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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신자유주의=복지? 그럼 '삼성공화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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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反신자유주의=복지? 그럼 '삼성공화국'은?"

1.

한국사회에 '정의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무상급식', '복지', '공정사회', '민주주의' 같은 담론들은 '정의'라는 하나의 화두로 연결된다. 여기서 정의란 "사회공동체 속에서 평등한 인격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구성원의 권리"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헌법의 문제이고,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문제들을 놓고 한국사회에는 지금 일대 가치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치의 정치(value politics)가 한국정치의 무대 전면에 등장하였다.

'가치의 정치'라는 개념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당시 문국현 후보 진영을 통해 처음 등장하였다. 문국현 진영은 당시 '사람중심사회'라는 가치를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정치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문국현 진영의 실험은 주도세력의 이념적·조직적 취약성과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해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자멸하고 말았다. 그 때만 해도 진보진영 내에서 '가치' 개념에 대한 기본 이해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 흐름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한국사회는 이른바 "뉴타운 대박", "부자 되세요" 등 돈과 개발이 주류가 되는 '욕망의 정치'에 한없이 떠밀려 내려갔다. 사회에는 자살과 범죄, 몰염치, 소모적 경쟁, 권력과 연줄에의 집착 같은 현상들이 판을 쳤다.

이제 그로부터 3년이 지나갔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욕망의 정치'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욕망의 정치'와 '가치의 정치'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혼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 트렌드는 한국정치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선 당장 2011년부터 보수든 진보든 각 정치세력들과 차기 대권주자들은 나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면서 가치전쟁에 뛰어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치에 민감한 20-30대 세대집단을 향한 진군을 경쟁적으로 벌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가치전쟁은 이미 복지국가 논쟁으로 불이 붙었다. 뿐만 아니다. 한편에서는 '공정사회'라는 담론들이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복지국가 담론을 놓고 진보진영의 한쪽에서조차 상당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 놓고 환영해도 좋을 만한 긍정적 현상이다. 민주당이 최근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 등 복지국가노선을 전격적으로 발표한 것은 가치전쟁의 선수를 잡는 데에서 100%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해도 좋다.

그러나 가치전쟁을 치르는 민주당의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내부에서 누구는 증세 하자고 하고, 누구는 아니라고 하고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이 난무한다. 또 가치전쟁을 치르기 위한 큰 전략지도가 없다. 궁극적으로 정확하게 겨냥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이고, 전선을 어떻게 확장해 나가야 하는지 조감도가 없다. 지금 복지국가 담론을 확산시키는 데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제기한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일종의 모태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그 모태를 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데, 모태의 구조 자체부터가 취약하게 되어 있다. 시대정신에 대한 충분한 숙고, 이론체계 및 정치 전략의 정교성 문제에 많은 공백이 있다.

먼저 역동적 복지국가론이 과연 한국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가?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도전을 '신자유주의 양극화'라고 본다. 바로 그 신자유주의 양극화가 사회의 불평등을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역동성까지를 심각하게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지국가를 통해서 기본적인 출발선을 실질적으로 공정하고 평등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양극화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역동성을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복지를 핵심으로 양극화와 역동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보자는 취지이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역동성'(시장의 생명력)이라는 가치와 '복지'(탈상품화)라는 가치의 서로 상이한 개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개념 사이의 갑을관계는 분명히 '복지→역동성'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두 개념 사이의 갑을관계가 뒤집어져야 한다고 본다. 양극화가 한국사회의 핵심 문제인 것은 전적으로 맞다. 너무 급속하고 근원적인 양극화로 인해 한국사회의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고, 사람들은 안전과 현상유지를 선호하며 창의적 모험과 도전을 기피한다. 사람들은 실직할 우려가 없는 안정적인 직장만을 선호하고, 대학입학도 그에 맞춰 평생 실직할 우려가 없는 의대나 법대를 가기 위해 머리가 깨지는 경쟁을 벌인다.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 영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벽 높이기를 시도한다. 그 결과로 한국사회에는 계급·계층 간 이동가능성이 현저히 봉쇄되어 학력, 부, 권력의 대물림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기업가들의 행태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과감한 투자와 고용창출을 주도하는 기업가 정신이 쇠퇴하고 있다. 단적으로 1991~1997년에 설비투자율이 11.1%에 달했으나, 1998~2008년에는 2.5%로 급락하였다. 사회의 역동성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의 하나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다.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출산의향이 있어도 출산해서 자녀를 양육할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회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역동성이 심각하게 감퇴하고 있다. 혹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트렌드가 출몰하고, 생존의 각개전투가 처절하게 벌어지고 좌충우돌하는 이 사회는 너무 역동적이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모적 역동성이고, 죽은 살이 장기 전체에 빠르게 퍼져가는 역동성일 뿐이다.

이렇게 사회 전반의 역동성이 감퇴한 결과 한국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우선 접근하기 쉬운 지표로 보면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986∼1990년 10.1%, 1991∼1995년 7.5%, 1996∼2000년 5.4%, 2001∼2005년 5.1%, 2006∼2009년 3.0%로 나타났다. 그 결과로 한국의 GDP는 2009년 기준 세계 15위로 내려앉았고, 1인당 국민소득(GNI)은 54위로 계속 뒤로 밀리고 있다. 그와 함께 한국 국민들은 가난뱅이가 되어 가고 있다. 종신고용의 붕괴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해 중산층의 붕괴가 진행되고 2009년 말 기준 취업준비자, 구직단념자 등을 포함한 사실상의 실업률은 33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2009년 전국 가구의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 한국의 중산층은 1996년 68.5%였던 것이 2000년 61.9%, 2006년 58.5%, 2009년 56.7%까지 떨어졌다. '워킹푸어'(근로빈곤층)로 분류되는 비율은 2004년 17%에서 2009년 25.6%로 급증하였는데,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들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라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접근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거부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대신에 신자유주의가 한국에서는 특권적 과두지배동맹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정확하게 보자는 것이다.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란 권력·관료·재벌·주류언론·전문가 엘리트집단에 의한 폐쇄적이고 특권적인 동맹구조를 말한다. '삼성공화국', '현대차공화국', '검찰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은 그것을 대중적 담론형태로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란 권력·관료·재벌·주류언론·전문가 엘리트집단에 의한 폐쇄적이고 특권적인 동맹구조를 말한다. '삼성공화국', '현대차공화국', '검찰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은 그것을 대중적 담론형태로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프레시안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세계화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통치양식이다. 과거의 권위주의체제가 정치적 독재정권을 정점으로 하고 재벌·관료·언론·전문가 엘리트들이 수동적 지배동맹의 일원이었다면, 지금은 사회의 과두엘리트들이 능동적 지배자로서 통치한다. 그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서로 밀어주고 댕겨주는 방식으로 이권을 공유·배분하면서 끈끈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국가권력을 포획하여 한국사회의 온갖 특권·특혜를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거대한 식탐을 가진 포식자이며, 엄청난 속도로 한국 사회를 먹어 치우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와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는 서로 다른 사회 범주이다. 신자유주의는 용어 자체에도 내재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의 이념적·정치적 토양 위에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단순한 반동과 구별되는 점은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법치라는 자유주의적 원리들을 반동적인 목적과 결부시키는 방식에 있다. 그래서 영·미국에서 보수파가 집권하든 진보파가 집권하든 신자유주의적 시장영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는 외형적으로 규제완화, 감세, 민영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기제를 동원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론이 불법, 편법, 카르텔, 국가사유화와 같이 자유주의의 본질적 내용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비교정치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발현 양식은 매우 판이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유형 속에는 대처·레이건 같은 신보수주의, 블레어·클린턴·슈뢰더 같은 자유·진보주의, 페루 후지모리·아르헨티나 메넴 같은 반동적 급진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차이들이 내포하는 정치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현상을 분석할 때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인식하되 그 내부에 다양한 정치적 차이들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양자의 개념을 구별해서 본다고 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개념 중에서 한국 사회를 설명해 주는 더 본질적이고 상위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자기 이익에 맞게 변형시켜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를 더 본질적인 상위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념체계에 입각하여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를 타파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를 한 두름으로 꿰어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권적 과두지배체제라는 개념은 사회적, 국가적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잘 설명해 주는 개념이 바로 '헤게모니'(hegemony)라는 것이다. 그람시에 의하면, 헤게모니란 한 사회의 지배 집단이 자신들만의 좁은 이해관계를 넘어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이해관계와의 협상·조정에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접합시켜 대중들의 동의를 획득하고 사회 전체의 유기적 집단의지를 만들어 낼 때 달성되는 지배능력이다. 그런데 역사상의 강대국들이 쇠락해 가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 바로 이 헤게모니적 지배력의 상실이다. 바로 지배층이 장기적 지배이익을 고려하지 못하고 근시안적 이익에만 집착하여 과도한 탐욕을 표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고착되면 특권적 과두지배체제가 되는 것이다. 과두지배체제의 형성은 국가의 원활한 혈액순환과 근육운동을 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지배·축적 기반마저 탕진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극단적 증오와 분노, 갈등과 쟁투가 만연하게 되어 국가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키케로와 마키아벨리가 로마의 힘이라고 불렀던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시민적 덕성'을 기반으로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고대 로마공화국은 어떻게 몰락하였는가? 그것은 귀족과 평민의 분열·대립, 귀족의 탐욕과 시민적 덕성의 부패가 맞물린 결과였다. 그리고 그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패권을 장악하려는 대중선동정치가의 등장과 과두지배체제 형성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경제적 기초와 연관되어 있었는데, 전쟁과 정복에 의한 노예의 증가와 대농장(라티푼디움)의 확산, 그에 따른 자영농의 몰락,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사유를 금지하는 법의 사문화, 귀족들의 정복으로 획득한 점유지의 사유화, 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증대, 도시빈민들의 불만 고조, 혼란과 소요, 무지와 방종, 시기심과 변덕의 결과였다. 특히 귀족들은 그들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느낄 때 계급적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전통 관례나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때로는 헌정중단, 암살, 집단살해의 음모를 꾸미기조차 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지배층의 탐욕이 장기적으로 바로 그런 상태를 향해 치닫고 있다. 한국은 거의 약탈국가(predatory state)의 문 앞까지 깊숙이 전진해 나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신성한 사회계약을 파괴하고, 그에 근거한 민주적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훨씬 더 중대한 범죄적 행위이다. 멀리는 만민공동회와 3.1운동·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헌법의 유구한 전통은 민주공화국에 입각한 권리를 사회계약 문서로 표현해 놓았다. 4월 혁명과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 속에서 헌법적 가치는 시민의 자존과 권리를 수호하고 회복하려는 운동의 최상위 깃발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역코스의 헌정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우리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최소한으로 누리고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재벌·특권층의 지배에 의한 양극화로 부의 편중과 삶의 질 하락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고, 그 속에서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은 사실상 사문화되어 가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절반에 육박하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가 근로의 권리(헌법 제32조1항)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봉 5000만 원인 직장인이 매월 87만 원씩을 저축한다고 했을 때 서울의 아파트를 사는 데 58년이 걸리고 강남의 아파트를 사는 데 89년이 걸린다면, 이걸 보고 어떻게 "국가가 모든 국민의 쾌적한 주거생활을 위해 노력"(헌법 제35조3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거기에다가 우리는 경제규모 세계 15위라는 나라에서 일자리와 집값 때문에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말살당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헌법상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고 짓밟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특권적 과두지배동맹체제인 것이다. 한국의 과두지배체제는 재벌·권력·언론 엘리트들 간의 결탁을 통해 정부정책을 조작함으로써 연간 수십조 원을 약탈해 간다. 재벌총수 일족은 적은 지분으로 수십 개 계열사 경영을 지배하면서 탈세, 탈법증여, 부당내부거래, 경영권 승계를 자행한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4조5000억 원에 이르는 차명재산을 보유했지만 상속세를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프리라이더>라는 책의 저자인 선대인에 의하면,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은 수조 원대의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16억 원을 달랑 세금으로 냈을 뿐이다. 자본금 12억 원으로 설립된 현대차그룹 계열사 글로비스는 시가총액 6조 원으로 급성장했고,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은 30억 원을 투자해서 무려 2조 원을 벌었다. 이것이 어떻게 합법적인 방법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이들 재벌집단들은 국가로부터 대대적인 특혜와 지원까지 받는데, 최근 경제개혁연대가 기업들이 부담하는 실효법인세율을 추정해 본 결과에 의하면, 삼성전자의 경우 2007년 15.6%, 2008년 13.3%, 2009년 11.0%의 매우 낮은 세율을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법정 법인세율이 2007년과 2008년 25%, 2009년 22%였음을 감안할 때, 이는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대기업에 얼마나 막대한 특혜를 지원하고 있는지를 엿보게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04년 이후에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의 실효법인세율이 더 높게 추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재벌대기업들이 수요독점적인 하도급구조를 이용하여 중소기업을 약탈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OECD국가 중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비정규직 비율 역시 결국 재벌대기업들의 지배전략에 의한 소산이다. 그러면서 실질임금의 전반적 수준에서 지속적 저하가 일어나 왔다. 이 같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는 내수기반을 약화시키고 노동력의 질을 황폐화시켜 국가 전반의 역동성을 떨어뜨려 왔다. 그리고 하층집단의 생활 불안정, 노동력의 폐질화로 인한 공공이 지출해야 할 불생산적인 사회적 복지비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복지비용의 분담 및 복지수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어 왔다. 그런데도 재벌과 특권집단들은 복지국가가 되면 마치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2.

지금 한국 사회는 국가구조의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전환(turning)이 불가피한 시점에 도달해 있다. 그런데 국가구조의 개혁방향을 세우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인 진단에 입각한 과학적 해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국가비전은 양극화와 역동성의 감퇴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에 일차적인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고리의 중심에 있는 특권적 과두지배동맹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정치 전략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요 공격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서로 성격이 다른 세 가지 가치의제들이 등장해서 서로 중첩·경합하고 있다. 바로 민주주의(democracy), 공정성(fairness), 복지(welfare)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와 규칙의 확립, 참여와 토론의 활성화에 관한 문제들이고, 공정성은 건전한 시장경제질서, 건전한 경쟁규칙, 기회균등의 보상원칙을 실현하는 문제이며, 복지는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의 보장, 품위 있고 윤택한 삶의 질에 대한 욕구에 관련된 문제이다. 이 세 가지 가치의제가 한국사회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 가지 의제는 당연히 객관적 현실에 입각하여 제기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것도 배제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의제를 어떻게 한국사회의 현 단계의 성격과 요구에 맞게 유기적으로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 접근의 문제이다.

이에 필자는 '민주주의'를 몸통으로 삼고, '공정성'과 '복지'를 양 날개로 하는 '삼각전략'(triangle system)의 정치노선을 제안하고자 한다. 특히 민주주의 담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는 공정사회와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이다. 민주주의는 마이클 산델이 "의견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의 1단계"라고 말한 것처럼 공정사회의 필수조건이다. 또 민주주의는 복지국가에 선행하는 조건이다. 현대사회에서 복지국가는 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고, 민주주의가 결여된 복지국가는 권위주의나 심지어는 파시즘으로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인격)들 간의 공정한 협력체계"라는 개념을 구현하는 것에 있다.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의지와 권익 실현에 기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롤즈(John Rawls)가 말하는 '정의로운 절차'라는 개념과 상통하고,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들 간에 체결된 사회계약의 문서적 표현으로서의 헌법적 권리로 구현된다. 그리고 정의로운 절차로서의 헌법적 권리는 "법 앞에서 만인평등"이라는 '민주적 법치'(rule of law)의 이념과 상통하는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평등"이라는 이 원칙은 특권적 과두지배체제의 숨통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특권적 과두지배체제의 본질이 바로 민주주의 정신의 기반 위에 서있는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벌대기업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비자금조성, 편법상속, 탈세, 횡령, 심지어 치밀한 기획 아래 국가권력을 포획하여 사유화하려는 시도, 헌법에 보장된 노조결성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행위, 중소하청기업의 기술을 강취하는 행위,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상 불법적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불법적 범죄를 통해서 재벌들은 황제 행세를 할 수 있고, 경영권을 세습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재벌들이 권력·관료·언론·전문가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불법로비를 하고 그들과 단단한 그물망을 형성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몸부림을 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원리나 제도도 '헌법적 권리, 법치'의 원리 위에 설 수 없으며, 그것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통제하는 상위의 원리가 된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행태는 그 같은 재벌집단의 특권적이고 불법적 행태를 견제하고 징벌하기는커녕 그에 굴복하거나 심지어는 암묵적 내지 노골적으로 결탁해 왔다. 검찰·법원·정책관료가 재벌을 비호해주고, 재벌은 전관예우 등 각종 루트로 그들의 뒤를 봐주는 부정한 결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간단하다.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인 양극화와 역동성의 감퇴로 인해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법을 지키게 만들면 된다. 민주적 법치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면 된다. 기업집단법을 제정하여 재벌총수가 경영책임을 지도록 하고,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의 헌법상 권리를 말살하지 못하도록 하며, 탈법증여·비자금 조성에 대해서는 미국처럼 수십 년의 징역을 살리고, 이들과 관료·권력엘리트 사이의 결탁을 금지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법을 지키도록 하면 재벌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소득양극화 문제도, 복지 빈곤의 문제도 주요 부분은 다 해결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그 같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독재 권력의 타파를 핵심으로 하는 '선거민주주의'를 뛰어넘는다. 선거민주주의 또한 "정부의 통치행위에 대한 대중의 통제"라는 민주주의의 본원적 의미를 실현하는 기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결코 작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순수하게 절차에 관한 권리만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적이며,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선출된 정부의 통치 결과에 대해서 어떤 (사법적·경제적)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소주의적(minimal)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절차적 성격을 갖지만, 사회적 강자에 대한 엄격한 법치의 적용을 통해 "공정한 협력"을 통해 체결된 헌법적 권리의 실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민주주의를 넘어선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강한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강한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특권집단들에게 법치를 강제할 수 있는 '강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같은 '강한 국가'란 권위의 원천이 시민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시민국가'(civil state)이다.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기반 위에서 발달한다는 사고와 상통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총체적 시대역주행, 즉 민주주의의 퇴행, 양극화의 심화, 산업의 약화와 일자리의 소멸, 사회권(social right)의 피폐 등 이 모든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과두지배연합의 탐욕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세력연합이 붕괴된 데 있다. 단적으로 한국에서 노동정치의 붕괴는 사회적 세력불균형 문제의 현주소를 핵심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노동조합조직률 장기 추이를 보면 1980년 21%에서 2009년 현재 10.1%까지 하락하였다. 노동조합 조직률의 하락으로 대변되는 노동정치의 약화는 실질임금 수준의 전반적 하락 속에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상대적 격차가 확대되고 노동운동이 균열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미국의 경우와 비교 분석해 보았을 때 보다 명징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 독점기업들이 특권적 사회문제집단으로 등장했던 1920년대에 노동조합 조직률은 20%대 중반에 머물렀다. 그런데 1930년대 대공황 속에서 결코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던 루스벨트의 뉴딜개혁을 거치면서 노동조합 조직률은 30% 중반까지 상승했다가 그 후로 꾸준히 하락하여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열풍의 도래와 함께 10% 미만으로 추락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한국에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특권적 과두지배동맹체제의 등장, 시장경제질서의 왜곡, 다수 대중의 삶의 질의 피폐 같은 문제들의 본질은 결국 민주적 세력균형의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강한 민주주의를 만드는 원동력은 강한 시민사회를 재건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고 심대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도 제도정치 속으로 시민적 동력의 투입과 반영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사회의 동력이 고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촛불시위나 6.2지방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시민사회는 일정하게 잠재적 동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또한 새로운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생협운동, 공동육아모임, 작은 도서관운동모임, 시민의식에 입각한 각종 동호회, 소셜네트워크, 사회적 기업 등 새로운 형태의 진보적 시민사회가 지속적이고 활발하게 출현해 오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솟아오르는 힘들을 조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가치, 전략, 리더십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정치 전략에서 핵심 방향은 과두지배체제의 특권적이고 불법적 결탁구조를 부단히 폭로하고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조직하는 것이 일차적이고, 다음으로는 이에 입각하여 대중의 실질적 삶을 개선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는 정책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권리보장 강화, 근로자파견법의 제한 내지 폐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 인정범위 확대 등 대중의 실질적 권리를 증대시키는 정책들과 대중의 참여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알기 쉽게 근사한 역사적 모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뉴딜연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3.

그러면 이쯤해서 진보진영의 주요 정치담론인 복지국가론이나 공평국가론 등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글머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떨어진 과제의 핵심은 대중의 가슴 속에 불고 있는 정의의 열풍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의의 열풍을 정치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대중의 분노가 뿌리를 박고 있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크고 정확한 진단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회자되고 있는 복지국가론의 현실 진단은 한국에서 사회적 불의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 특권집단의 과두지배체제가 등장하고 있는 이 현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겨냥하여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비추어 볼 때 복지국가론은 커다란 허전함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논리구조에서는 원인과 해법이 체계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필자는 '복지국가'라는 용어에 대해 크게 거부감은 없다. '사회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복지국가'와 '정치담론으로서의 복지국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담론으로서의 복지국가는 대중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슬로건으로 가져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가치와 정책의 콘텐츠로 들어가서 볼 때, 그 정치적 의미가 과대평가되거나 과대 해석되는 현상들이 보이는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궁극적인 핵심은 결국 '소득과 자원의 재분배'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부유세'는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다. 재분배는 서구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①전쟁 과정에서 인민의 희생에 대한 보상과 전후 사회경제질서의 재건, ②공산혁명의 위협이라는 조건을 배경으로 계급타협에 기초한 '누진적 증세'에 대한 합의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이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사회정의(social justice)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한국에서도 소득과 자원의 재분배는 갈수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일정부분 담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한국에서 정의의 핵심을 찌르지는 못한다. 재분배의 논리는 "네가 많이 벌었으니까 많이 내고, 나는 조금 벌었으니까 덜 내서 그걸로 다 같이 평등하게 누리자"는 것인데, 한국사회의 특권적 지배동맹체제에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벌 해체"라든지, "자본주의 반대"라든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적 주장을 펴지는 않지만, 적어도 "법 앞에서의 평등"을 위배하는 일체의 사회현상과 구조에 대해서 관용을 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의 현 단계에서 정의는 "세금의 적정하고 합리적 배분을 둘러싼 계급타협"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자유주의에 대한 철저한 태도야말로 때로 복지국가론이나 사민주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선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과 '전면적 복지'라는 개념도 엄밀하게 구분해서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면적 복지가 '잔여적 복지'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복지수혜계층의 범위를 둘러싼 개념이라면,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은 '시혜적 복지'에 대립하는 것으로 사회가 복지의 대상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에 관련된 개념이다. 그렇게 보면 보편적 복지는 반드시 증세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 수 있게 된다. 보편적 복지에 담긴 본질적 이념은 "모든 개인이 평등한 인격으로서 대우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정책관리의 대상인 시혜적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하는지"의 가치문제에 직결된다.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온 '무상급식'도 그것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기초하여 전략 방향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친환경 무상급식에 대한 여론의 폭발적 반응에는 다양한 맥락이 있겠지만, '복지'라는 쪽으로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모든 개인이 평등한 인격으로 대우받으며 기회와 번영을 누리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가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같은 정의의 가치가 갖는 소구력은 보편적이다. 이미 우리 사회가 '물질적 자원의 획득'이나 '실용'이라는 가치의 차원을 넘어 '자아실현'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발전의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필자는 최근 역동적 복지국가론의 관점과 대립관계에 서있는 '공정'(공평, fairness) 담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공정의 개념은 매우 탄력적이다. 과연 무엇이 공정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무수한 논쟁이 존재한다. 어떤 이는 '기회균등'을 공정의 핵심으로 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실질적 조건의 평등으로까지 공정의 범위를 확대한다. 기회균등에 더해 '차등의 원칙'이 실현되는 사회를 공정함이라고 보는 롤즈(John Rawls)의 주장이 그것이다. 대체로 기회균등으로서의 공정은 시장경제 영역에 관련된 가치이며, 정의로운 배분의 문제로까지 확장된 공정은 민주적 정치생활의 영역에 관련된 가치이다. 이렇게 볼 때 최근 한국에서 일부 논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공정' 담론은 대체로 전자의 의미, 즉 "능력과 노력에 비례하는 보상원칙"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공정 담론을 평가해 보면 이렇다. 우선 한국에서 공정성의 가치는 지난 민주정부에서 시도되었으나 제대로 착수도 못해 보고 좌절해 버린 '건전한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위한 개혁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적이고 절박한 과제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그것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특권적 경제 질서의 타파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정의의 가치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점에서 공정성의 가치는 민주주의 담론의 문제의식과 상당한 친화성을 갖는다.

하지만 공정성의 가치는 다소 소극적이고 협소한 가치라는 한계를 내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적 정의의 기준은 시장적 정의보다 더 적극적인 공정의 개념을 요구한다. 적극적인 의미의 공정이란 "모든 개인들이 하나의 인격으로서 '평등'한 대접을 받으면서 서로 협력해 나가는 체계=민주주의사회"에서 달성된다. 보상평가시스템에서 '기회균등'이나 '노동의 양·질 비례의 원칙'은 민주주의를 유지해 나가는 데에 부족하다.

필자는 "사람중심사회"라는 가치야말로 적극적인 공정개념을 실현하는 보상원리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 대한 보상이 기회균등이나 노동의 양·질 비례의 원칙에 의한 보상보다 훨씬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정책론으로 풀면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국민소득(NI)에서 노동 대 자본의 상대적 보상구조를 보면, 2009년 기준 노동에 대한 보상률은 53.0%로 미국 63.4%, 일본 72.4%에 비해 훨씬 낮다. 반면에 자본에 대한 보상률은 33.8%에 달해 일본 24.0%, 미국 19.1%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높다. 경제활동으로 생성되는 국민소득 보상이 기업 등에 집중되고, 노동력을 투입한 국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적게 배분되는 것이다. 추세로 볼 때도 노동의 상대적 보상구조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것은 재벌대기업이 자본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후진적 지배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일반적으로 노동에 대한 보상은 노동의 양·질에 의한 비례 기준을 초과한다.

물론 자원의 보상 배분이 각 집단 간에 불공평하게 이루어져 있는 구조는 바로 잡아야 한다. 이를테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간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성세대와 미래세대 간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보상구조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동료시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상대적 지위를 보장받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런 왜곡된 구조를 만들어낸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주적(主敵)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의 근원은 재벌대기업이 민주화 이후의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대응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분할지배를 추구한 데 있다. 정규직 고용을 최소화하면서 초과근무 등을 통해 상대적 고임금을 보장하면서 파업과 저항을 줄이는 한편, 생산의 많은 부분을 외주화해 하도급가격을 압박해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고용확대와 저임금을 강요했던 것이다.

필자는 상대적 고임금자라고 해서 그 다수가 특권을 누리는 노동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전형적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는 '내 집 가진 정규직'이라 해도 미래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나라이다. 자녀 교육비 때문에 노후 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직장을 잃거나 정년퇴직하는 순간, 소득이 급격히 줄면서 저소득층으로 추락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평탄한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없다. 무상급식, 보편복지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것도 바로 그런 중산층들의 내면적 불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지표 상으로 임금소득자의 상하를 망라해서 볼 때 실질임금 수준 및 노동소득분배율의 전반적 저하가 일어나고 있는 추세는 그런 문제와 상통한다.

따라서 노동내부의 각 집단 간에 보상체계의 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질임금 수준의 전반적 저하 추세를 역전시키는 노력과 함께 유기적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과도하게 사람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소외시키는 특권지배체제의 질서구조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겨냥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협소한 공정성의 기준으로 누구는 끌어올리고 누구는 끌어내리는 식으로 보상체계를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론을 주창하는 쪽에서는 특권지배체제보다 노동 내부의 상대적 기득권층에 공격의 초점을 맞춘다.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고임금자가 먼저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는 기적을 창출한다면 역사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의 정치 전략은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상적이긴 한데 참으로 심각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특권적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움직이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상대적 고임금자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결코 노동귀족이 누리는 특권적 초과이익이 아닌 처절한 생존게임에 불과한 조건에서, 그들의 것을 빼앗자고 하는 순간 한국사회는 특권지배층이 심판을 보는 가운데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처절한 혈투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노예 검투사들이 벌이는 사투처럼 말이다. 필자는 당연히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권리의 평등이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고, 연대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같은 연대는 특권적 지배체제에 대한 공통의 분노를 통해서 형성된 공감대를 전제조건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좀 난해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정치철학적 원리로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문제를 아주 간략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진보우파나 중도세력의 주의주장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좌파주의자들도 같이 고민하고 흡수해야 하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개인'과 '자유'의 문제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화두이고, 특히 새로운 진보의 성장 동력으로 커 나오는 20-30대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좌파주의자들 역시 1차 대전 이후 유럽의 사민주의자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사고를 받아들였듯이, 자유주의의 진보적 재구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치철학에서 근본적인 출발점은 '인간'이다. 인간 자신이야말로 선의 궁극적 기준이다. 그런데 그 인간은 '효용적 인간'이나 '권력적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 인격으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정의감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에서는 무엇보다 민주주의 문제가 핵심 본령이 된다. 그리고 여기의 민주주의에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정한 협력"을 실현한 상태라는 점에서 '평등'의 가치가 특별히 강조된다. 그래서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 롤즈 같은 이는 자신의 자유주의가 평등의 이념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에 포함된 다양한 이념들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하였다고 본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이기도 한데, 이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의 불완전성을 통제하는 정의로운 경제제도에 대한 사고와 맞물려 있다. 그것은 시민적 연대의 힘에 입각한 세력균형의 제도적 기초 위에서 경제구조를 재구성하는 시민경제발전모델을 지향한다. 즉 시민들의 참여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소비자, 시민단체, 전문가, 여론 등 시민사회세력이 사업자단체를 감시하고 견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책임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긍정적 발전을 이끌어 내는 사회경제발전모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력균형에 의한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경제를 접맥시키고자 했던 뉴딜개혁의 핵심 원리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치철학은 자본주의를 원천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체제로서 사회주의를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나 사민주의 사상과 다르다. 그러나 진보적 자유주의는 사회주의, 사민주의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들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셸던 월린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사람은 자유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그들이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노동당 블레어나 사민당 슈뢰더에 비해 더 보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려야 할 것"이라는 박동천 교수의 지적은 이런 의미에서 시사적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국가가 개인들에게 도덕적 지침을 하달하고 지도할 수 있다는 발상을 거부한다는 맥락 위에서 복지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앙집권적 국가를 통한 부의 재분배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 시민사회의 지반 위에서 국가를 재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시민국가론'의 문제의식에 맞닿는다. 그래서 아마르티아 센은 복지를 "개인의 자유와 능력을 확대하는 과정"으로서 사고하고, 롤즈는 기존의 "중앙집권적 국가의 강제적인 연대에 의한 복지" 대신에 "시민사회의 다양한 커뮤니티를 통한 자치, 분권, 소통 위에서의 자발적인 연대"의 원리를 통해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자기통제, 자기책임성을 갖는 사회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복귀"시키는 복지의 실현에 정치철학적 사고를 집중한다.

바로 이상과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문제의식과 정치철학적 특징들이 오늘날 전통적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를 넘어 미래로 가고자 하는 세계사적 시간대의 조건과 '개인'과 '자유'의 트렌드를 민주주의와 진보의 급진주의적 지평 위에 접맥시켜야 하는 한국사적 시간대의 조건에 필요불가결한 화두거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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