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문가인 <연합뉴스> 정일용 기자가 맥락을 정확히 짚었다. 정 기자는 8일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나는 <우리민족끼리>에 접촉한 사실 자체가 없는데, 내 이메일 계정이 '어나니머스 코리아'가 공개한 명단 안에 들어 있더라"며 "근본적인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언론 등에서는 명단이 해킹으로 빼낸 자료가 맞는지 여부도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이회창, 전두환, 장동건, 원빈, 전지현이 <우리민족끼리> 회원?
'코리아'는 이 명단을 글로벌 웹호스팅 업체 기트허브(GitHub)에서 운영하는 텍스트 보관소 '페이스트빈(pastebin.com)'을 통해 공개했다. 하지만 이 명단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해, 장동건, 원빈, 전지현 등 유명인들의 과거 이메일 계정도 포함돼 있다. 심지어 홍길동과 같은 이름도 수십차례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직 경찰, 기자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단 자체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코리아'라고 자처하는 누군가가 던져 놓은 이 상황이 사회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파장은 몇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먼저 '코리아'가 국제 해커 조직 '어나니머스'의 일원이고, 이들이 <우리민족끼리> 해킹에 성공했으며, 해킹으로 얻은 자료가 실제 <우리민족끼리>의 회원 명단이 맞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물론 '어나니머스'라는 국제 해커 그룹이 집단적 범죄 조직인지 등 '행위자'의 성향과 특성에 대한 규정 역시 선행돼야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데 따르면 '어나니머스'라는 느슨한 해커 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위키리크스의 폭로전을 폭넓게 지지했다는 것 정도다. 몇몇 해커가 범죄 행위로 인터폴에 수배된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해킹을 주도했다는 '코리아'와 '어나니머스'의 관계 자체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 국제 해커조직 '어나니머스'와 '어나니머스 코리아'의 연관 관계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미지는 '어나니머스' 사이트 캡쳐 |
진보, 보수 매체 할 것 없이 "<우리민족끼리> 가입자라고 해서 '종북'은 아니"며 "처벌이 어려울 수 있다"는 취지의 보도를 연이어 내놓고 있지만, 사실 '코리아'라는 집단이 실제하는지, 이들이 빼냈다고 주장한 자료가 해킹에 의한 것인지 등은 확인된 것이 전혀 없다.
보안 전문가인 큐브피아 권석철 대표는 "현재 '어나니머스'와 별개로 인식되는 '코리아'가 해킹을 성공했다는 객관적 정황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해킹 전문가이기도 한 권 대표는 이어 "'코리아'라는 조직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어나니머스' 일원도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며 "보통 '어나니머스'는 공격 전후에 자신들의 행위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지만, 현재 '코리아'로 알려진 이들의 공격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권 대표는 "이는 '코리아'가 단순히 '어나니머스'를 추종하는 한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덧붙였다.
권 대표는 '코리아'가 해킹을 통해 확보했다는 자료에 대해 "'코리아'가 해킹에 사용했다는 방식은 이미 잘 알려진 해커들의 공격 방식이긴 하지만, 그들이 직접 그 방법을 사용해 <우리민족끼리> 내부망에 들어갔다는 것과 관련된 객관적인 정황은 하나도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코리아'가 실제 해킹에 성공했는지 여부도 특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해킹에 성공했다는 주장과 별개로, 그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정황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현재 '광풍'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나니머스'한 상황에서 경찰 수사는 어떻게?
경찰 등 사정당국이 일단 수사를 전제로 한 '내사'에 착수했다면 '코리아'의 실재를 확인하고, 성격을 특정해야 하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 다음 '코리아'가 공개한 명단의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 국내 이메일 계정과 함께 이름이 빼곡이 들어찬 그 명단이 진짜 <우리민족끼리> 전산망 내부 자료가 맞는지 대조해 자료의 신빙성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
물론 우리 사정당국이 명단의 진위 여부를 먼저 가리지 않고 인지된 정보(이른바 '코리아'가 확보했다는 명단)를 토대로 '종북 세력'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수도 있다. 수사와 명단의 진위 확인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방안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다. 먼저 <우리민족끼리> 회원 가입 여부 자체도 확인하기 어렵다. '종북 활동'을 했는지 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 경찰은 거론된 인사를 개별적으로 접촉해 탐문 수사를 해 나갈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본인이 실제 <우리민족끼리>에 가입했다고 해도 수사 기관에 '내가 아니다'라고 진술하면 어쩔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해당 인물과 가입자를 대조해 확인할 기초 수사 자료는 <우리민족끼리>에 있고, <우리민족끼리> 서버는 중국에 있다. '수사 매뉴얼'에 따른 자료 요청이나 압수수색 등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중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방안이 있지만 중국 측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지 않다.
명단 분류 작업 자체도 문제다. 국내 계정 이메일을 사용한 명단만 조사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해외 계정으로 회원에 가입해 '이적 행위'를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손을 놓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정당국은 추가 공개된 6216명까지, 총 1만 5217명 개개인에 대한 수사를 일일이 진행해야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잡한 상황이지만 새누리당은 연일 '철저한 수사'를 외치고 있다. 정우택 최고위원은 이날 "<우리민족끼리>에 가입하고 활동하는 것은 대한민국 안보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일 수 있다"며 "검찰과 경찰은 공개된 명단을 토대로 가입경위와 활동상황을 철저히 수사하고 그에 따른 엄정한 법집행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정 최고위원은 "국가안보에 해가 되기에 접속조차 금지된 매체에 대한민국의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회원가입을 하고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이 대북 선전 매체 글을 인용하고 북한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작금의 현실을 보며 국민들의 안보 불안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코리아'가 던져 놓은 총체적인 '어나니머스(익명성의)'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아노미' 상태로 치닿고 있다. 입증된 사실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철저한 수사"를 요청하는 배경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고개를 들고 있다. 경찰 등 사정당국도 수사를 오래 끌 경우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