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FTA 묻어버린 '스포츠 민족주의' 광풍
한미 양국이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에 서명한 게 6월 30일이다. 이번 협정문은 4월 체결된 협정문에는 없었던 내용이 새로이 추가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비교표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대통령은 나 몰라라 과테말라로 갔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FTA 협정문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온 나라가 들썩거려야 했을 텐데 전국금속노동조합의 파업을 뺀다면 한미 FTA를 둘러싼 논란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있다.
만약 과테말라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의가 평창 유치를 결정했다면 FTA를 둘러싼 논란은 언론에서 더 큰 홀대를 받을 운명이었다. 스포츠 민족주의(sports nationalism)가 온 방송과 신문을 도배했을 게 뻔하다. 나라 경제와 국민 생활에 미칠 영향을 두고 보자면 평창 동계올림픽은 FTA의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 서민의 입장에서 동계올림픽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FTA는 다르다. 잘못되면 다수의 국민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유치 실패로 눈물을 글썽이는 날이야 오늘 하루면 족하지만, FTA가 잘못 도입되면 죽는 날까지 눈물을 글썽여야 할지 모른다. 스포츠 민족주의의 광풍이 FTA를 둘러싼 찬반논란을 뒤덮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였다는 점에서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는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득이면 득이지 손해는 아니다.
월드컵 상암경기장에서 들리는 여성 비정규직의 절규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가 잘 된 두 번째 이유는 7월 1일부터 시행되는 비정규직 관련 노동법(정확하게는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때문이다. 전체 노동자의 60%에 가까운 800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집집마다 비정규직 없는 가정을 찾기 어렵게 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의 도입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태와 입법효과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생략된 채 7월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비정규직법으로 인해 노동 현장이 아수라장이다.
세계인으로부터 동계올림픽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는 2002 월드컵이 열렸던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여성 비정규직 수백 명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대부분 중년의 여성들로 이랜드가 소유한 홈에버에서 일해 온 이들은 △비정규직 대량해고 중단 △강제용역 전환(외주화, 아웃소싱) 즉각 중단, △부당 해고된 노조원 복직을 요구하면서 6월 30일부터 매장을 점거했다.
올 들어 사측은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21개월을 근무한 여성 비정규직 2명을 포함해 전국 홈에버에서 일하는 주차, 보안, 카트, 시설, 청소미화 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 500여 명 이상을 전격 해고했다. 홈에버는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9개월, 12개월 단위로 계약하던 것을 최근 3개월, 6개월 단위로 계약기간을 줄여 고용해왔다.
게다가 노동 강도는 더욱 심해져 4시간 근무하게 돼 있는 계산원들이 5~6시간까지 노동을 강요당하고, 휴식시간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추가노동에 대한 임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받았던 임금은 한 달에 80~100만 원에 불과했다. 5년 이상 근무한 정규직 연봉도 1500만 원이 안 되고, 비정규직 연봉은 1000만 원 안팎이었다.
이들이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의 대형매장을 점거한 지 일주일이 다되어 가지만, 이들의 처절한 소식을 제대로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은 드물다. 동계올림픽 유치에 들이는 관심의 십분의 일이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현실은 냉혹하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뜬눈으로 7월 4일 밤을 지새웠다. 물론 마음 속에서 소원하는 바는 달랐을 것이다.
"이 나이 되면 혼자되는 사람이 참 많아요. 동료들 가운데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거나 해서 여성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80만 원이 그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생계비인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요?"
80만 원이 유일한 생계비인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7월 5일 대한민국의 새벽이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으로 환희로 들떴었다면 같이 환호했을까, 아니면 '3류 국민'으로서의 소외감에 치를 떨었을까.
언론은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로 눈물을 흘리는 어린이들의 사진을 '대서특필'하지만, 이 아이들은 5일 새벽에 흘린 눈물을 아쉽지만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7월 1일 비정규직법의 준비되지 않은 시행으로 삶 자체가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피눈물이 되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 분명하다.
스포츠 민족주의의 광풍이 비정규직법 시행을 둘러싼 논란을 뒤덮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였다는 점에서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는 노동력의 다수를 구성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득이면 득이지 손해는 아니다.
IOC 위원 2명 모두 재벌 회장인 이상한 나라
세 번째로 잘 된 이유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세금을 떼먹거나 회사 돈을 훔친 자들이 동계올림픽 유치를 면죄부처럼 선전했을 터인데, 그럴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IOC 위원 111명 가운데 40명이 올림픽 출전 경험을 가진 운동선수 출신이다. 특히 2명 이상의 IOC 위원을 두고 있는 나라의 경우 IOC 위원 전원이 올림픽에 참가한 운동선수 출신이거나,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명 이상은 올림픽에 참가한 운동선수 출신인 경우가 많다. 전자로는 핀란드, 캐나다, 일본 등이 대표적이고, 후자로는 호주,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이 있다.
2명 이상 복수의 IOC 위원을 둔 나라들 가운데 올림픽 참가 경험을 가진 운동선수 출신이 아닌 위원만을 둔 나라는 중국(2명)과 한국(2명) 말고는 없다. 중국의 경우 두 명 모두 국가관료 출신이며, 한국의 경우 두 명 모두 재벌 회장 출신이다. 이건희 씨는 1996년 IOC위원이 되었고, 박용성 씨는 2002년 IOC위원이 되었다.
1996년 IOC 위원이 된 북한의 장웅 위원처럼 올림픽 참가 경험은 없지만 운동선수 출신인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한국처럼 특정 국가의 IOC위원이 재벌회장 출신인 경우는 대단히 예외적인 사례이다.
작년과 올해 이건희 씨와 박용성 씨의 범죄행위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었다. 경제 범죄와 관련해서는 '유전무죄·무전유죄' 원칙을 갖고 있는 국가권력의 비호 속에 이건희 씨는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됐고, 박용성 씨는 유죄가 인정됐지만 (집행유예 덕에) 감옥살이를 피하면서 지난 3월 1일 '국민경제 기여'와 '평창 올림픽 유치 활동 지원'을 이유로 청와대로부터 사면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
생존권과 국민경제를 지키려는 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에 대해서는 '법대로'를 외치던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 경제와 회사 경영을 위험에 빠뜨린 재벌 회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사면 복권으로 화답하더니, 마침내 과테말라 IOC 회의에 이건희 회장과 박용성 회장과 한데 모여 친분을 과시했다.
만약 동계올림픽 유치가 성공했다면 서민을 위한 정권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대통령과, 국민 경제를 어지럽히는 중죄를 범했으면서도 막대한 부 덕택에 감방행을 면한 재벌 회장들이 쏟아낼 자화자찬과 이들에 대한 관료 집단과 보수 언론의 아부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텐데,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부동산 투기꾼을 양성해온 국가주도 건설사업의 폐해
유치 실패가 잘 된 마지막 이유는 평창과 인근 지역에 들이닥친 "묻지마 땅투기" 열풍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점에서다. 노무현 정권 4년은 "투기꾼들의 천국"이었다. 건설자본 및 지역토호들과 결탁한 건교부, 재경부, 한국토지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주택공사 같은 '국영 투기꾼들'이 온 나라를 투기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마지막 열풍 중 하나가 동계올림픽을 빌미로 강원도 지역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유치 실패 덕택에 부동산 투기가 당분간 가라앉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인류의 화합 축제'를 이유로 마구 파헤쳐지던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하가 파괴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국제회의에서 만난 싱가포르 노조간부가 강원도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자신을 비롯한 많은 싱가포르인들이 관광차 강원도를 자주 가는데 잘 보존된 산과 계곡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단풍 시즌의 설악산은 싱가포르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해외 관광 코스라고 했다. 그런데, 요사이 강원도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리조트'니 '월드'니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들어서는 위락시설 때문이란다.
<머니투데이> 인터넷판 7월 5일자는 동계올림픽 유치의 배후에 숨어 있던 부동산투기꾼들의 실망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에둘러 썼다.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시중자금들은 평창 일대 토지를 집중 공략했다. 첫 번째 실패를 맛봤던 지난 2003년에는 매월 토지거래 건수가 20%씩 늘어나는 등 단기차익을 노린 투기적 행태가 집중됐다. 동계올림픽 선수촌 예정 부지였던 도암면 용산리와 횡계리 일대 준농림지 가격은 불과 3~4개월 새 3배 이상 치솟기도 했다. 전형적인 묻지마 투자였던 것이다. 이번에도 전체적인 맥락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2003년 당시보다는 한결 차분한 분위기를 보여 왔다. 하지만,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됐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결과적으로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는 실패했고 토지를 중심으로 한 부동산시장에는 그에 따른 '학습효과'만 남았다."
'인권 원칙'과 '페어플레이 정신'은 어디에?
올림픽 헌장에는 "올림픽 정신은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윤리 원칙들에 대한 모범과 존중이라는 교육적 가치에 토대를 둔 삶의 방식을 창조하려 노력한다. 스포츠의 실천은 인권이다. 모든 사람은 아무런 차별 없이 올림픽 정신에 따라 운동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올림픽 정신은 우정, 연대, 그리고 공정한 경기(fair play)의 정신과 함께 상호 이해를 요구한다"고 나와 있다.
FTA로 국민 다수의 생존권이 위험하고, 준비되지 않은 비정규법으로 비정규노동자들의 삶이 불안정해지고, 부자는 불법행위를 자행해도 감옥에 가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온 국토가 부동산투기의 열풍으로 파헤쳐지고 있는 이때, 동계올림픽 유치는 국민의 비판정신을 타락시키는 마약이 되었을 게 뻔하다.
IOC는 쿠베르탱을 비롯한 올림픽 운동의 선구자들이 주창해 오늘의 올림픽 헌장에 반영된 윤리, 인권의 원칙과 페어플레이 정신은 운동경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방식에서 실천하고 적용해야 하는 푯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서민들의 삶에서 인권의 원칙이 지켜지기는커녕 먹고사는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유전무죄·무전유죄' 풍조의 범람으로 페어플레이 정신이 모욕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갖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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