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지난달 19일 칼럼을 통해 "내가 받은 몇 안 되는 언론 관계 상 중에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것이 '위암 장지연상'이다. 이제 나는 그 상을 반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게 됐다"며 "서훈 취소를 의결한 김황식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어보기나 했는지 묻고 싶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김 고문의 주장은 "장지연 선생이 한·일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가 됐다고들 하는데 나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 한 편만으로도 그분은 당대에 남을 항일지사였고 민족언론인이었음을 그 글의 맥박을 짚어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고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 하나만으로도 그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등에 수년간 기고한 친일 성향 글들을 상쇄할 수 있고, 나아가 건국훈장을 받을만 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건국훈장을 받은 고 장지연의 뜻을 이은 '위암 장지연상'을 받은 김 고문은 장지연의 서훈 취소 소식에 "명예"가 "땅에 떨어진" 심경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김 고문은 서훈 취소가 부당한데 대한 근거로 "서훈이 취소되기 위해서는 서훈이 있은 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서훈 당시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어야 한다. 그러나 장지연 선생의 공과는 이미 1962년 서훈 때, 또 2005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심사 때 밝혀지고 드러난 것"을 주장했다.
김 고문은 이어 "이것을 이제 와서 보훈처의 서훈심사위가 어느 민간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훈 박탈을 의결하고 국무회의가 거수기처럼 이를 받아들인 것을 보면 이 정부는 한마디로 멍청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아니면 좌파적 아니냐고 할밖에 달리 할말이 없다"고 이명박 정부의 '국가 정체성'까지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박성 글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을 지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편집자 주.
▲ 지난 4월 19일자 <조선일보>의 김대중 칼럼 |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친일행적이 확인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한 서훈취소를 두고 일부 언론이 문제를 삼고 있다.
논란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민족적 울분을 토로한 장지연에 집중되고 있다. 을사오적을 향해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자들,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라고 꾸짖으며 "오늘의 이일을 대성통곡하노라"고 했던 '그분'에 대한 서훈을, 그것도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민간단체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을 근거로 취소했으니 이는 '좌파'나 하는 짓이 아니겠냐고 하며 현 정부까지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사실여부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언론기관과 중진 언론인들이 제대로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왜곡 호도하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日 천황을 '영웅'이라 한 장지연이 '건국훈장'이라니"
너무도 상식적인 말이지만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균형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공로만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이는 외눈박이 역사인식과 다를 바 없다. 특히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서훈의 적정성을 따지는 공적심사는 매우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지난 시기 친일인사가 서훈심사를 맡거나 훈장을 받는 어이없는 일까지 있었기에 최근의 보훈처 공훈심사는 과거보다 훨씬 까다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특정 단체나 개인의 주장을 그대로 전용했다는 비난은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장지연의 경우도 사실 관계에 대한 엄밀한 검증을 거쳐 서훈취소 결정이 이루어졌다. 1910년 이전까지의 그의 행적은 매우 애국적이었다 할 수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된 것도 이러한 근거에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간행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1910년대 이후 장지연의 친일행적은 심의과정에서 모두 사실로 밝혀졌고 사법부 또한 사전의 수록 내용에 대해 객관성과 공정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유감스럽게도 1910년 이후 장지연의 행적과 활동은 '을사오적'을 향해 그렇게 준엄한 호령을 내렸던 바로 '그분'일까 싶을 만큼 친일로 얼룩져 있다. 숱한 부일협력의 흔적 가운데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장지연은 "신정(新政)을 시설한 이래로 구폐(舊弊)를 개혁하고 신화(新化)를 선포함에 있어 조선 구습의 풍속도 점차 개량 변천"(1915.1.1.)되었다면서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칭송했다. 1915년에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하여 해내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2576년간을…황통이 이어지고 있다. 만세일계(萬世一系)란 바로 이것"(1915.4.3.)이라면서 일본을 세웠다는 신무천황의 제일(祭日)을 맞아 특별히 글을 지어 바친다고 천황제를 칭송했다. 또한 그는 명치유신 때 일본이 "교린수호(交隣修好)하는 일로 사절을 파견"했지만 거절하여 조선이 자포자기에 빠졌다"(1915.4.22)고 일제의 침략을 옹호했다.
그의 곡필(曲筆)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 "동양의 패왕(覇王)이므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인이 제휴하여 장벽을 없애고 동제공장(同濟共仗)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면서 "일본은…조선과 물을 끼고 나뉘어져 있으나 국경이 이웃이고 인종과 문화 역시 상동(相同)"(1916.9.16.)하다고 하여, 일제의 한국강점 논리인 동종동문론(同種同文論)과 다름없는 주장을 하는 대목에서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외치던 비분강개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장지연상 수상자 곤혹? 순국선열을 생각하라"
그동안 일제시대 대표적인 항일언론인으로 공인되어 왔던 장지연에 대한 서훈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그 유족이 받았을 상심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0여회에 걸쳐 '위암 장지연상'을 수상한 이들 역시 곤혹스런 심경이었을 것이다.
사안의 중대함에 비례하여 국무회의에서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알려졌다. 그만큼 쉽지 않은 과정을 밟은 것이다. 정부의 발표는 이번 결정이 당사자들의 공적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드러난 행적까지 신중하게 검토한 결과라고 했다. 이 결정의 행간에는 설혹 그에게 친일혐의 적용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의 전 생애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독립운동가와 순국자에게 수여하는 국가 서훈을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고의 영예인 건국훈장 수훈자 속에 친일의 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는 서훈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순국선열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 등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번 서훈취소 결정을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으로 삼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위암 자신일 것으로 본다. 거론하면 할수록 민망스러운 일들이 더욱 회자될 수 있으니 말이다. 결코 후대에 태어났다는 '특권'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부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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