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떠나시다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12월 10일 병원에 입원한 김 의장이 사랑하는 딸 병민이의 결혼식에 나오기 어렵다는 전갈을 듣고 미어지는 마음을 안은 채 장영달 동지의 함안 출판기념식장으로 향했지요. 아내가 대신 병민이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장영달 동지는 김 의장의 바램을 위해서도 꼭 승리를 거두겠다고 다짐하더군요.
한 시대의 장을 넘기고 떠나는 김 의장, 김 형!
김 의장이 대학에 입학하여 시작한 굴욕적인 6·3한일협정 체결 반대투쟁은 47년째로 접어듭니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김 의장의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행진은 온전히 우리 운동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 운동사가 이제 한 장을 넘기는 겁니다. 김 의장은 그 운동사의 무거운 짐을 가혹하게 짊어졌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의 대부분을 투쟁과 이론을 접목시키면서 치열하게 살아냈습니다.
▲ 촛불집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는 김근태 의장. ⓒ뉴시스 |
지금도 저에게 회한으로 남아있는 일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함께 참여케 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온전히 결성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견해를 조정하여 함께 발족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마음의 응어리로 내내 남아있습니다. 1985년 전두환 군부집단은 2·12 총선에 패배한 뒤 재야와 야당의 직선제 쟁취투쟁이 본격화할 기세를 보이자 민청련과 김 의장을 제1 목표로 공격했습니다. 시대의 의제와 투쟁의 근원이 민청련이고 그 가운데 김근태가 있다고 지목했던 것이죠. 그래서 김 의장에 대한 테러, 살인적 고문이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확대되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초기에 끄지 못하면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항쟁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김 의장에 대한 만행으로 표면화한 것이었죠. 우리가 한 덩어리로 그 국면을 맞았으면 김 의장에게 십자가를 지우지 않았으리라는 회한이 두고두고 남는 이유입니다.
김 의장, 김 형!
왜 지금 떠나야 합니까. 이제 민주개혁진보 진영이 장기적으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져야 할 <2012년의 큰 일>을 앞두고 이렇게 홀연히 떠나야 합니까.
김 의장의 깊고 멀리 내다보는 지혜와 경륜이 지난날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이 때 왜 떠나야 합니까.
통탄스럽고 안타깝고 슬프고 허전합니다.
그러나 김 의장도 아실 겁니다. 김 의장이 뿌려놓은 씨앗이 싹트고 자라 수백만 '김근태'들이 촛불이 되고 '나꼼수'가 되어 <2012년의 큰 일>을 치러내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 의장, 들리십니까, 촛불로 빛나는 저 함성이!!
보이십니까, 수백만 '김근태'들이 행진하는 저 장엄한 역사의 물결이!!
김 의장, 김 형!! 이미 역사가 된 김 형, 그들에게 뒷일 맡기시고 편히 잠드소서.
2011년 12월 30 일
김근태 의장과 한 시대를 살았던 이 부 영
(이부영 대표는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직기자 출신의 정치인으로, 김근태 의장과는 오랫동안 재야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또 열린우리당에서 함께 의원을 지낸 정치적 동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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