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특별법 제정해 유신 과거사 진상 규명하자"
민주당 장준하선생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와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구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은 1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준하 선생을 살해했던 범인과 그 배후를 밝혀내야 한다"며 "장준하 선생 의문사 등의 사건을 정부가 철저히 재조사하고 진실을 밝히도록 하는 '(가칭) 장준하 선생 등 과거 사건 진실 규명과 정의를 위한 특별법(이하 장준하특별법) 입법을 추진코자 한다"고 밝혔다. 진상조사위원회와 시민행동은 "이제 우리 역사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누르고 있던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의 껍데기를 벗겨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 장준하 선생이 수감됐던 감옥을 둘러보고 나온 유가족. 장남 장호권 씨(가운데), 그 왼쪽이 고인의 부인 김희숙 여사. ⓒ프레시안(최형락) |
이들은 이어 "이 법은 비단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사건을 재조사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지난 의문사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히지 못한 수많은 미해결 의문사 사건들, 독재 정권의 국가 폭력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과 옥살이를 당한 분들의 진실도 밝혀낼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 특별법은 우리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세우는 것 이외의 정치적 목적을 철저히 배제하며 모든 정당과 국회의원, 시민들의 동참과 협력을 바탕으로 추진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의원과 시민들이 당적과 정견을 초월하여 이 법의 입법 과정에 동참해주시길 요청 드린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8월 장준하 선생의 묘소 이장 과정에서 장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7년 만에 두개골 함몰 사실이 드러났다.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 5선의 새누리당 정의화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선생의 두개골 사진이 나에게 외치는 것 같다. 타살이라고!"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와 시민행동은 개묘를 통해 확보한 장 선생 유골을 정밀 감식키로 결정한다. 결론은 지난 3월 28일 국민보고대회에서 발표됐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장 선생이 "머리 가격을 당해 사망한 후에 추락"했다고 결론을 내리며 장 선생 죽음을 타살로 규정했다. 장 선생의 머리뼈 골절과 관련해 당시 정밀 감식을 주도한 법의학자 서울대 이정빈 명예교수는 "망치보다는 아령이나 돌과 같은 물체로 가격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 장준하 타살 결론 "머리 맞아 사망한 후 추락")
진상조사위원회와 시민행동은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둔기에 의한 충격으로 함몰된 채 땅속에 누워 계셨던 것처럼 우리 역사의 진실, 우리 사회의 정의 역시 함몰되고 매장됐던 것"이라며 장준하특별법 제정을 거듭 촉구했다.
▲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인 1975년 2월 21일, 민주 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할 것을 촉구하는 장준하. 그 오른쪽은 함석헌. ⓒ연합뉴스 |
'박정희 라이벌' 장준하 의문사, 박정희와는 무관할까?
'박정희의 라이벌'로 꼽히는 장준하 선생은 1974년 긴급 조치 위반 혐의로 15년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건강상 이유로 출소한 후 이듬해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장 선생의 주검이 발견되기 전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씨는 지난 2010년 <프레시안> 인터뷰(관련 기사 : "박근혜, 용서는 하겠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올 게 왔구나', '차라리 감옥소에서 돌아가시지. 기왕 이렇게 된 것' 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집에 돌멩이가 날아오고 그랬다. 유리창이 깨지고…. 왜 그랬는지 안다. 한 달 전쯤인 7월 말에 YS, DJ, 함석헌, 유진오 선생과 함께 5자 회담을 해서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장 선생이 총대를 메라'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광복절을 맞이해 본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무산이 됐다. (장준하가 모종의 모임을 기획한다는) 그런 말이 새 나간 것이다. 그 직후 청와대에 있었던, 장 선생님을 따르던 작은아버지 친구 분이 '몸조심하시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장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산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장 선생은 산행에 나섰고, 장 선생의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러운 부고를 받게 된다. 정치적 배경이 의심되는 부분이다. 아직까지 장 선생 죽음의 배경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장 선생의 죽음을 사고사로 규정했다. 그러나 유신 체제가 무너지고 1980년대를 관통한 군부 독재가 종언을 고한 후 장 선생의 죽음에 대한 조사는 본격화 된다. 1993년 민주당이 꾸린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장 선생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혹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고, 2003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조사위원회는 추가 조사를 통해 '사고사'를 '의문사'(진상 규명 불능)로 대체했다.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퍼즐 맞추기'와 같은 조사위원회 조사에서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기는 어려웠다. 그 한계를 극복한 조사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진행된 유골 정밀 감식이었다. 감식 결과를 토대로 장 선생 유족 등은 의문사가 아니라 타살이 명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공은 박근혜 정부로 넘어갔다.
새누리당은 장준하 타살 의혹 진상 규명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한구 전 원내대표는 지난해 10월 5일 "대선 뒤에 고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진상 조사를 하자"고 민주통합당에 역제안을 했다. 여당 원내대표의 '공약'인 셈이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장 선생은 '정적(政敵)'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독재자였다면 장 선생은 반독재 운동가였다. 이 같은 인연 때문에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장 선생의 '타살' 여부는 박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대통령에게 잠재적 아킬레스건이 될 수밖에 없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 고 장준하 선생의 장자, 장호권 씨. 장 선생 생전에 비서를 지내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장 선생 관련 문제에 관해 유독 소극적이었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을 앞두고 급하게 장 선생의 유족인 부인 김희숙 여사를 찾아가 "장준하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신 후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생각"했다며 "진심으로 위로를 드린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는 '위로'일 뿐이었다. 이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은 장 선생 타살 주장에 대해 "그거는 뭐 진상조사위에서 현장 목격자 등을 통해 조사가 쭉 이뤄지지 않았느냐. 그런 기록들이 있는 것을 봤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역시 여당의 후보로 나섰던 만큼 이한구 전 원내대표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여당 원내대표의 '공약'을 새누리당과 박 대통령이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말이다.
장호권 씨는 "이제 과학적·의학적으로 검시가 끝났고, 타살이라는, (누군가) 죽였다는, 살인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이제 남은 것은 비록 (사건이) 박정희와 연결돼 있긴 하지만, (그의 딸인) 박근혜가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 선생과 박 전 대통령의 '악연'을 풀 열쇠는 박근혜 대통령이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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