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말 대선에서는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지지 기반이 불안한 상태에서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구실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제3자 개입 금지 등을 내세우며 풍산금속, 현대중공업 등 주요 투쟁 사업장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모토로라 파업 투쟁은 외국 자본 철수 반대 투쟁과 노동 탄압 반대 투쟁이 연결돼 있는 사례다.
1989년 4월 18일에는 우일, 새론기계, 대흥로크, 영풍공업사 등의 사업장에 경찰 2200명이 투입돼 노동자 178명을 연행하고 5명을 구속하는 사건도 있었다. 탄압이 계속되면 단결도 탄력을 받는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1990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런 흐름 속에 김선수 변호사도 있었다. 그는 모토로라 투쟁, 현대중공업 투쟁 등 많은 노동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다. 김 변호사는 정권이 노동운동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불법 파업'으로 낙인찍는 행태가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편집자>
김선수, 노동을 변호하다 ① 전태일을 생각하며 변호사를 꿈꾸다 |
내가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1988년은 6공화국 정권이 출범한 해이다. 1988년은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과 7, 8월의 노동자대투쟁의 결과 민주화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은 양적·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노조 설립과 어용노조 민주화 흐름이 지속되어 1987년 말 4103개이던 노동조합 수가 1989년에는 7883개로 늘어났고, 조합원의 수도 1989년 말 193만 명을 넘어 1987년의 거의 두 배에 이르렀다. 노태우 정권도 정권 초기에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1988년에는 전반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우위를 점하는 유화 국면의 시기였다. 나는 변호사 업무 자체에도 미숙하였다는 점과 당시 시대적 상황이 시국사건이 많지는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변호사 1년차에는 시국사건을 거의 담당하지 못했다. 변호사 1년째는 주로 산업재해 사건과 손해배상 사건 등을 여러 법원을 돌아다니면서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태우 정권의 노동 탄압과 함께 본격적인 노동 변론 시작
그런 분위기는 1988년 12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의 소위 '민생 치안에 관한 특별 지시' 이후 크게 바뀌었다.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 및 변혁운동에 대하여 탄압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시국사건과 노동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나는 시국사건의 경우 민변을 통해서 맡기도 하고, 조영래 변호사님을 찾아온 것을 대신 처리하기도 했다. 노동사건의 경우 상담소에서 지원하던 사건을 맡기도 하고, 내가 전문적인 전망을 갖고 맡을 수도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위의 특별 지시 이후 분쟁 중인 노동 현장에 대규모의 경찰과 전경 등 소위 '공권력'을 투입하여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을 하였다. 대개 노동조합 설립 후 노동조합을 인정해달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하고 있던 사업장들이다. 1989년 1월 1일에 서울 성동구 광장동에 있는 모토로라코리아 사업장에, 그리고 1월 2일 새벽에 방위산업체인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병력을 투입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나는 모토로라코리아 노동조합의 도충환 위원장 형사변론을 맡으면서 노동사건에 대한 변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풍산금속은 노동조합 간부들을 무더기로 해고하였는데, 나는 25명의 풍산금속 해고자들의 민사소송을 맡았다. 풍산금속의 형사사건은 공장을 관할하는 경주지원에서 진행되었지만, 해고 무효 확인 민사소송은 본사가 부평에 있어 인천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다.
결국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특별 지시를 한 이후 공권력 투입과 물리적 탄압을 시작하면서 그 첫 케이스가 되었던 모토로라코리아와 풍산금속 사건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사건 변론을 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3일, 모토로라 노조원들이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민주노조 인정과 한국법 준수를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
노동형사사건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나는 변호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당사자가 신념을 굽히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명심하였다. 구속이라는 상황과 고문 등에 대한 위협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위축 효과는 대단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굴복하지 않고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가 한 번 수사기관의 압력에 굴복하면 자신의 양심이 참지 못하여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변호사는 적어도 이러한 사태만은 막아주어야 한다.
나는 노동사건을 포함한 시국사건을 맡았을 때 우선 당사자와 친해지고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가능한 한 접견을 자주 하는 것이 첩경이다. 구치소에 갈 일이 있으면 내가 맡고 있는 사람을 모두 불러냈다. 비록 5분을 보더라도 잠시 불러내서 얼굴을 보았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시국사건이 많은 기간에는 서울구치소에 가면 보통 5~6명을 같이 불러냈다. 재판기일이 잡히면 반드시 그 전에 당사자를 접견하여 진행 사항을 협의하였다. 내가 담당했던 사건의 재판이 끝날 때에는 여러 차례 접견을 하고 어느 정도 친근해질 수 있었다.
노동형사사건의 경우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구속이나 기소 자체가 부당한 것이 대부분이다. 사용자 측의 노동조합 불인정과 부당노동행위 등이 원인이 되어 불가피한 항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태를 트집 잡아 노동자들만 일방적으로 탄압하는 형국이다. 노동형사사건에서는 쟁의나 농성 등 문제가 된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법정에서 설명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행위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자니 당연히 재판은 길어지게 된다. 피고인 신문 사항, 증인 신문 사항과 반대 신문 사항 등을 준비하고 이를 위해 구치소로 가서 피고인을 만나고, 사무실에서 증인 등 관련자들을 만나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을 만나 위로하기도 해야 한다.
형사재판은 보통 2주일 간격으로 잡혔는데, 그 2주가 금방 지나갔다. 6개월의 구속 만기를 꽉 채우는 경우도 많았다. 시국사건이나 노동형사사건 몇 건이 같이 진행될 때는 다른 일반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쉽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된다.
노동조합 대표가 구속된 경우 노동조합의 운영 등과 관련하여 변호인은 의사연락자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일반인의 면회는 제한되어 있고 교도관들이 입회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운영이나 기타 사항과 관련하여 충분하게 대화하고 서로 의사를 교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호인은 노동조합으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고, 변호인 스스로 사건과 피고인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변호인의 입장에서는 피고인이 재판을 받으면서 어떠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 항상 신경 쓰인다. 피고인이 어떻게든 빨리 석방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재판에 임하는가 아니면 석방 여부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을 법정에서 어떻게 주장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는가 여부에 따라 변호인의 변론 방향과 마음자세가 달라진다.
다행히도 나는 노동형사사건에서 조속한 석방만을 염두에 둔 당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속기간이 얼마나 길어지든, 또 선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재판 과정에서 충분히 주장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나에 대해서도 그에 관한 조력을 요청할 뿐 석방 여부를 가지고 부담을 주지 않았다. 구속되어 있는 자신보다는 밖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노동조합의 상황에 대하여 더 걱정을 하였다. 이러한 당사자를 만난 것도 나로서는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변호인인 나로서는 당사자의 석방 여부와 재판 결과에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형사사건을 처음 맡기 시작했을 때에는 법원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사건을 맡으면 그 즉시 경찰로, 구치소로 달려가서 구속자를 만나고 곧바로 구속적부심사 청구를 하고, 구속 상태에서 기소되면 바로 보석 청구를 하였다. 노동자들이 항의와 농성을 하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고 오히려 회사 측의 잘못이 더 큰 데도 불구하고 분쟁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농성을 강제로 해산하고 노조 간부들을 구속하는 것은 부당했고, 특히 조합원들이 피해자의 지위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가해자 측인 회사나 구사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공권력의 행사였다. 이런 점을 지적하면 구속적부심사나 보석의 단계에서 구속자가 석방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구속적부심사나 보석 청구가 받아들여진 예는 거의 없었다. 대개의 경우 선고할 때 집행유예를 선고하여 그 단계에서 석방해주었다.
나는 변호인의 지위보다는 당사자와 거의 동일한 입장이 되어 초조한 심정으로 판결 선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당사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았다. 그래도 장기간에 걸친 재판을 마치고 판결 선고가 된 이후에는 선고 결과에 관계없이 부담 없이 당사자를 만날 수 있었다.
재판정에서 야유를 받은 이유는?
내가 처음 본격적으로 노동형사사건을 변론한 것은 1989년 1월 1일 구속된 모토로라코리아 노동조합 도충환 위원장 사건이다. 위원장 등이 중심이 되어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는데, 외국계인 회사 측이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의 인정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회사는 소위 구사대를 동원하여 농성을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조합원들이 공장 2층 전산실로 올라가 농성을 계속하였는데, 서울동부경찰서는 새해 벽두부터 병력을 투입하여 조합원들을 강제 연행하고 농성을 해산하였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 간부 한 사람이 몸에 시너를 뿌리고 항의를 하다가 불이 붙어 중화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경찰과 검찰은 농성 및 그 과정에서 빚어진 마찰 등을 이유로 도충환 위원장을 구속기소했던 것이다.
위 사건에서는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은 회사 측에 근원적인 책임이 있고, 소위 구사대가 조합원들의 농성을 강제 해산하면서 조합원들이 다치는 등 오히려 피해자의 지위에 있었다. 그런데 회사 측이나 구사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법적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고, 조합원들만 범죄자로 몰렸다. 구속적부심 청구와 보석 청구는 기각되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 변론 과정에서 변호사로서는 겪기 쉽지 않은 일을 당했다. 대개의 노동형사사건 재판에서 방청객은 구속자를 걱정하고 지원하는 노동자들이다. 방청객들은 구속자가 법정에 들어올 때 환호하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변호사도 이렇게 구속자를 지지하는 방청객을 보고 힘을 얻기도 한다. 이 사건 재판기일에도 법정이 방청객들로 꽉 찼다. 당시 나는 같은 사무실의 선배인 윤종현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출석하였다. 우리는 방청객들이 당연히 노조 위원장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런데 재판 진행 과정에서 많은 방청객들이 오히려 피고인이 진술할 때 야유를 퍼부었다. 변호사인 우리들에게도 야유를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청객들은 노조 위원장을 지지하는 조합원들과 회사 측이 동원한 비조합원들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증인으로 회사 사장을 신청하였는데, 회사에서는 이에 대한 시위로 관리자들과 비조합원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피고인과 변호인에 대하여 야유를 한 방청객들은 회사가 동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 우리를 향해서도 '우리는 노동조합이 필요 없다', '왜 저런 사람을 변호하느냐'고 야유를 퍼부었다.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동조합 활동의 어려움을 절감할 수 있었다. 노동형사사건 변론은 그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이와 같은 일을 그 이후에는 다시 경험하지 않았다.
위원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다. 법원도 노동자들의 상황을 감안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위원장은 그때야 비로소 석방될 수 있었다. 당시는 불구속수사 및 재판 원칙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고, 인신구속이 남용되어 사실상 사전 처벌의 효과를 거두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선고할 때 일정 기간 구금되었던 사정을 고려하여 집행유예로 석방해주었던 것이다.
▲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
이어지는 노동형사사건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88년 12월부터 어용적인 노조 집행부와 회사의 야합에 항의하여 파업을 시작한 이래 100일 이상 지속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합원과 가족 300여 명이 현대그룹의 실질적인 경영주이고 결정권자인 정주영 회장 면담을 위해 1989년 2월 28일부터 서울 종로구 계동 소재 현대그룹 본사 사옥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였다. 경찰은 3월 8일 5개 중대 800여 명을 동원하여 농성 중이던 노동자 260여 명을 연행하고, 그중에서 농성 주동자 6명을 구속하였다. 그들은 울산에 거주하였지만 서울에서 구속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들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찰은 진압 과정에서 농성장에 걸려 있던 대형 걸개그림 <노동자도>를 훼손·탈취해 갔는데, 이를 제작한 화가 차일환 씨 등의 방문을 받고 이 그림을 되찾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문제에 대해 상담했으나,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이 북한을 방문한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공안합동수사본부라는 법적 근거가 없는 기구를 만들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대대적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그에 따라 전국에서 많은 노동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안양에 본사가 있고, 군포와 구미에 공장이 있는 금성전선 노동조합이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1989년 2월부터 파업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파업은 직장점거의 형태를 띠었고, 회사가 비조합원 등을 동원하여 구사대를 조직하고 대응하는 바람에 마찰이 발생했다. 경찰은 조합원들의 직장점거를 해산하기 위해 병력을 사업장에 투입하기도 했고, 주요 노조 간부를 구속하기도 했다.
1989년 4월 27일경 김상호 위원장이 구속되었는데, 나는 이 사건을 맡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가족과 조합원들이 위원장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걱정하는 모습, 특히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것으로 보였음에도 부인이 보여준 의연한 자세에 받은 감동은 여전히 신선하다. 역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한양대학교병원 노동조합은 1989년 5월경 단체협약 및 임금인상 투쟁과 관련하여 조합원들의 단결을 제고하고 병원 측의 양보를 얻어내고자 집단 연월차휴가 실시 및 병원 로비 농성 등 단체행동을 하였다. 이를 이유로 차수련 위원장 등 노동조합 간부 5명이 구속되었다가 최종적으로 3명이 구속기소 되었다.
나는 이 사건도 맡게 되었는데, 이 재판에서도 모두 집행유예의 형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차수련 위원장은 그 이후 한양대학교병원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또 전국병원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세 번이나 더 구속기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변호를 맡았다. 모두 집행유예의 형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징역복(懲役福)이 있어 어쩌다 한 번 문제가 되었음에도 실형을 받는 사람이 있는데, 차수련 위원장은 징역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병원으로부터 두 차례 해고되기도 했는데, 쉽지 않은 소송이었지만 모두 승소하였다.
위와 같은 사건들이 1989년 상반기에 맡았던 노동형사건들이다. 나는 이들 사건들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사건 변론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정부와 사용자의 노동조합에 대한 부당한 편견으로 말미암아 노동조합의 실체를 인정받는 것 자체가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민주적 노조 집행부로 당선되면 먼저 '구속결단식'을 치르고 비장하고도 결연한 각오로 임기를 시작했다. 적법한 단체행동이나 파업에 대해서는 거의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사용자의 적대적 태도와 정부의 공안적 시각에 기초한 탄압 일변도의 대응으로 말미암아 노동조합도 격렬하게 투쟁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구속되고 해고되어 많은 노동사건들이 발생했다.
더구나 대법원이 쟁의행위의 정당성에 관하여 주체, 목적, 시기와 절차, 수단과 방법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엄격한 요건을 요구함으로써 적법하게 쟁의행위를 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었다. 헌법은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데, 기본권 행사 자체가 형법상의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매우 엄격한 정당성 요건을 모두 통과해야만 처벌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헌법 위에 업무방해죄'란 말이 생겼다.
어느 시점 이후에는 노동조합이 적법한 파업을 해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절차를 준수하고 생산시설이나 업무 공간 등에 대한 점거 방식을 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의 단결력과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조합 활동 관련 해고자의 복직 문제, 정리해고 문제, 정부 정책 또는 입법 등에 관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하면 아무리 다른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은 목적상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불법 파업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은 현재도 변경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대법원(2011. 3. 17. 선고 2007도482) 전원합의체 판결로 종전 입장보다 진일보하긴 했지만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단순 파업이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은 동일하므로, 대법원이 이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상황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보면 한 사회에서 법리의 발전과 법원 태도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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