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한 일 중 하나가 퇴직금 지급 기준을 퇴행시킨 것이다. 막무가내로 국민적 동의 없이 밀어붙이는 데 익숙해서일까. 노동자의 동의 없이 퇴직금을 적게 지급하려는 신군부의 결정은 법적으로 사용자와 노동자 간에 수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이후 노동자들은 개악된 퇴직금 규정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 노동자들의 퇴직금 소송을 맡았던 김선수 변호사는 "대법원에만 세 번 가고, 10년 3개월을 끌었던" 복잡한 소송을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방문길에 GM의 '애로 사항'을 '화끈하게' 해결해주겠다며 약속한 통상임금 문제의 뿌리와도 일정 부분 맞닿은 사건이기도 하다. <편집자>
소송의 보고(寶庫), 취업규칙과 퇴직금
취업규칙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작성하는데도 노동현장에서 법규범으로 인정된다. 그 법적 성질에 무수한 이론이 있으나, 어쨌든 근로기준법이 근로계약보다 취업규칙의 우월한 효력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작성과 변경에 일정한 절차적 제한을 가하고 있다. 1989년 3월 29일 개정되기 전의 근로기준법에는 취업규칙을 작성 또는 변경할 때 근로자 과반수 노동조합 또는 대표자의 의견을 듣도록 규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해석론을 통해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는 근로기준법의 근로자 보호법 정신, 기득권 보호의 원칙, 근로조건 대등 결정의 원칙 등을 근거로 종전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고 있던 근로자들의 집단적 의사결정 방법에 따른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견해를 취했다(대법원 1977. 7. 26. 선고 77다355 판결). 이 대법원 판결은 입법의 흠결을 해석론으로 보충한 훌륭한 예로 소개되며, 1989년 근로기준법 개정 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근로기준법은 계속근로연수 1년에 대하여 30일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지급하는 퇴직금 제도를 설정하도록 규정했다(2005년 12월 1일부터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이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업장은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 또는 별도의 퇴직금 규정으로 퇴직금 제도를 설정했고, 아무런 규정도 두지 않은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의 기준이 적용되었다. 퇴직금은 근속기간에 대한 지급률과 기초임금을 곱하여 산정된다. 지급률은 근속연수 1년당 30일(1개월)인 단수제와 근속기간이 늘어갈수록 누진되는 누진제가 있다. 기초임금은 가장 넓은 개념인 근로기준법상의 평균임금을 그대로 사용하는 사업장도 있고, 별도의 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항목의 임금만을 사용하는 사업장도 있다.
지급율과 기초임금 중에 어느 하나가 근로기준법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그 효력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근로기준법은 최저기준이고 근로기준법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을 정한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 또는 근로계약은 무효로 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 기준이 적용된다.
퇴직금 계산에 대해 대법원은 지급율과 기초임금을 개별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요소에 의해 계산된 퇴직금의 액수와 근로기준법 기준에 따라 '통상임금×단수제' 지급율로 계산된 액수를 비교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많으면 전자가 전체적으로 유효하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평균임금 중 일부 항목의 임금을 제외하고 기초임금을 정했다고 하더라도 누진제 적용으로 산정된 퇴직금액이 많으면 유효하다는 것이다. 누진제를 적용하는 사업장에서 짧은 근속연수에 퇴직하는 직원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에 의한 퇴직금이, 일정 연수 이상 근무하다가 퇴직하는 직원에 대해서는 누진제 퇴직금 규정이 적용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 절차와 복잡한 퇴직금 제도로 말미암아 퇴직금규정의 불이익변경 및 퇴직금의 산정 방법과 관련하여 무수한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만도 4개 정도가 있을 정도로 법리도 복잡하고 입장도 다양하게 갈린다. 사용자가 퇴직금 지급 의무를 면탈하기 위하여 연봉을 13분의 1로 나누어 매년 퇴직금을 정산하는 형태의 편법적인 연봉제를 도입하여 그 효력이 문제되고 있기도 하다. 가히 소송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하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
신군부 세력의 지시에 의한 퇴직금 규정의 일방적 불이익 변경
1980년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정부투자기관들에 대해 일반공무원이나 사기업체보다 높은 누진제로 되어 있는 퇴직금 지급 수준을 일반공무원 수준으로 하향 조정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투자기관들이 퇴직금 규정을 개정하여 지급률을 하향조정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대법원 판례가 요구하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퇴직금 규정의 불이익한 변경이 무효이므로 개정 전 규정에 의한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이 여러 사업장에서 봇물처럼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포항제철주식회사(포스코의 전 상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까지의 퇴직금규정('종전 퇴직금규정')은 퇴직금 산정을 근속기간에 대한 소정 지급율에 퇴직 당시의 '평균임금'을 곱하여 산출하는 방식에 의하도록 하면서 근속기간에 대한 지급율을, 30일을 1개월로 계산하여, 근속년수 2년까지는 매 1년마다 1개월분, 근속년수 2년 이상 5년까지는 매 1년마다 2개월분, 근속년수 5년 이상 9년까지는 매 1년마다 3개월분, 근속년수 9년 이상 15년까지는 매 1년마다 4개월분씩 누진하도록 하고(15년의 이상의 기간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음), 1973년 7월 31일까지의 근속기간이 1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지급율을 추가로 가산하도록 규정했다.
신군부의 지시에 의해 1981년 1월 1일자로 개정한 퇴직금 규정('개정 퇴직금 규정')은 퇴직금 산정의 기초임금을 퇴직 당시의 '기준임금'으로 변경하고(기준임금의 범위에 관하여 1981년 2월 28일 및 12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다시 개정됨), 근속기간에 대한 지급율의 누진비율을 근속년수 1년부터 2년까지는 매 1년 마다 30일, 2년 이상 3년까지는 45일, 3년 이상 5년까지는 60일, 5년 이상 10년까지는 48일, 10년 이상 15년까지는 51일, 15년 이상 20년까지는 54일, 20년 이상 25년까지는 57일, 25년 이상 30년까지는 60일로 정했다. 다만 퇴직금 규정 개정 전인 1980년 12월 31일까지의 근속기간에 대하여는 종전 퇴직금 규정상의 지급율에 의하여 퇴직금을 산정하도록 규정하고, 1973년 12월 31일까지의 근속기간에 대하여 가산되는 지급율도 종전 퇴직금 규정과 동일하게 규정했다.
노동조합 설립과 시범소송의 제기
1988년 6월 29일 포항제철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2만여 명의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민주적인 집행부를 구성했다. 노동조합은 주요 사업의 하나로 일방적으로 변경된 개정 퇴직금 규정을 무효화하고 종전 퇴직금 규정을 회복하는 것을 설정했다. 노동조합은 단체교섭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사용자 측은 오히려 단체협약으로 개정 퇴직금 규정을 추인 받고자 했다.
1989년 3월 30일 체결한 단체협약서 제47조는 "회사는 조합원이 1년 이상 계속 근무하고 퇴직한 때에는 회사의 관련 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퇴직금을 지급한다."고 규정했다. 회의록에는 "단체협약 제47조와 관련하여 대법원의 판례 및 타 국영기업체의 사례를 감안하여 차기교섭 시 재교섭키로 하되 그 기간 내에 정부의 특별한 정책 변화가 있을 경우에는 보충협약을 체결함"이라고 노사 간의 합의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위 합의 당시 노동조합의 의사는 이 문제를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퇴직자 6명(소장 접수 후 1명이 사망하여 상속인들이 소송수계를 하였음)을 원고로 하여 시범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했다. 6명은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사이에 입사하여 1987년 및 1988년에 퇴직한 직원들이었다. 당시 조영래 변호사님과 박석운 소장이 노동조합 집행부와 연고가 있어 이 사건을 우리 사무실에서 맡게 되었다. 1990년 4월 27일 관할법원인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에 소장을 접수하면서 길고도 긴 혈투가 시작되었다. 경주까지 다니면서 소송을 진행했는데, 노동조합에서는 1990년 10월 31일자로 나를 고문변호사로 위촉하고 위촉장을 주었다.
길고도 긴 혈투의 여정
처음에는 퇴직금규정의 불이익변경에 필요한 근로자 과반수의 집단적 회의방식에 의한 동의 절차를 거친 바가 없으므로 이 부분만 확인받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빠른 기간 안에 끝날 줄 알았다. 관련자도 많고 퇴직금 차액도 1인당 2000~3000만 원 정도 되므로 이후 퇴직자들의 소송을 수임하면 사무실 운영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후 소송의 진행은 대법원에 세 번 올라가는 장장 10년 3개월에 걸친 길고도 긴 여정이 되었다.
1990년 4월 27일 소 제기 → 1심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 (1991. 6. 28. 선고 90가합1571 판결, 전부 패소, 재판장 판사 박태호, 판사 은상길, 판사 이찬우) → 2심 대구고등법원 (1992. 6. 4. 선고 91나4684 판결, 거의 원고 전부 승소, 재판장 판사 맹천호, 판사 김중수, 판사 최우식) → 1차 상고심(피고 상고) 대법원 {1994. 6. 24. 선고 92다28556 판결, 파기환송: 대법관 윤영철(재판장) 김상원 박만호 박준서(주심)} → 환송심 대구고등법원(1995. 9. 21. 선고 94나4098 판결, 상당 부분 패소, 재판장 판사 곽동효, 판사 정길용, 판사 조해현) → 재상고심(쌍방 상고) 대법원 {1997. 2. 28. 선고 95다49233 판결, 쌍방 상고 인용하여 파기환송, 대법관 지창권(재판장) 천경송(주심) 신성택} → 재환송심 대구고등법원 (1997. 11. 26. 선고 97가합2079 판결, 대폭 패소: 재판장 판사 이우근, 판사 조창학, 판사 한정규) → 재재상고심(원고 상고) 대법원 (2000. 7. 4. 선고 98다581 판결, 상고 기각)
1차 상고심까지
1차 상고심까지는 주로 누진 지급률을 하향 조정한 것이 문제로 되었다. 기초임금은 퇴직 당시 회사가 계산해준 기준임금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해서 지급률만 종전 퇴직금규정에 따른 누진율을 주장했다. 회사가 계산해준 기준임금이 근로기준법상의 평균임금보다 범위가 좁았지만 그 차이가 많지 않았고, 이 소송의 핵심은 지급률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지급률을 낮추는 대신 보수 수준을 10% 인상했고, 기준임금에 종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던 연월차수당과 상여금 등을 포함시켜 지급률 인하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하였으므로 퇴직금규정 개정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고 주장했을 뿐, 종전 퇴직금규정에 의해 퇴직금을 계산할 때 평균임금에서 상여금과 연월차수당 등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었다.
1차 상고심까지 쟁점은 퇴직금규정 개정이 근로자들에게 불이익한 변경인가, 불이익변경이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어 동의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가,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들의 동의를 얻은 것을 근로자 과반수 동의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근로자들이 명백한 이의 제기 없이 퇴직금을 지급받은 것을 퇴직금규정 개정에 동의 또는 추인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퇴직금규정 개정 이후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제소하며 그 개정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에 위반되는가, 지급률이 명시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근속기간 15년 이후의 지급률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 등이었다.
1심은 원고들 전부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이유는 개정 퇴직금규정은 개정 당시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지만 그 후 근로조건의 변경 등에 관하여 근로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들 전원의 동의를 얻어 퇴직금 지급율에 관하여 같은 내용으로 다시 개정함으로써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은 셈이 되어 유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항제철 관할지역인 경주지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인가? 송달되어 온 판결문은 사건번호를 '1517'로 기재했다가 두 줄로 지우고 '1571'로 수정하기도 했고, 판결 선고연도도 '1991.'이라 해야 할 것을 '1990.'으로 잘못 기재하기까지 했다.
2심은 1심 판결을 뒤집어 우리 주장을 거의 모두 받아들였다. 15년 이상의 근속기간에 대해서는 9년부터 15년까지 근속기간의 지급률인 매 1년당 4개월씩 인정했다. 누진율은 근속기간이 길수록 지급률을 높여주는 것인데, 아무런 규정이 없다는 것은 그 직전까지의 지급률을 일단 보장하고 더 인정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논의의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1차 상고심 판결은 피고 측의 나머지 주장에 대해서는 모두 이유 없다고 하면서도 근속기간 15년을 넘는 기간의 지급률에 대해서는 개정 퇴직금규정의 지급률에 따라야 한다며 파기환송 했다. 15년까지의 근속기간에 대하여는 종전 퇴직금규정이, 15년을 초과하는 근속기간에 대하여는 개정 퇴직금규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에 세 번 간 후에야 확정
파기환송심에서 이 부분만 조정되면 어렵지 않게 바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피고 측은 평균임금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삼았다. 종전 퇴직금규정에 '평균임금'이라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그 '평균임금'은 근로기준법상의 평균임금이 아니라 상여금과 연월차수당을 제외한 것이고, 퇴직금규정 변경 후에 신설된 중식대, 특수자격면허수당, 교대근무수당, 직책수당 등은 종전 퇴직금규정에 의한 평균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파기환송심 고등법원은 기초임금에 대해서는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퇴직 당시의 상여금 등을 포함한 평균임금으로 하면서도, 15년을 초과하는 근속기간에 대한 지급률에 대해 대법원 판결과 달리 종전 퇴직금규정에 아무런 규정도 없었으므로 근로기준법에 의한 매 1년당 1개월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 판결에 대해서는 원·피고 쌍방이 상고했다. 재상고심은 쌍방의 상고를 모두 받아들여 파기환송 했다. 15년을 초과하는 근속기간에 대한 지급률에 대해서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개정 퇴직금규정에 정한 지급률에 의하도록 판단(개정 퇴직금규정이 일부 무효라고 판단)하였음에도 이와 달리 근로기준법 기준에 의한 단수제로 한 것(개정 퇴직금규정이 전부 무효라고 판단)은 파기환송 판결의 기속력에 반한다는 이유로 파기했다. 기초임금에 대해서는 퇴직금규정 개정 전에 상여금과 연월차수당 등은 퇴직금규정의 '평균임금'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노사 간에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도 제대로 심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기했다. 퇴직금규정 개정 이후에 신설된 수당들에 대한 피고의 상고는 배척했다.
재파기환송심 고등법원은 재상고심의 판결에 따라 누진율은 15년까지는 종전 퇴직금규정, 15년 이후는 개정 퇴직금규정에 의하고, 기초임금은 15년까지는 상여금, 연차수당, 중식비를 제외한 금액으로, 15년 이후는 상여금까지 포함한 퇴직 당시 기준임금으로 산정했다. 1981년경 한 퇴직자가 평균임금에 상여금과 연차수당을 포함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하여 1심 법원에서 승소하였고, 이에 따라 회사가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 1979년부터 1981년 사이 퇴직자들에 대해 상여금과 연차수당을 평균임금에 포함시켜 퇴직금을 다시 산정해서 차액을 추가로 지급한 사실이 있었다.
그런데도 재파기환송심은 회사가 위와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지급률에 대해서는 개정 퇴직금규정이 유효함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지급률을 다투는 이 사건에서는 달리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했던 것이다. 평균임금에서 상여금과 연차수당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퇴직 직전 3개월 임금의 약 25~30% 정도로 매우 높아 근속기간이 긴 2명의 경우에는 위와 같이 계산한 퇴직금 액수가 기지급받은 퇴직금 액수보다 적어 청구가 기각되었고, 나머지 4인의 경우에는 청구의 일부만이 인용되었다. 이에 대해 원고 측이 상고했다.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 전인 2000년 3월 24일 회사와 노동조합이 퇴직금누진제 폐지에 합의했다. 2000년 5월 16일까지의 근속기간에 대한 퇴직금을 중간정산하고 그 다음날부터의 근속기간에 대하여는 단수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1980년 12월 31일 이전 입사자의 중간정산은 15년까지 근속기간에 대해서는 1994년 6월 24일 선고한 대법원 판결에 따르고, 기초임금은 개정 퇴직금규정의 기준임금으로 했다. 재직 중인 근로자들에게는 재환송심 판결보다 훨씬 유리한 기준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자료를 대법원에 제출했음에도 대법원은 2000년 7월 4일 재파기환송심 판결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원고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다른 사건들의 경과
당사자 간의 주장도 복잡하게 얽히고설켰고, 판결 결과도 심급마다 모두 달랐으며 소송기간도 워낙 길었다. 1심 재판을 위해 경주를 수차 오갔고, 항소심과 파기환송심 그리고 재파기환송심을 위해 대구를 무수히 왕복했다. 노사 모두 이 사건의 결과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92년 7월 31일 노동조합 집행부가 일부 간부의 비리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그 이후 조합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노동조합은 몇 십 명의 조합원만 남아 사실상 휴먼상태에 들어갔다. 소송에 대해 노동조합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어렵게 되어 당사자들과 협의해가며 힘들게 진행했다.
소송 진행 중에도 퇴직자들이 계속 나왔는데, 소송 결과를 보고 퇴직금을 정산하고자 했으나 소송이 길어져 소멸시효 문제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범소송을 우리 사무실에서 진행하고 있으므로 추가소송은 우리 사무실로 오는 것이 사리(事理)상 당연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건이 포항지역의 변호사에게 갔고, 우리 사무실은 극히 일부만 수임하게 되었다. 1992년에 3명 1건, 1993년에 39명과 22명 및 1명 사건 등 3건을 수임해서 진행했다.
시범소송의 1차 상고심 판결이 선고된 후 위 추가사건들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경주지원 92가합5027, 경주지원 1994. 8. 26. 선고 93가합2490 판결 및 93가합5444 판결,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93가단59107 판결 등). 이에 대하여 회사가 항소하여 항소심에 계류 중인 상태에서(대구고등법원 94나5442 및 94나5459 등) 1994년 10월 10일, 10월 26일, 12월 15일에 판결 원금의 80%와 이자 및 소송비용 등을 가지급하고 20%를 지급유보 하는 것으로 합의가 성립되었다.
합의서는 원·피고 대리인이 작성하고 판결금의 지급은 원고 대리인 계좌로 입금하는 것으로 했다. 합의사항은 "1994년 6월 24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대구고등법원에 계류 중인 판결이 확정되면 그 판결 내용에 따라 산출한 금액을 기준하여 가지급한 금액과 차이가 있을 경우 그 차액을 추가 지급하거나 반납하며, 유보 금액에 대한 지급일 이후 이자는 발생하지 않고,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고 기 제기된 항소는 합의와 즉시 취하한다는 것" 등이 있다. 위 합의 후에도 회사가 일부 항소를 취하하지 않아 우리가 합의서를 제출하면서 취하를 요청하여 회사가 취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회사는 위 합의 이후에 퇴직하는 근로자들에게도 동일한 내용의 합의서를 받고 80%를 가지급하는 형태로 운영했다. 기퇴직자들에게도 위와 같은 내용이 기재된 추가퇴직금청구서 등의 양식을 제출하도록 하고 정산해주었다. 시범소송이 길어지자 추가퇴직금청구서 등의 양식을 제출했던 퇴직자들 일부가 1996년과 1997년에 소송을 다시 제기했다. 우리 사무실에서 진행한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96가합76091 사건(20명), 96가합83327 사건(21명), 96가합90721 사건(21명), 97가합1940 사건(34명) 등이다.
그런데 시범소송의 재파기환송심에서 상여금 등을 평균임금에서 제외하고 퇴직금을 산정하니 오히려 가지급받은 80%의 액수가 더 많게 되었다. 그러자 회사는 초과 지급된 퇴직금을 반환하라는 반소를 제기했다(98가합9255, 98가합11241, 98가합11227, 98가합11234 사건). 시범소송의 확정 결과에 따라 정산하기로 하는 합의가 성립하였는데, 아직 시범소송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3건은 1998년 7월 31일자로 원고들 청구는 각하되고 피고의 반소청구는 기각되었으며, 1건은 1998년 4월 2일자로 본소 및 반소가 모두 기각되었다. 위 사건들은 쌍방이 항소를 제기하지 않아 확정되었다.
혈투의 결과는?
시범소송을 한 6명의 당사자들은 재재상고심의 최종 판결을 선고받은 후에야 판결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결국 2명은 청구가 전부 기각되어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추가로 소송을 제기했던 퇴직자들의 경우에는 1차 상고심 판결 기준으로 산정한 금액의 80%를 지급받았는데, 시범소송자들은 그보다 적은 금액을 받았다.
노사합의로 2000년 5월 16일자로 퇴직금 중간정산을 할 때 근무했던 근로자들은 충분한 혜택을 입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15년까지의 근속기간에 대한 지급률은 종전 퇴직금규정에 의하고 기초임금은 상여금 등을 포함한 개정 퇴직금규정에 의한 기준임금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는 회사도 평균임금을 개정 퇴직금규정에 의한 기준임금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시범소송 진행 중에 퇴직하고 소송을 제기했던 사람들은 시범소송의 1차 상고심 판결 후 그 기준으로 계산한 퇴직금과의 차액의 80%를 가지급받고 시범소송 확정 후에 정산하기로 했었는데, 시범소송 확정 후에 회사가 초과 가지급된 퇴직금의 회수를 포기하여 가지급받은 것이 최종 금액이 되었다. 1차 상고심 판결 후 노사합의 전까지 퇴직하면서 시범소송 확정 후 정산하기로 하고 80% 상당액을 지급받은 퇴직자들의 경우에도 쌍방의 소 및 반소가 각하 내지 기각되고 시범소송이 확정된 후 회사가 회수를 포기하여 가지급받은 80% 상당액을 지급받은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보면 시범소송을 했던 원고들은 소송실비용은 노동조합에서 부담했다고는 하지만, 가장 적은 혜택을 받은 꼴이 되었다. 노동조합이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면 시범소송자들에게 그에 상응한 지원을 했어야 할 것이다.
변호사는? 시범소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면서 잠 못 이루고 고민하고 경주와 대구를 오가며 정력을 낭비한 것은 나인데, 1000명이 넘는 추가퇴직자들 소송 중 65명 정도의 사건만 수임했고, 나머지는 다른 변호사가 수임했다. 추가퇴직자들의 소송은 시범소송의 진행 결과를 보기 위해 기다렸다가 1차 상고심 판결이 선고된 후 그 취지에 따라 1심 판결을 선고했고, 항소심 계류 중에 80%를 가지급하는 것으로 회사 측과 합의가 성립되었다. 이 때 성공보수를 지급받았는데, 나는 내가 담당했던 위 인원에 대한 분만 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 수많은 추가퇴직자들 몫은? 한편 회사 측 대리인은? 시범소송은 김앤장이 맡았다. 후에 추가로 제기된 소송에서는 다른 사무실도 맡은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쪽의 수임료 단위나 산정기준은 내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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