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공전하던 지난 여름.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희망버스에 정치인이 오르는 것을 놓고 야권 내부에서도 논쟁이 벌어지던 그 무렵이었다. 지난 1월 시작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한진중공업의 최장기 해고자의 크레인 고공 농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발을 움직이니 정치인들이 덩달아 춤을 춘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시각이었다.
야권 성향이긴 하나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에 더 냉소적이었던 지인은 희망버스 때마다 빠지지 않고 맨 앞 자리에 서 있던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고맙다"고 했다. 그는 덧붙였다.
"쇼도 어떤 쇼인가가 중요한 거 아냐? 엉뚱한 곳에 가서 쇼 하는 정치인은 많이 봤어도 생명줄 잘린 노동자 앞에서 쇼 하는 정치인은 못 봤다. 정동영보고 '저거 또 대선 나오려고 쇼하네'하는 그들은 한진 해고자들 목소리나 한 번 들어봤다냐? 여의도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복지 복지 말만 하는 건 누가 못 해."
한진중공업 사태가 마무리 되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10일, 김진숙을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하는 정동영 의원을 보며 그 지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정동영 "내가 이 여자는 반드시 살려야겠다"
지난했던 309일, 여러 고비마다 사람들은 비극을 우려했다. 바로 가까이 쌍용자동차의 예가 그 우려를 뒷받침해 줬다. 오랜 정리해고 철회 파업과 전쟁터 같았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검은 불길, 표면적으로는 마무리 된 듯 보였지만 계속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죽음. 한진중공업 노사가 합의를 이룬 9일에도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사망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땅으로 내려온 10일에는 쌍용차 노동자의 부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정리해고 사태 이후 세상을 떠난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은 열아홉 명이 됐다.
한진중공업에서도 2003년 정리해고 문제로 두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김주익 지회장이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메고도 회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또 한 명의 노동자가 도크에 몸을 던지고서야 그 지난했던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런 한진중공업이 노조와 합의를 했다. 누구의 생명도 잃지 않고 만들어낸 합의여서 더 값졌다. 여러 사람의 피눈물 어린 노력의 결과였다. 정치권에도 숨은 공신이 있다. 정동영 의원이 바로 그다. 올해 초 환경노동위원회로 상임위를 옮긴 그는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에 주력했다.
▲ ⓒ연합뉴스 |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을 처음 듣던 날 "내가 이 여자는 반드시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던 그는 단순히 희망버스에 올라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해외에 머물며 영도조선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나 몰라라 하던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을 국회로 결국 불러들였다.
'청문회 한 번 했으니 이제 국회가 할 일은 다 했다'던 기존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끈질겼다. 한진 사 측이 전혀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조남호 회장을 다시 국회로 불러들였고 지난 10월 마침내 국회 권고안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 됐다.
정 의원의 '좌클릭'의 시작점으로 정 의원 측은 한 가지 장면을 꼽는다. 2007년 대선 패배 후 떠났던 그가 돌아와 온갖 따가운 시선을 받던 그 즈음, 용산 참사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미사에 참석한 정 의원을 향해 한 신부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년 반 전에 여기 있는 정 의원이 조금만 잘 했으면 이 사람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정 의원의 고개는 떨궈졌다. 그리고 그때 정동영은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정치란 힘 없는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조남호 회장에게 김주익과 곽재규의 장례식 동영상을 보여주며 "증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고 아이들의 아빠로 살아있을 사람들"이라고 호통치는 그의 말이 꼭 조 회장이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로도 읽혔던 이유였다.
김진숙 "정리해고만 막을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 잡겠다"
그런 그를 모두가 곱게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구는 또 권력에 눈이 멀어 쇼를 한다고 했고 누구는 진심이 아니라 했다. 같은 당에서도 그의 이런 '좌클릭' 행보를 놓고 "민주노동당 정동영 의원이요"라고 대놓고 비꼬는 동료들이 있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런 시선들에 대해 "정리해고만 막을 수 있다면 민주당이 아니라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고 일갈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 앞에서 보여주는 행동이란 얘기기도 했다.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의 절망적인 외로움을, 그들은 이미 이른바 '민주개혁정부' 10년 동안 절실히 느껴 왔다. 한때 동지이고 내 편이던 사람들은 정치권에 가면서 '중도'를 찾았고, '합리'를 내세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김진숙 지도위원은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됐을 때 운동권의 3분의 1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자신을 찾아온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해주다 의원직을 잃었던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노조법을 날치기 했고, 영원한 재야의 어른이었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뒤 정리해고 법제화를 받아들였으며, 김진숙의 변호사이자 동지였던 노무현은 자신의 정부에서 목숨을 잃은 두 명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를 놓고 "죽음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열린우리당은 다수당이었지만 노동자의 편을 드는 건 촌스러운 '구식'이라 여겼고, 민주노동당은 힘이 없었다. 그렇게 노동자는 사회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유령'이 되어 갔다.
모두가 좌클릭을 얘기하는 지금이지만, 그 시절의 외면에 대해 솔직하게 사죄하는 정치인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은 정동영의 변신을 '꼼수'라 비난한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이들 중 누구도, 평생을 몸 바치고 마음 바친 회사에서 나를 쓰레기 취급 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 고3 아들보고 공부 열심히 해 수능 잘 보라 얘기할 수 없는 해고자 아버지의 먹먹함, 간신히 어렵게 안정된 직장을 구했다고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3년도 안 돼 짤렸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젊은 아들의 한숨에 귀 기울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정동영 의원님 선거 나가시면 내가 마이크 잡게 해 주세요"
▲ 3차 희망버스에 참석한 정동영 의원. ⓒ연합뉴스 |
그러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정동영 의원님 선거 나오시면 제가 '정동영 그런 사람 아니'라고 설명 좀 하게 저한테 마이크 주세요" 하고, 가족대책위원회에 속한 부인들이 "나는 자원봉사자 할 거야" 말이라도 스스로 나섰던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그의 역할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정치란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조용히 혼자 끙끙 앓는 사람들까지 보듬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용산참사가, 한진중공업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 내어야 한다. 정리해고 법제도도 고쳐야 하고, 자본의 무분별한 해외 이전으로 엉뚱한 노동자가 피해보는 일도 단속해야 한다. 설사 정말 어쩔 수 없어 해고되더라도 그것이 곧 '죽음'은 아닐 수 있도록 사회보장제도도 대폭 보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야 비로소, 그의 '쇼'가 일부가 아닌 모두에게 진심으로 여겨질 것이며 오늘 그의 '쇼'도 비로소 온전히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난 309일, 그의 '쇼'가 고마웠다. 그가 오래도록 힘 가진 '의원님'으로 남아, 키 작은 사람들을 위한 쇼를 벌여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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