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두 장도 남지 않은 요즘, 올해 들어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9월 30일을 선택할 것이다. 9월 30일 오전 8시, 전면 파업 27일째를 맞은 희망연대노동조합 케이블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이하 티브로드지부) 조합원 170여 명은 태광-티브로드의 원청 책임자성 인정과 성실 교섭을 촉구하기 위해 태광 티브로드홀딩스 이상윤 사장 면담을 요구하며 태광그룹 본사 8층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점거 소식을 듣고 '케이블방송 공공성 보장과 비정규직 노동 인권 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비롯한 많은 연대 동지들이 광화문으로 모였고 오전에는 공대위의 긴급 기자회견, 오후 3시와 저녁 7시에는 공권력 투입을 막기 위한 집중 집회와 촛불 문화제가 진행되었으며, 식사 반입을 둘러싸고 충돌이 발생하는 등 긴박한 하루였다.
태광그룹 본사 안과 밖에서 투쟁이 지속되었다. 결국 원청인 태광이 교섭에 책임 있게 나서는 것과 함께 3일간 집중 교섭을 진행하는 것에 합의하자 8층에 올라갔던 조합원들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20여 시간 농성을 진행하던 조합원들이 내려와 바깥에서 기다리던 조합원들, 연대 단위와 함께 파업가를 부르던 순간은 지금도 짜릿한 감동으로 기억된다.
한편 8층에 올라간 조합원들이 내려오기 한 시간여 전쯤, 촛불 문화제가 진행되던 대오 뒤쪽에는 희망연대노조 지도부와 공대위 대표자들이 모여앉아 상황과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대위 집행위원장이 노조의 계획에 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공대위 참여단위의 한 대표자가 하는 말이 "너무 빡쎄요!", "노조 만든다고 하더니 만들고, 파업한다고 하더니 파업하고, 점거한다고 하더니 점거하고… 너무 훌륭한 노조에요"였다. 지난 3월 30일 결성된 티브로드 지부. 과연 지난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출범까지 한 달, 절박함이 만든 노동조합
티브로드지부는 케이블방송 태광 티브로드에 하청으로 고용되어 설치, 철거, 수리(AS)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다. 출범은 3월 30일에 했지만 준비는 그보다 한 달 전, 씨앤앰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케이블방송 비정규직지부(이하 케비지부) 결성보고대회가 열렸던 2월 말부터 준비되었다.
케비지부 결성보고대회 자리에는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참석했는데 이들은 이른바 '독수리 5형제'라고 불리는,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독수리 5형제는 희망연대노조 지도부에 노조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희망연대노조는 반수 이상의 센터(업체)에서, 직원의 과반 이상이 조합원으로 조직되어야 가능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케비지부가 정규직인 씨앤앰지부와 함께 상당 기간 노조 출범을 준비해온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기에 처음에는 케비티지부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한 달하고 일주일 뒤인 3월 30일 티브로드지부는 결성 보고 대회를 가졌다. 노조를 준비하는 초창기 모임은 노동당 소속 관악구 의원인 나경채 의원 사무실에서 진행했는데 나 의원에 따르면 두세 번인가 모임을 가진 후, 참석자가 많아 장소가 좁을 것 같으니 다른 공간을 섭외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봤던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200여 명의 인원이 짧은 시간 내에 조합원으로 조직되었고, 티브로드지부가 출범하였다.
티브로드지부의 상급단체인 희망연대노조는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초기부터 사회적 연대가 구축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초기부터 노동·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에 공대위 구성을 제안해 함께 활동을 진행해왔다. 필자가 속한 노동당 서울시당도 공대위 참여단체로 이름을 올렸고 필자가 공동 대표를 맡게 되었다.
공대위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다단계 하도급 계약으로 고용된 것은 기본이고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근로기준법조차 위반하고 있는 센터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원청의 관리지표에 의한 영업 및 실적 강요도 심각한 수준이어서 목표 실적을 맞추기 위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가입하는 이른바 '자뻑'도 만연된 상황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노동조합이 조직될 수 있었던 비결은 열악한 상황에서 십여 년간 일해 온 티브로드 노동자들의 분노가와 함께 '독수리 5형제'를 비롯한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있었다.
티브로드지부는 노조 결성 이후 공대위와 함께 본격적인 조직 확대에 나섰다. 각 센터 앞 출근 선전전은 해당 지역 공대위 소속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몇 달 동안 하청업체 사장단과 원청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원청인 태광그룹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사장단과의 교섭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노조는 9월 4일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
파업이라는 학교의 우등생, 티브로드지부
보통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짧은 문구에 담긴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단연코 티브로드지부 조합원들이었다. 34일간의 파업 기간 내내 티브로드지부 조합원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을 만든 지 6개월 만에 돌입한 첫 번째 파업이었지만 단 한 명의 조합원도 이탈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합원과 파업 참여 대오는 늘어났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발언도, 팔뚝질도 어색해하던 조합원들이었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투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대의 힘과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티브로드지부 조합원들은 연대 투쟁에도 열심이었다. 파업 기간 많은 집회에서 빨간 몸 벽보를 입은 티브로드 조합원들을 볼 수 있었고 급기야는 '모든 집회를 티브로드 집회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연대에도 열심이었다. 파업이 일주일을 넘기며 길어질 조짐이 보였을 때에는 조금씩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여전히 씩씩한 조합원들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걱정이 사라지곤 했었다.
파업 기간 조합원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은 조합원들이 얼마나 힘들고 열악한 상황에서 일해 왔는지를 새삼 느끼게 했다. 조합원들에게 "처음 하는 파업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전혀 힘들지 않다."고 대답했는데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는 이랬다. "노동조합 만들기 전엔 제시간에 점심을 먹은 적이 없었고 9시, 10시가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는데 파업하니 제때 점심 먹을 수 있고 6시면 집에 갈 수 있으니 너무 좋다."는 것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될 무렵은 파업 2주차에 접어들 시기였다. "추석 전에는 파업 끝내야죠?"라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일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명절 연휴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이번 기회에 추석 연휴를 온전히 한 번 쉬어야 하니 추석 연휴가 지난 후에 파업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낸 조합원들과 흔들리지 않는 파업 투쟁을 이어가면서, 투쟁을 할수록 조합원이 점점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지치지 않고 연대하는 동지들을 보면서 티브로드지부 조합원들은 파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욱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점점 더 단련되어 갔던 것이다.
하지만 노동 탄압 그룹으로 이미 악명이 높은 태광그룹은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대체 인력까지 투입하는 등 노동조합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노조는 9월 30일 '진짜 사장' 면담을 요구하며 태광그룹 본사 8층 점거라는 강수를 두었고 20여 시간 만에 '원청이 책임 있게 교섭에 나서고, 3일 동안 집중 교섭을 진행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고 내려왔다. 이후 포괄협약을 체결하고, 센터별 교섭에서 난항을 겪은 지역도 있었지만 결국 15개 센터 중 12개 센터에서 합의안을 도출했고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한 3개 센터에서는 센터장 교체작업이 진행 중이다.
티브로드지부가 승리로 얻어낸 성과는 적지 않다. 노동조건 개선 이외에도 이후 조직 활동의 근간이 될 6명의 전임자와 3곳의 사무실까지 합의했고, 전주와 부산에서도 조합원들이 조직되었다. 여러모로 노동 운동이 어려운 시기에 전해진 승리의 소식이었기에 티브로드지부의 소식은 더욱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즐거웠던 투쟁의 기억, 그리고 유쾌한 상상
티브로드 투쟁 승리의 첫 번째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합원들의 단결된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조합원들은 파업 기간뿐 아니라 포괄협약 체결 이후 불성실 교섭을 규탄하는 재파업 돌입 기자회견과 집회에도 조합원 대부분이 집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초기부터 승리하는 투쟁을 위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한 희망연대노조의 노력, 공대위를 비롯한 여러 단위의 지속적인 연대가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삼성전자서비스를 비롯해 현재 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간접고용 노동자라는 점에서 티브로드 투쟁의 승리는 매우 값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CJ 헬로비젼이 향후 5년간 고객센터에 180억 원 투자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동반성장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 등 티브로드지부의 투쟁은 이미 케이블 방송 업계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티브로드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했던 기억은 올해 가장 큰 즐거움이었고 감동이었다. 파업 기간 거의 매일같이 현장에서 만났던 조합원들에게 들었던 "위원장님은 이제 티브로드 조합원처럼 느껴져요."라는 말은 올 해 내가 들었던 최고의 찬사였다. 노조의 투쟁이 마무리된 지금도 변함없이 각종 현장에 연대하는 조합원들을 보는 것은 더 큰 감동이고 즐거움이다.
하지만 티브로드지부가 아직 출범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 노조라는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건강성을 유지하는 티브로드지부의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합원들과 현장에서 연대하고 지역노동정치 혁신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동지로 만나갔으면 좋겠다. 또한 공대위는 티브로드 투쟁의 경험을 살려 이후 비슷한 업종에서의 조직화를 지원하는 조직으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승리의 경험이 또 다른 투쟁과 승리를 만드는 자양분의 역할을 하는 선례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올해 가장 즐거운 투쟁의 기억을 만들어준 티브로드지부 조합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뜨거운 가을을 함께 보냈던 동지로서, 공대위의 공동대표로서 나 역시 지속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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