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와 시민단체는 식민지근대화론 등 '뉴라이트' 학자들의 역사관이 교학사 교과서에 그대로 담겼다고 평가한다. 학계에서나 일반 대중들에게서나 외면받던 뉴라이트 학자들이 정치권의 힘을 받아 교육계로 진출했다는 것. 교학사 교과서가 다른 7종의 교과서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이 많다는 지적은 수긍할만하다.
독립운동을 설명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을 40번이나 언급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서술하며 '발전' 등의 긍정적인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부분에서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등, 교학사 교과서는 기존 상식에 비춰봤을 때 당혹스러운 역사관과 서술방식을 보인다.
그러나 이미 교학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심의를 통과해 공교육 체계에 편입할 자격을 갖췄다. 이대로 괜찮을까. 4개 역사단체(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는 교학사 교과서 전문을 종합적으로 검증해 봤다. 그 결과 A4 200장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사실 왜곡·오류 등이 발견됐다. 일부는 연도, 날짜를 비롯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 틀린 내용이 서술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그중 명백하거나 노골적인 오류, 왜곡이 의심되는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정대협과 전교조 등 464개 단체가 참여한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 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이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친일, 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판 '후소샤(扶桑社) 교과서'"라며 검정 합격을 즉각 취소할 것을 교육부에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
친일파 미화
①"1920년대 일제 강점기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명서네와 경선네라는 두 농가의 몰락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유치진은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극예술 연구회가 해산된 후, 1941년에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극단 '현대 극장'을 조직하였다."(268쪽)
☞극작가 유치진은 2005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을 발표할 당시 이름을 올렸다. 결국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친일반민족행위조사보서를 보면, 유치진은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다. 그는 극단 현대극장을 창립해 일제 만주침략을 정당하거나(<흑룡강>), 일진회를 미화하는 극본(<북진대>)을 집필했다. 연극의 전시체제 협력을 역설하고 일제 만주침략을 정당화하는 기행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②"일제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굴종과 전쟁에 대한 협력을 요구하였고, 강요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이에 따랐다."(288쪽)
☞친일을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옹호하고 있다. 이는 친일파가 가장 자주 내놓는 변명거리기도 하다. 역사학계에서는 친일파로 규정된 인물들이 어느 정도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③"최남선은 공과 과가 모두 있는데, 공과 과를 함께 논한다면 어느 쪽이 클까? 주요 공적에 대해서 현재 우리나라의 '상훈법'에 비추어 포상을 한다면 어떤 상을 수여하면 적절할까? 또한, 친일 활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벌을 내리는 것이 적절할 것인지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자."(297쪽. 수행평가)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문을 쓰는 등 친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훗날 친일파로 변했다. 어떤 상을 줄 것인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친일파를 '상 받을만한 인물'로 포장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미화
①"(1930년대 명동 거리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도시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명동 거리의 생활 모습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278쪽. 주제열기)
☞일제의 잔혹함이 극에 달한 1930년대 명동의 모습이 현재와 별다르지 않다고 서술하고 있다. 1930년대에 이미 한국의 도시가 크게 발전했다는 주장으로, 식민지근대화론과 일맥상통한다. 학생들에게 "당시 우리나라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라고 물으며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는 점이 눈에 띈다.
②"이야기한국사 : 전북 김제에서 지주제의 발달"(279쪽)
☞일본 지주제를 '발달'로 묘사하고 있다.
③"총독부가 종전의 소작 제도 개선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1932년부터 소작농 1가구당 5단보의 농지를 구입하도록 저리의 정책 자금을 대출하여 자작농을 육성하기 위한 사업이었다."(279쪽)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자작농을 육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다.
④"인구증가, 식민도시의 발달, 신분제의 해체와 변화, 복식의 변화"(280쪽)
☞'식민 도시의 발달'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17줄의 문장 중에 성장, 발전, 증가라는 표현이 6회나 나온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⑤"일제의 통치로 인구가 증가"(280쪽)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은 뉴라이트 학자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요 근거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통계 오류라고 일축한다. 서울대학교 황상익 교수는 <프레시안>에 게재한 기고문을 통해 이 점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가 전염병 환자 수를 파악하면서 일본인 환자가 조선인 환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분석한 이유는, "조선인 환자가 실제로 적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관련기사 : 일제 강점기 조선인 생활수준의 진실은? ) 같은 맥락에서 1910년의 남녀 비율에서 남자가 훨씬 많은 것은, 여성들이 통계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⑥"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1930년대 이후 만주로의 농업 이민과 일본으로의 노동 이민이 급격히 증가한 것도 한국 농촌 사회의 인구 과잉과 열악해지는 농촌 경제가 한 원이이었다."(280쪽)
☞1930년대 도시나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일제의 수탈로 인해 더는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는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⑦"자본주의의 진전은 더욱 정확한 시간관념을 요구하였다.(…)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지속될수록 근대적 시간관념은 한국인에게 점차 수용되어 갔다."(282쪽)
☞'근대적 시간관념'이란 모호한 개념으로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고 있다.
⑧"이에 일제는 곤궁해진 농민을 무마하기 위해 자작농 육성을 목표로 하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270쪽)
☞농촌진흥운동은 춘궁퇴치, 부채 근절 등을 목표로 한 운동으로, 자작농 육성과는 관계가 없다.
⑨일제 강점기 모습 사진
☞일제 강점기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일본 자본과 기술에 의해 세워진 건물, 시설을 주로 실었다. '1930년대 명동 거리'·'충남질소비료공장'(278쪽), '일본 오사카 재벌 아베의 동진농업주식회사가 만들어 간척사업을 벌이는 모습'·'1925년 동진수리조합 상황도'(279쪽), '경성남촌'(280쪽), '수풍 수력발전소의 발전용 튜브 시공'(283쪽), '경성방송국'(284쪽), '조선식산은행'·'미츠코시백화점'(285쪽) 등의 사진을 수록했다.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조차 갖추지 못한 단순 오류
①"박헌영 사진" 설명(261쪽)
☞ '1948년 9월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라고 서술된 부분이 틀렸다.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이 바르다.
②"레닌의 피압박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지원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러시아 공산당이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서유럽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러시아 공산당이 아니라 코민테른이 지도했다.
③"혁명적 노동 조합 및 농민 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적 노동·농민 조합을 조직하여"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실수다. 한 문단 안에서 같은 조합을 서술하면서 '노동 조합 및 농민 조합'과 '노동·농민 조합'이라는 다른 표기법을 썼다.
④"이윤재와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조선어연구회(1921)"(266쪽)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될 때 이윤재, 최현배는 회원이 아니었다. 당시 이윤재는 베이징에 있었고 최현배는 직후 교토로 유학을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어연구회 창립 회원 명단에 두 사람은 들어 있지 않다.
⑤"1920년대 일본군은 북간도의 한인 촌락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여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가옥, 교회, 학교 등을 불태우는 간도 참변을 저질렀다."(271쪽)
☞간도 참변은 '1920년대'가 아니라 1920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⑥"1919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23년 관동 대지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참사를 당하였다. 당시 도쿄,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의 하천 부지 등에 한국인 집단 거주지가 생겼다."(271쪽)
☞2·8 독립운동이라는 말은 없으므로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고 해야 한다.
⑦"1941년 여름에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 가능성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를 출간하였고, 그해 실제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276쪽)
☞277쪽에서는 이 책의 발간연도가 1941년 초로 되어 있어 학생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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