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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상습 쿠데타 기획' 공론화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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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상습 쿠데타 기획' 공론화 해야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64>'남로당 전력'도 검증 필요

대선 정국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덧칠'작업이 본격화 되는 느낌이다. 주로 여권 인사들과 이른바 보수언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이 작업이, 바로 유력한 대권 후보인 박근혜 의원 때문에 이뤄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녀가 누리고 있는 높은 지지율이 상당부분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後光) 때문임을 지금 부인할 수는 없다.

지난날의 박정희 씨 잘잘못에 대한 평가가 박근혜 후보에 대한 평가로 직결되는 지경에 까지 상황은 와있다. 박근혜 의원도 그 점에 대해 만족해하고 있을뿐 아니라, 그런 여건을 조성해 가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지난 10일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면서도 그녀는 "50년 전 (아버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산업화의 기적을 이뤄냈듯···앞으로 5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국민 행복의 초석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물론 50년 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씨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 당시, 장면 민주당 정권이 밑그림을 그려 놓은 것(포항제철도 장면 정권이 세워둔 계획이었다)이었다. 이제서야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녀는 아버지가 '시작한 것'을 자기가 이어가겠노라고, '법통'이나 '정통성'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의 선언을 했다. '박정희'의 연장선상에 '박근혜'가 있음을 분명히 한듯하다.

때문에 그녀와 그녀 주변에서는 일찌감치 친일 행적이랄지, 남로당 전력 문제랄지, 쿠데타랄지, 그밖에 삼선개헌, 유신, 독재, 인혁당 사건의 사법 살인, 이런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손질'이 절실해졌을 듯 싶다. 근래 들어 조중동과 종편을 포함한 방송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박정희 예찬론'을 펴고, '남로당 군부 조직책 박정희'를 구출해준 백선엽 띄우기 작업까지 벌인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다녀오는, '헐값'의 옥천 관광이 등장하더니, 급기야 배울만큼 배운 것으로 알려진 분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4대 강에 대한 예리한 시각으로, '건강한' 학자로 알려졌던 분이 "(5·16은) 당시로 볼 땐 군사혁명이 맞지만 그 후 역사 발전 측면에서 쿠데타라고 폄하할 수 없다"는 난해한 소리를 했다.

박근혜 캠프의 공동 선대 위원장 되시는 분은 "5·16에 대해서는 대부분 만족해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뉴라이트 계열 역사 교과서에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쓴 교수는 5·16은 쿠데타이면서 혁명이라며, 동전의 양면이라고도 했다. 당사자인 박근혜 의원은 5년 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검증 때처럼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후손이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나쁘게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박근혜 의원이 '국가차원의 범죄 행위인 쿠데타'와 '아버지가 한 일인 쿠데타' 사이에서 "구국을 위한 혁명으로 본다"고 비켜간 것은 자식의 입장을 생각할 때 일견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쿠데타는 쿠데타다. 범법행위가 맞다. 그것도 큰 범법행위다. 5·16이 쿠데타라는 객관적인 평가는 이미 나와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박근혜 의원에게서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와 관련된 고뇌를 전혀 읽을 수 없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문제는 분명한 그 쿠데타를 놓고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덧칠하고 손질해서 박정희 씨의 얼굴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보고자 하는 이런저런 시도다.

박정희 씨는 일찍이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도 쿠데타를 생각했고, 5·16 쿠데타도 쿠데타 한해 전인 1960년 4·19혁명 전후해서부터 계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냥 한 토막 에피소드로 치부해버릴 대목이 아니다. 상습적으로 쿠데타를 기획하고 시도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없을 수 없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구국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면, 지금 이 나라 MB정권 치하에서는 일년에도 여러번씩 쿠데타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 할 수도 있다.

한 신문이 박 의원의 출마선언을 보도 하면서 '아버지의 국가주의를 넘어···국민 한명 한명 행복한 시대로'라는 제목을 달았다. 다 알다시피 국가주의란 '국가권력에 사회생활의 전 영역에 걸친 광범위한 통제력을 부여하는 사상'이다. 인권 등 국민의 기본권은 다음 다음의 문제가 된다. 바로 박정희 씨의 사상이다.

박근혜 의원이 대선출마를 선언하는 날 행사장에는 나이든 노년층이 많이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도됐다. 박정희 씨 부부의 사진을 판매하는 노점상도 등장했다고 했다. 그 노점상과 노년층 인파에서 필자가, 다름 아닌 박정희 씨의 국가주의에 대한 '향수'를 읽고 안타까워했다면 과민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박정희 씨의 여러 문제에 대한 공론화와 검증 작업이 절대로 필요한 시점이다. 대선에 필요해서만은 아니다. 바르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 역사가 바로 쓰여져야 한다. 그간 간헐적으로 등장했던 박정희 씨의 친일 문제와 남로당 전력, 상습적 쿠데타 기획 등에 대한 본격적인 공론화와 검증작업이 있어야 한다.

그 동안 박정희 씨의 문제와 관련된 공론화나 검증은 사실상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5·16 쿠데타 이후 독재체제에서 자행되었던 여러 인권 탄압과 사법 살인행위 뿐 아니라 부정축재 등에 대해서도, 근래 들어 그 것도 전부가 아닌 부분적인 진상조사와 재심 등이 이뤄졌을 뿐이다. 특히 남로당과 관련된 그의 행적은 일부 탐사 보도가 있었으나 거의 주목 받지도,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도 못했다.

틀림없는 빨갱이였다느니,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실적도 없고, 오히려 좌익분자들의 명단을 국군에 넘겨주었으므로 애국자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는 정도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박정희 씨의 남로당 관련 문제가 직접적인 '무서움' 때문에 더욱더 공론화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총칼을 들고 있는 권력자의 친일문제나 남로당 문제 등을 무슨 수로 거론 할 수 있었겠는가.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돈 오버더퍼(Don Oberdorfer)가 쓴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이란 책에 보면 바로 그 문제와 관련된 대목이 서술되어 있다.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1970년대 초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엘리자베스 폰드(Elizabeth Pond) 특파원은 박정희의 과거를 언급하는 기사를 작성했다는 죄로 남한 입국을 금지 당하기도 했다▷(이종길 번역판 65쪽)

여기에다 박정희 씨의 쿠데타 이후 혜택을 받은 상류 기득권층의 '압묵적 카르텔'도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박정희 씨의 친일 문제나 남로당 전력 등이 천하에 속속들이 공개돼 버리면, 자칫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부터도 입단속에 입단속을 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게다가 유신정권이, 비슷한 성격의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박정희 씨의 친일이나 사상 전력은 수십년 동안 가려졌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씨가 남로당의 군부 책임자로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실이 처음으로, 그리고 잠시 알려진 것은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이틀 전인 10월13일 이었다. 당시만 해도 야당지로 이름을 날리던 동아일보가 민정당 윤보선 후보 측의 폭로를 단독 보도한 호외를 찍어냈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프레시안
호외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 박정희 후보 측에 의해 상댱량이 강제로 압수됐으나, 1949년 2월18일 군사재판에서 박정희 소령이 국방 경비법 위반 혐의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언도 받은 내용 등을 보도하고 있었다.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려던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측은 발칵 뒤집혔다. '조작된 인신공격'이라 반발했다.

"박정희 (공화당) 총재는 김창룡 장군에 의해 관제 공산당원으로 몰린 적은 있으나 자유민주주의자임이 밝혀져 군의 요직을 역임했고 반공전선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고 부인했다. 어떻게 '손질'을 했는지는 몰라도, 심지어 박정희 소령 재판의 심판관을 맡았던 사람이 "나는 그런 사람 재판한 적이 없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는 그런 과거 이야기 안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에 가입한 동료들의 이름을 '밀고'해준 대가로 형 집행정지 절차를 거쳐 석방될 수 있었고, 훗날 복직도 되었다. 그게 맞는 이야기다. 박정희 씨는 1970년 어느 날, 남로당 전력과 관련해 청와대의 측근 비서관에게 입을 연 적이 있다. "육사 교관 때 향우회에 간적이 있었는데, 당시 참석자들이 대부분 빨갱이여서 오해를 받고 김창룡에게 끌려가 고문도 당하고 재판도 받았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당시 조사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써낸 자술서를 직접 읽었다는 조사관의 증언도 있고, "숙군(肅軍) 과정에서 군대내 좌익 세포들의 구조적인 조직구조를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박정희 소령이었다"는 또 다른 증언도 있다. 물론 재판과정에서도 그는 모든 것을 시인했다. '구조적인 조직 구조를 제공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는 활동실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씨가 자신의 군사재판 관련 자료를 모두 폐기토록 지시했다는 탐사보도도 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는 남북대결 상태에서의 국가안보를 위해 미·일·중·소가 참여하는 4대국 보장론을 제시했다. 그 4대국 보장론은 4대국에 남북한이 참여해, 오늘날 6자 회담이 되었다. 그 김대중 씨를 당시 "빨갱이"라고 악을 쓰며 몰아치던 사람이 바로 박정희 씨였다.

박정희 씨는 지난날 전향해야 할만한 까닭이 있어서 전향한 사람이었으나, 김대중 씨는 남로당에 가입한 적은 물론, 그런 사유로 채포되거나 재판 받은 적도 없어 전향할 이유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평생, 아니 죽은 뒤에까지도 좌빨(좌익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있다. 누군가 종북 원조가 박정희 씨라 했으나 정적(政敵)을 공격하기 위해 종북논쟁을 일으킨 원조도 바로 박정희 씨다.

김대중 씨에게 평생 뒤집어 씌웠던 '색깔 논쟁 괴로움'의 절반 만큼이라도 박정희 씨에게 안겨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게 공정(公正)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울분을 원수로 갚는 그런 건 안하는 게 좋다. 대신 꼭 필요한 게 있다. 박정희 씨에 대한 바른 평가가 필요하다. 역사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친일문제, 상습적인 쿠데타 계획 등을 포함한, 박정희 씨 문제에 대한 공론화와 검증은 그래서 절대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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