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기업의 이익 침해 우려를 한국 정부에 공식 전달하고, 한국 정부가 마련한 지침을 수정하도록 거듭 요구하는 상황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국제 통상 업무를 담당해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첨병'과 같은 핵심 부서다. 미국을 대표해 한미FTA 협상을 담당했다.
<프레시안>이 확인한 결과 미국 무역대표부는 지식경제부에 IT·네트워크 장비 조달과 관련해 "기술 배점 기준이 한국 중소기업에 특화돼 외국 기업들은 불이익을 받아 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빼앗겼다"며 "이 조달 가이드라인(IT·네트워크 장비 구축·운영 지침)은 WTO GPA(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정)를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WTO와 한미FTA에 의거해 조달 시장에서 투명한 평가와 기준이 보장되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현재 새누리당 의원)과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2010년 11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한미 통상장관 회의를 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쟁점 현안 해결을 위한 최종 담판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GPA는 정부조달협정이다. 즉 정부가 각종 물품과 인프라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된 '조달 시장'에서 외국 기업의 물품이 한국 기업의 물품과 동등한 취급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GPA의 핵심 내용이다. 한국과 미국은 모두 WTO GPA에 가입했으며, 양국이 체결한 한미FTA는 GPA의 조달 시장 개방 수준을 더 심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정부가 GPA와 한미FTA를 언급한 것은 우리 조달 시장에 자국 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다.
미국이 문제 삼은 지침은 지경부가 2010년 12월 제정한 것으로 지경부 및 산하 기관이 3억 원 이상 규모의 IT·네트워크 장비를 도입할 때 심의위원회를 거치고, 또 기술 능력 평가 배점을 기존의 80%에서 90%로 끌어올리는 등의 내용이다. 미국 기업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약한 한국 기업들에 유리한 것 아니냐는 게 미국 정부의 판단이다.
이와 관련해 지식경제부는 "이 지침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미국 측에 회신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문제의 핵심은 '배점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인데, 배점 기준을 정하는 것은 WTO GPA 등에 명시돼 있지 않다. 우리 측 사정에 따라 정할 수 있는 것으로 미국 측에서 언급하고 있는 WTO나 한미FTA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이번 사안은, 한미FTA에 대한 정부의 홍보와 달리 (IT·네트워크 기술 같은) 한국의 신성장 동력이나 잠재적인 산업 육성 정책에 (한미FTA가) 중대한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송 변호사는 이어 "지식경제부의 지침과 한미FTA가 관련이 없다면 미국 무역대표부가 왜 그런 공문을 보냈겠나. 우리 측이 관련이 없다고 해도 미국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미FTA의 독소 조항으로 꼽히는 ISD(투자자-국가 소송)를 미국이 이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기업이 한국 네트워크 관련 조달 시장에서 불합리하게 배제됐다고 판단할 경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고, 그때 미국 무역대표부의 이러한 공문이 소송의 근거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그런 조짐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본격적인 한미FTA 시대가 열린 만큼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또 미국 측의 한국 조달 시장 공략이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구매조달학회가 한미FTA 협상 타결 직후인 2007년 6월에 실은 '한미FTA 정부 조달 분야의 협상 결과와 정책적 의미'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어 한국의 조달 시장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다고 돼 있다. 다만 경제 규모가 현재보다 작은 2000년 WTO의 무역 정책 검토 보고서는 한국의 정부 조달 시장 규모를 43조7543억 원으로 추정했다.
이 중 수입품 조달 규모는 2조875억 원가량인데, 이 중 40.5%는 미국에서 조달됐다. 약 8454억 원 규모다. 2000년 기준으로만 잡아도 약 8454억 원 규모의 시장이 열린 셈이다. 이는 미국에 매력적인 시장일 수 있다. 정부의 각종 조달 관련 정책과 관련해 미국의 요구가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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