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높은 벼슬에 오를만한 훌륭한 인생을 살았노라고 늘어놓을 전력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신헌법 기초자(起草者)니, 공안몰이의 전문가니, 정치술수의 달인이니 하는, 교육적으로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고약한 그의 '상표'를 일일이 말해줄 수도 없었거니와, 그보다도 부산 초원복국 집에서의 '지역감정 조장' 이야기는 더더군다나 까발릴 수도 없었다. 이 나라 현대사에서 지역감정 조장이야말로 비록 육법전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용서할 수 없는 범죄요, 죄악 중의 으뜸 죄악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그를 비서실장에 임명해 놓고는 앞으로 비서실은 국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 씨에게 한껏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김 씨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꼭대기 벼슬자리에 올라앉았다. 김 씨의 비서실장 임명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는 대통령의 역사 거꾸로 돌리기요, 또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서는 지은 죄가 있거나,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지탄(指彈)을 받아야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실제로 김기춘 씨를 필두로 그런 식의 '벼슬인사'가 이 정권 아래서 꼬리를 물고 있다. 서청원 씨도 그러했고 홍사덕 씨도 그러했고 김석기 씨도 그러했다. 심지어 새누리당 실버세대 위원회 부위원장처럼 별로 커 보이지 않는 벼슬자리에도, 지역감정 폭언을 일삼다 지탄의 대상이 되어 당에서 축출까지 되었던 사람을, 복당시켜 임명하였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런 인사는 공천하지 않겠다거나, 신뢰를 철석같이 강조하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이미 다 물 건너갔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서청원 씨의 죄, 그거 가볍지 않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내 돈 아깝지 않은 사람 없다. 서 씨는 "개인적인 착복이나 횡령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기업의 채권과 만 원짜리 돈다발을 차곡차곡 트럭에 쌓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를 통째로 넘겨받는 방식으로 '강탈'해다 대선 치른 질 나쁜 범죄였다. 뚜렷한 사회활동이나 정치경력도 없는 사람을 국회의원 비례대표 1번으로 앉히는 대가로 떼 돈 받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서 씨의 아들은 채용공고와 시험도 거치지 않고 국무총리실에 4급으로 특채되었다. 총리실은 인사발령 공고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특채사실을 숨겼다. 그 아들을 총리실에 '추천'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서청원 씨였다고 했다. 특권 상류층의 진동하는 구린내가 하늘을 찌르는 모양새다. 이 나라에서는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어야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그 서청원 씨가 청와대의 찍어 누르기로 연고도 없는 지역 보궐선거 공천을 받았다.
서 씨는 새누리당의 공천장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거물이다. 그러면서도 "야당의 입장에서 야당을 배려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그게 될지는 의문이다.
▲ 왼쪽부터 서청원, 김기춘, 김석기 씨. ⓒ연합 |
손 벌려 남의 돈 뜯어낸 홍사덕 박근혜 대통령 후보 공동선대위원장도 서 씨와 별반 다르지 않은 케이스였다. 홍 씨도 처음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고, 박근혜 후보도 "조속히 진실이 밝혀졌으면 한다"했다. 그러나 진실은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거머쥔 것으로 금방 드러나 그는 유죄선고를 받았다. 홍 씨는 공판에서 "깊이 반성 한다"며 앞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홍 씨에게 '징역형 아닌' 벌금형을 구형했다.
저 유명한 용산 참사의 '표지인물'로 김석기 씨를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시민의 안전은 전혀 고려치 않고 특공대까지 투입하는 우격다짐 강경 진압으로 6명이나 되는 소중한 목숨을 빼앗고 2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게 용산 참사였다. 그 지휘자가 김석기 씨였다. 그런 그가, 공항업무와 전혀 연관성도 없는 그가, 공항공사 사장 내부 심사에서 꼴찌점수를 받기까지 했다는 그가, 상식과 예상을 깨고 사장에 임명된 게 이번 사태다.
김 씨는 "용산에서의 경찰 진압은 적법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진압은 누가 뭐래도 불법이다. 사람을 살리는 진압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왜 이런 사람을 무리수를 두어가며 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했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하필이면 죄를 지었거나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만을 '골라서' 벼슬자리에 앉히는 인사에 대해 절망감을 표시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그레샴 법칙'의 세상을 대통령이 신봉하는 건 아닌가 하고 우려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동안 대통령이 신세졌거나 은혜 입은 것 갚아야 할 일 있다 보니 그리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기능적 측면을 고려했을 것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의 흉중(胸中)을 헤아릴 길은 없으나 그들 이야기에는 놓치고 있는 대목이 있다. 필자 보기에 대통령의 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공감대가 확보돼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국민적 평판이 그래서 중요하다. 물론 사람 됨됨이도 살펴야한다.
아울러 사람들이 인사를 접하면서, 느끼고 배워갈 수 있는 사회 교육적 측면이 고려돼야 한다고 본다. 올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살면서, 땀 흘려 노력하는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이번 일련의 인사를 놓고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는 어림하기 어렵지 않다.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사회교육 문제가 바야흐로 대통령의 비교육적 인사 행태까지 겹치면서 큰 상처를 입는 느낌을 주고 있다.
설화(說話)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오랜 옛날, 사람이 70세가 되면 산중에 내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노인이 칠순이 되자, 아들이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음식과 함께 아버지를 버리고 막 돌아서는 순간, 함께 따라갔던 노인의 손자가 버리고 가려던 지게 멜빵을 움켜잡았다. "왜 그러느냐"고 아버지가 물었다. 손자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늙으면 나도 이 지게에 지고 와 버리려 한다"고 했다. 아들은 깨닫는 바가 있어 도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와 효도를 다 했다고 전해진다.
서슴없이 지게 멜빵 움켜쥐듯이, 아이들은 빨리 배운다. 요즘 아이들, 비뚤어진 생각을 하면서 바르지 않게 살아도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까짓 땀 흘리지 않고 다소 나쁜 짓 하며 살아도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과만 괜찮으면 과정쯤이야 중요치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최근의 대통령 인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TV들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대통령보다 한술 더 뜨고 있다. 특히 종편은 서로 같은 대(帶)의 주파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사회 풍토조성에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고 있는 느낌까지 준다.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으로 기소까지 되었던 전직 국회의원이 불과 1년 사이에 각종 종편 프로그램의 MC자리를 차지하며 '스타'가 되었다. 본인은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다 할지 몰라도 아이들은 뭔가 다른 측면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저렇게 돈 벌고 '출세'나 하면 됐지 다른 건 따질 필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필경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스캔들로 파문을 일으킨 신정아 씨의 종편 MC 미수사건에서도 우리의 아이들은 무언가 배웠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떤 분이 생전에 방송의 핵심 기능으로 Edutainment를 강조한 적이 있다. Education과 Entertainment의 합성어다. 방송이 사회교육 기능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 종편을 포함한 방송들에게 교육기능은 중요치 않다. 그저 돈벌이가 될 수 있는 기능만 눈에 띄면 몇 푼주고 사다가 수익증대에 활용하면 그뿐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사회교육 기능은 물론 언론 본연의 임무를 팽개친 지 오래다. '이른바 언론'이 되어있을 뿐이다.
특히 종편들은 제작비가 싼 '시사분석 토크쇼'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때우며 객관적으로 검증되지도 않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른바 정치 평론가'들과 '이른바 해설가'에 '이른바 원로'까지 출현시켜 특정 정당 편들기 방송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비교육적인 사실상의 막장 편파방송이다. 윤창중 씨처럼 '간택' 받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른바 해설가'들과 '이른바 정치평론가'들의 애처로운 모습도 보기에 안타깝다.
문제는 정글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저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은 물론 전후좌우 모두가 '배워서는 안 될 것들'을 주입시키려고 팔을 걷어붙인 채 덤비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아이들이 주인이 되는 내일, 이 나라의 건강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가슴이 막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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