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400여 명에 연매출 2000억 원에 달하는 부산의 D조선은 지난 18일부터 정규직원과 협력업체 직원들간 통근버스 자리를 분리했다. D조선이 지난 16일 통근버스에 배포한 <통근버스 좌석지정제 시행 안내>문에 따르면 45인석 버스의 앞쪽 자리(1-23번)는 정규직에게, 뒤쪽 자리(24-45번)는 비정규직에게 구분해서 앉도록 했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가 농성중인 강남성모병원은 지난 달 29일 "주의사항 - 용역(파견)직원 및 공용식권은 병원총무팀에서 판매"라는 직원식당 이용공고를 냈다. 정규직은 식당에서 식권을 마음대로 사지만 식당이 혼잡할 수 있으니 비정규직은 '끼니제한'을 받으며 병원 구석에서 타가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이같은 차별 조치들이 '노사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묵인 내지 방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고용불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노갈등을 조장하는 분할통치 방식에 호응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지난 외환위기 직후에도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측과 비정규직 우선 해고 등 차별강화 조치에 합의한 바 있다.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가 이같은 상황을 미국의 흑백분리 정책에 비유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 이같은 좌석분리제도는 '노사협의'를 통해 결정됐다는 점에서 충격을 더하고 있다ⓒ금속노조 |
미국의 버스 흑백좌석 분리에 대한 투쟁사
"1955년 12월 1일, 어느 추운 겨울 오후, 로자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앨라배마 주도 몽고메리의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마흔 두 살의 재봉사였던 이 여성은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만원 버스에 올라타, 중간께 통로쪽 좌석에 앉았다. 근처에는 다른 흑인 승객 세 명이 자리 잡고 있었고, 바로 앞줄까지는 시의 인종분리 법규에 따라 백인 전용으로 지정된 좌석들이었다. 이 백인 전용칸의 빈자리들은 순식간에 들어찼고 어느 정류장에서 한 백인 남자가 올라탔을 때는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버스 운전사는 고개를 돌려 이 여성과 그 곁에 앉은 세 흑인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강요에 가까운 명령조였다. 그러자 다른 흑인 셋은 순순히 일어나 좌석을 비우고 버스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섰다. 그러나 이 여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운전사가 백인 승객한테 자리를 내주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이 여성은 '노'라고 대답했다. 그 '노'라는 한마디에 이 여성은 체포됐다." (마틴 루터킹, 마셜 프래디)
공판은 12월 5일 월요일, 이 날을 기점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다른 동료 민권 운동가들은 버스 보이콧 운동에 나서기로 결의 한다.
"버스보이콧 운동이 있기 전에는 버스운전사들이 흑인들을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고 부르는 일도 많았다. 흑인 승객들은 앞문으로 타서 차비를 내고 나면 다시 내려서 뒷문으로 가서 버스에 타야 하는데, 차비를 내고 나서 뒷문으로 올라타기 전에 버스가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일은 빈 좌석이 있는데도 흑인이기에 서서 가야 하는 경우였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카풀 작전에서는 무려 2백명이 넘는 손수 운전자들이 자원해 하루 약 2만번 꼴로 봉사 운행하는 실적을 기록한다. 45군데의 차량 대기소와 42군데의 합승 정류소 목록이 흑인 사회에 배포됐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월요일 아침, 킹 목사와 아내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는 앞으로 전개될 역사적 사건의 첫장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준비를 갖췄다. 마침 집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킹 목사는 창문에 서서 항의 운동의 시작을 지켜볼 수 있었다.
"서막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30분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내가 '여보, 여보 빨리 와 보세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 서자, 아내가 기쁜 표정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버스를 가리켰다. '여보, 버스가 비어 있어요.' 나는 눈을 의심했다. 우리집을 지나가는 사우스 잭슨 노선은 몽고메리 내에서 흑인 승객이 가장 많은 노선이었고, 그 중에서도 첫차는 언제나 만원 이었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오전 9시 30분, 즉결 재판소에서 재판이 열렸다. 흑백 분리에 관한 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시 재판이 시작됐다. 유죄였다. 벌금 10달러와 재판 비용을 합쳐서 총 12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파크스 부인은 항소를 재기했다. 이 사건은 흑백분리 법률을 위반한 죄로 흑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날 밤, 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결단코 이곳 몽고메리에서 일하고 싸울 것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는 날까지!" 킹 목사의 연설이었다.
시민들의 결의문 두 번째 항목은 이랬다. "(2) 승객들은 버스에 승차한 순서대로 안되, 흑인 승객들은 버스 뒤쪽에서부터 앞쪽으로 차례대로 앉고, 백인 승객들은 버스 앞쪽에서부터 뒤쪽으로 차례대로 앉는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1955년 12월 5일은 그렇게 저물었다. 1956년 1월 26일 시 당국은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킹 목사를 교통법규 위반으로 구금한다. 2월 21일에는 몽고메리 대배심이 킹 목사 등 민권 운동 지도자들을 승차거부 금지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죄로 기소한다. 보이콧 운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굴욕적인 태도로 버스를 타느니 존엄을 지키며 걸어 다니는 것이 훨씬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영혼을 혹사하느니, 다리를 혹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우리는 몽고메리 시내를 걸어 다니기로 결정했습니다. 쇠약해진 불의의 벽은 밀려드는 정의의 망치에 두들겨 맞아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3월 22일, 법원은 킹 목사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나는 웃으면서 법정을 나섰다. 나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내 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나의 죄는 사람들을 불의에 항거하는 비폭력적인 운동에 참여시킨 죄이며, 사람들에게 자기 존중과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주입시킨 죄이며, 사람들이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생명권, 자유권, 그리고 행복 추구권을 누리게 되길 갈망한 죄였다."(마틴 루터 킹 자서전)
승차거부 운동이 천신만고 끝에 놀랍게도 1년을 채울 즈음이었다. 몽고메리 시 당국은 마지막 숨통을 짓누르는 통렬한 일격을 날렸다. 카풀 사업이 시 운송 사업 법규상 무인가 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주 법원에 카풀에 대한 금지 명령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1956년 12월 13일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이러니컬한 날이었다. 바로 이 날, 몽고메리 법원은 카풀 금지를 결정했다. 하지만 미 연방 대법원은 버스 내 흑백분리를 결정한 앨라배마주 조례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1956년 12월 20일 마침내 버스 내 인종분리를 금지하는 명령이 몽고메리에 내려졌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킹 목사 집에 몰려들었다.
"우리가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카메라 촬영이 시작됐고, 기자들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이윽고 버스가 다가와서 문이 열렸다. 내가 버스에 올라서자 버스 운전사가 상냥한 미소를 띄며 인사했다. 내가 요금함에 요금을 넣자 운전사가 말했다.
'킹 목사시죠?'
'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당신을 태우게 되다니 무척 기쁩니다.'
나는 운전사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웃음 띈 얼굴로 좌석에 앉았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정규직과 비정규직 분단국이 된 우리나라
2008년 12월 18일 부산의 한 중견 조선업체는 "정규직 직원의 좌석 위치는 1~23번, 협력업체 직원은 24~45번"이라는 내용의 통근버스 좌석지정제 시행 안내문을 공지했다. 직원들의 통근버스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자리로 분리해 운행하겠다는 것이다.
당초 이 회사의 통근버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 없이 먼저 탄 사람이 순서대로 앉았다. 그러나 정규직 직원들이 불만을 제기하면서 사측과 정규직 노조가 노사 협의를 통해 정규직 직원에게 앞자리를 배정하는 좌석 분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오늘(3일) 아침 이 소식이 실린 경향신문 1면 기사를 보고 한동안 멍했다. 초등학교 2학년 딸 아이가 읽고 있던 로자 파크스의 위인전이 생각났다.
"로자 파크스 위인전 좀 찾아 줄래?"
"아빠 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설명을 해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서로 한동안 말문을 닫고 있었다.
좌석 구분이 합헌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수치스런 미 연방대법원 판결로 기록되는 플레시 (plessy v. Ferguson 1896) 사건에서 할란 (John Marshall Harlan) 판사가 8대 1로 소수의견을 냈다.
"우리 헌법은 색맹(color-blind)이며, 시민들 사이에 계급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정하지도 않는다." (미국법의 역사, 로렌스 M. 프리드만)
우리는 분단국이다. 남북 분단뿐 아니라, 영호남 분단국이고, 빈부 분단국이다. 여기에다 이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단과 차별마저 인정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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