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금융자유화'는 말하지 않을까
정부가 오늘(8일)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은 캐슬린 스티븐슨(Kathleen Stephens) 신임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미FTA는 미국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동북아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국회에 제출한 '제안이유'는 이렇다. "무역 및 투자를 자유화하고, 서비스 및 정부조달시장 개방 폭 확대,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등 경제전반에 걸친 제도의 선진화를 통하여 경제통상관계를 한층 확대·강화하려는 것."
왜 '금융자유화'를 뺐을까?
'선비준'을 통한 '압박론'의 허구성
정부와 여당은 입을 맞춰 '선비준'을 통한 '압박'을 말한다. 솔직하고도 유치하게 얘기해보자. 과연 미국이 우리의 선비준에 압력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는가? 미국이 스스로의 판단을 미뤄두고 우리의 선비준에 구속될 수 있을까? 오로지 '한미 우호'라는 관점에서 미국의 국익적 판단을 소홀히 할 수 있을까? 미국의 신임 대통령과 민주당 주도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새 의회가 그렇게 만만할까?
다른 나라가 먼저 FTA 협정을 비준했다 해도 미국 의회의 스케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역사적 선례다. 파나마와 콜롬비아가 그랬다. 미국은 두 나라가 선비준한 FTA협정안을 사실상 파기하고 재협상을 관철시켰다. 우리가 먼저 하면 미국이 '미안'한 마음에 따라하게 되고, 재협상에 대한 논의를 잠재울 수 있다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한 가지 더! 일단 동의안은 통과시켜놓고 미국의 비준에 대한 볼모의 수단으로 25개의 이행법률안을 이야기한다. 미국이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법안 처리를 하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이다. 어떻게 우리의 25개 법안과 미국의 비준동의가 연계될 수 있는가? 동의안은 동의안으로 연계되고, 법률은 법률로 연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서로 동시이행의 의무가 있다면 동시이행의 대상은 당연히 같은 수준으로 관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관련성은 동의안 대 동의안이다.
한가지만 더! FTA 동의안은 통과시켜놓고 법안은 처리하지 않겠다고?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FTA 동의안도 하나의 법률이 된다. 그러면 하나의 법률은 통과시켜놓고 나머지 25개 법률은 서로 모순되는대도 그대로 두겠다고? 당연히 개정을 해야 되는데 개정하지 않겠다고? 얼마나 졸렬한 발상인가? 차라리 동의안도 처리하고, 법안도 전부 다 처리해두되 발효시기를 '미국의 비준 이후'로 미뤄두는 게 정상적인 법처리 절차 아니겠는가? 편법이 편법을 낳는다.
압박론의 핵심은 순진함이다. 철저하게 주관론의 함정에 빠져있다. 한미동맹은 모든 게 선이라는 순진무구의 극치다. 국익을 떠나 '친구론'이다.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하게 예상되는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5월 23일 부시 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한미 FTA는 (…) 특히 자동차 관련 조항이 한국 측에 유리하게 돼있는 아주 결함 있는 협정으로 의회비준 동의에 반대한다." 6월 16일 미시간 주 연설에서는 "한국이 수십만 대의 차를 미국에 수출하면서도 미국 차의 한국 수출은 수천대로 계속 제한하도록 하는 협정은 현명한 협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실물경제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자동차회사들도 '고효율' 자동차 생산을 이유로 25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청구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와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 후보가 자신의 정책을 변경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선비준하면 자동차에 대한 재협상 주장이 쑥 들어갈 수 있을까?
이젠 오바마가 한미FTA를 통과시킨다고?
얼마전 우리 신문들은 버락 오바마의 이런 입장이 바뀐 것처럼 보도한 일이 있다. 사실이 아니었다. 의견일 뿐이었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선거본부의 프랭크 자누지(Frank Jannuzi) 한반도정책팀장이 워싱턴 한국 특파원들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 자동차 업계가 한국 시장에 접근하는데 보이지 않는 여러 장벽을 제거하고,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고 혜택을 받는다면 내년에 의회를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국내 언론들은 '내년 한미 FTA 통과도 확신' 또는 '1년 내 통과'와 같은 제목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전제조건을 무시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자동차 시장의 장벽 제거, 둘은 미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전, 사실상 부정론에 가깝다. 다른 식으로 설명하자만 재협상이다.
다른 근거를 찾아보자. 10월 5일자 뉴스위크 한국판 기사다.
"오바마의 보좌관들은 사석에서는 한미FTA가 양국 동맹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한국 정부 측에 특히 미국 자동차업계의 시장접근을 보장하는 문제를 놓고 재협상을 요구할 계획이다. 설령 오바마가 대선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민주당은 11월 선거에서의 의석 수를 늘려 한미 FTA 비준에 제동을 걸 공산이 크다.<누가 되든 부시 정부 정책기조 유지할 것>."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미FTA를 바라보는 현재까지의 민주당의 시각과 또 앞으로의 계획은 정부여당의 희망사항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한미FTA의 선비준은 미국의 재협상 혹은 후속협상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카드를 미리 던져버리는 꼴이다. 어차피 선비준만으론 아무런 실질적 효력이 없다. 차라리 미국 측의 이런 동향에 맞춰 우리도 재협상 카드를 준비하고, 정 하고 싶으면 그때 가서 동시에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한미FTA가 한미 양국에 일정부분 이득이라면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먼저 맺었을 때 나타나는 한시적 이익일 뿐이다(김재인, 「대한민국 경제, 빈곤의 카운트다운」, 37면.)" FTA가 선이라면 이 제도는 결국 전세계로 파급될 것이고 그때 동참해도 늦지 않다는 해석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ABR(Anything But Roh)이다. 미국도 8년 만의 정권 교체 혹은 워싱턴의 이단아라고 표현되는 매케인이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 정책의 조정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전면적이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는 사실상 금융사회주의화됐다. 규제완화와 감세론, 작은 정부론에 기초한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몰락했다. 미국의 경제정책, 나아가 자유무역정책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때에 우리 정부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미국의 변화를 냉정하고 관찰하고 그 흐름에 편승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도 7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버락 오바마 후보가 (미국 대선에서) 당선될 경우에 자동차 등 일부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국회의 선비준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유 장관은 선비준이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라고까지 했다. 며칠 전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전략(?)'과 같은 논리다.
현 시기 한미FTA는 더 위험해졌다
한미FTA의 주된 목적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경제산업구조를 한국에 이식시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각이 딱 이정도였다.(사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10.4 정상선언을 기념할게 아니라 한미FTA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게 더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좌파 신자유주의자'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다시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생각해보자. 여기에 금융시장의 전면자유화를 더해보자. 사실 현재의 미국 헌법 하에서 현재 방식의 구제금융은 모두 미국 헌법 위반이다. 하지만 IMF 당시 우리 정부의 개입은 합헌이다. 왜? 헌법 제119조가 있기 때문이다. 헌법 제119조 제2항은 이런 위기 시에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한미FTA가 통과되면 어떻게 되는가? 경제질서조항 자체가 무력화된다.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결코 정부정책이 뒤로 물러서서는 안되는 '역진방지조항' 때문이다. 자유화를 향해서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 규제 완화를 위해서는 정부 정책을 사용할 수 있되, 규제를 향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결코 정부 정책을 사용할 수 없다. 정부정책을 바꿀 수 없다. 오로지 신자유주의를 향해서 달려가는 길만 열어놓는다. 이것이 한미FTA의 본질이다.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한미FTA와 같은 국제협약을 통해 다시 못바꾸게 하는 거죠. 특히 투자자-국가소송제 같은 조항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정책의 근본노선은 동일합니다.(<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중 장하준 교수의 인터뷰)"
미국은 다시 뉴딜정책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뉴딜정책의 이론적 기반은 케인즈주의다. 케인즈는 한미FTA에 동의했을까? 투자자-국가소송이 정부의 정책수행능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안전망을 침해하기 때문에 반대했을 것이라는 것이 박종현 교수의 분석이다.(「케인즈 & 하이예크,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 214면 이하.) 미국의 정책이 달라질 수 있는 또하나의 근거다.
한편 한미FTA 적극찬성론자들은 한미FTA 체결이 당장 외국인의 직접 투자를 늘릴 것이라 선전한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7월 14일 국회 연설을 통해 한미FTA로 외국인 직접투자가 300억 달러나 늘어날 것이라 했다. 제발 상식으로 판단하자. 미국 경제는 이미 '조정기' 내지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도리어 달러를 미국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투자경색은 전세계적 경향이다. 그런데 한미FTA만 '선비준'되면 당장에 외국 투자자들이 몰려올 것인가? 만일 몰려온다면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의 목적일 것이다. 최소한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압박론의 허구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레임덕 세션 발언
레임덕 세션(lame duck session)에 대한 기대도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홍 대표는 11월 17일부터 미국 의회가 열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 차라리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말이 이례적으로(?) 정직하다. 7일 국정감사에서 김 본부장은 "내년 잠정 예산안이 통과되면서 레임덕 세션이 열릴 가능성도 희박해졌으며 (설사 열린다 해도) 미 금융시장의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양당 간 의견 차가 있는 FTA 문제를 신속하게 다루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홍준표 대표가 말하는 선비준을 통한 압박론도, 개정법률안을 통한 볼모론도, 레임덕 세션 활용론도 모두가 허구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미 한미FTA와 연계된 두 건의 법안 통과가 있었다.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제 정리해보자. 금융자본주의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완벽하게 폭발했다. 세계경제를 비롯한 미국 경제, 미국의 경제정책, 무역정책은 정권 교체기라는 특성과 함께 본질적 조정기를 거칠 것이다. 좀 더 보호무역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민주당 지배가 예상되는 미 의회가 우리의 선비준에 영향받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자동차 분야를 비롯한 재협상론은 사실상 테이블에 올라있다.
미국의 직접투자가 좀더 신중해지리라는 것도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 여당의 선비준론은 그야말로 그들만의 순진무구한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전제가 되는 객관적 조건과 희망하는 결과 사이의 괴리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제발 미루고 있어라. 다른 대안은 없다. 굳이 대안을 제시하자면 재협상이라도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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