회학적 증거인 셈이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은 '타인(=자본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동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강제노동이며, 봉건제적 농노가 평생 '토지'에 속박되어 있었다면 자본제적 노동자는 평생 '임금'에 속박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임금노예'라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의 서술구조는 상품 → 화폐 → 자본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상품 및 화폐와 구분되는 '자본' 개념의 핵심 특징은 바로 작업장 공간에서 '노동력의 구매'가 이뤄지는 시점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상품관계, 화폐관계와 구분되는 '자본관계'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정리하면, 마르크스에게 강제노동론=임금노예론=노동소외론=자본관계론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마르크스의 '재발견' - '생존수단'의 박탈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노동소외의 구조적 본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동시에 오늘날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노동문제의 해결'을 위한 이념적·전략적 비전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와도 직결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답은 국유화 등으로 특징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국유화와 중앙집중계획경제를 실시하던 소련식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당장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에 우리는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이 추구했던 것처럼, 민주주의적 방법과 다수 대중의 정치적 합의에 기반해서 자본주의적 노동소외의 구조적 본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법의 실마리를 '생존수단의 박탈'이라는 마르크스의 또 다른 핵심개념을 주목하는 것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요컨대, 봉건제적 농노가 자본제적 노동자로 전환된 '구조적 원인'을 우리가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면, 그 본질적 구조를 해체 및 이완시키는 사회정치적 운동은 그 자체로 속성상 노동소외의 극복과정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마르크스에게 있어 봉건제적 농노가 자본제적 노동자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충분조건이 동시에 필요했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리해보면, 그것은 '생산수단의 박탈'과 '생존수단의 박탈'이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 자신의 표현을 살펴보자. (*이하 인용은 <자본>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98년판이다. 강조는 모두 '인용자'가 했으며, '생존수단'이라는 표현은 때때로 '생활수단'이라는 표현과 혼용되는데, 번역 그대로 표기한다.)
"화폐와 상품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그러하듯이 결코 처음부터 자본인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자본으로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전환 자체는 일정한 사정 하에서만 가능한데 ..(중략)...한편에서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가치액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갈망하는 화폐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와,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자인 자유로운 노동자가 서로 대립하고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 1>, p.898 ~ p.899)
"그리하여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역사적 과정은 한편으로는 농노적 예속과 길드의 강제로부터 그들이 해방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우리의 부르조아 역사가들은 이 측면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새로 해방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또 종래의 봉건제도가 제공하던 일체의 <생존수단을 박탈당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 자신을 판매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수탈의 역사는 피와 불의 문자로써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될 것이다." (<자본 1>, p.899~p.900)
위에 인용된 마르크스의 주장은 몇 가지 이론적 함의를 갖고 있는데 첫째, 화폐와 상품은 '아직' 자본이 아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화폐 및 상품 ≠ 자본). 둘째, 임금노동자가 탄생하는 근본적 구조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의 박탈'과 함께 '생존수단의 박탈'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만일 어떤 사회가 생존수단 또는 생존수단 둘 중의 하나를 '사회화'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자본주의적 노동소외가 '절반 정도'는 해체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의 한 파트인 노동경제학에서는 자본이 노동을 길들이는 핵심 규율장치를 '실업규율'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경제학의 결론은 사실 위에서 인용한 맑스의 문제의식과 매우 유사하다. 노동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실업규율'이 노동자에게 규율로 작동하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노동자 자신과 가족에 대한 '생명에 대한 위협' 때문이다.
복잡하게 이론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강제노동을 수용하는 핵심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혹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 노동자는 속된 표현으로 '더럽고 아니꼬워도'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회사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보편적 복지국가'를 통해 돈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인간으로 살면서 꼭 필요한 '필수적 생존수단'(=필수재화)에 해당하는 것들, 예컨대 보육, 의료, 교육, 주택, 노후보장, 실업급여 등에 대한 높은 수준의 복지서비스가 제공된다면, 그 사회는 노동자의 삶에 질곡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적 강제구조가 '절반 이상은' 해소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대안인 이유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나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스웨덴 사민당의 경우, 일찍이 '노동소외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민주주의적 전략을 3단계로 정식화한 바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 → 사회적 민주주의 → 경제적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민주주의란 보통선거권 등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자와 서민의 정치권 권리를 제도화하는 것이며, 사회적 민주주의란 보편적 복지국가를 통해 노동자들 및 서민들의 '삶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경제적 민주주의란 작업장 단위에서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법인 자본주의 단계인 현대사회에서 생산수단(=주식)은 이미 수십,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형태로 '사회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현대적 의미에서 '의사결정의 민주화', 즉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기업지배구조를 만드는 문제와 같은 맥락을 갖게 된다.)
물론, 실제로 유럽 및 스웨덴의 역사에서 이러한 과정은 50년~100년 정도 걸리는 대단히 장기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단계별 전략'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압축사회'로 특징되는 한국의 경우조차도 '정치적 민주주의'만 놓고 보아도 5.16 군사쿠데타가 있었던 1961년부터 김대중-노무현의 집권과 2004년 총선을 통해 최초로 민주파가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것을 기준점으로 본다면, 약 4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스웨덴 노인들. 스웨덴의 높은 복지수준은 사민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진영이 긴 시야로 오랜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
유럽의 노동운동은 왜 '생존수단의 사회화'(=복지국가)를 먼저 이룩했을까?
우리는 위의 논의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재발견을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소외의 구조적 본질을 '생산수단의 박탈'과 '생존수단의 박탈'이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봤다. 그리고 그것을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관계로 정리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유럽의 사민주의 운동과 유럽의 노동운동은 '생산수단의 사회화'(=기업 내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먼저 이룩하지 않고, '생존수단의 사회화'(=사회적 민주주의)를 먼저 실현했을까?
그것은 생각해보면 자명하다. 노동계층의 압도적 다수와 서민대중의 압도적 다수에게 생산수단의 사회화(=기업 내 의사결정 민주화)라는 과제보다 '생존수단의 사회화'(=복지국가)가 훨씬 더 긴급할 뿐만 아니라 절박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좌편향으로 경도된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산수단의 사회화, 혹은 국유화를 주장해봤자 노동대중과 서민대중에게 그것은 공감도가 낮았다. 반면, 보육, 교육, 의료, 주거, 노후, 실업 문제 등에 대한 구조적 불안에 대해 노동자와 서민대중은 훨씬 더 긴급하고 절박했던 문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치 촛불시위 과정에서 대중의 집단지성이 소위 운동권을 제압했던 것처럼, 유럽의 노동계층과 서민대중의 '집단지성'은 자신들의 절박한 문제를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형태로 대중적 정치행위(=선거)를 통해 요구하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럽의 사례가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에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은 '역동적 복지국가 건설'을 최소한 약 10년~30년 정도의 시야를 갖고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비전으로 채택해야 한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국가'의 가치에 동의하는 모든 정치세력과 사회운동 세력을 광범위하게 묶어내면서, 복지동맹을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 결사체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진보대통합 정치세력).
그것은 유럽 민주주의 100년의 역사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주는 실천적 교훈임과 동시에 양극화와 각종 사회적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대중과 서민대중에게 진보적 정치집단 및 사회운동 집단이 취해야 할 역사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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