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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강정' 시간제 일자리 박람회, 아줌마들 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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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강정' 시간제 일자리 박람회, 아줌마들 뿔났다

[현장] "시어머니한테 아이 맡기고 대기업 홍보관 구경한 꼴"

"전시성 행사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왔는데 역시나다. 막상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면 '아직 정해진 바가 뚜렷하게 없다'는 말만 수차례 듣고 지쳐버렸다. 내가 대기업 홍보관 구경하려고 8개월 된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여기까지 왔겠나."

2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시간제 선택제 일자리 박람회에서 만난 ㄱ(35) 씨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들고 있던 홍보 책자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화를 삭이는 ㄱ 씨. 그의 말처럼 박람회 장소는 흡사 '기업 홍보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박람회장 이곳저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선 유사 광고가 계속해서 흘려나왔다. 벽에 쓰인 '당신의 날개가 되어드립니다', '다시 꾸는 꿈'과 같은 가슴 떨리는 문장들은 구직자들의 기대를 한껏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박람회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자리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ㄱ 씨는 "시간 낭비도 이런 시간 낭비가 없다"며 "지금 당장 사람을 구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정부가 나오라고 하니 (기업들이) 빈손으로 그냥 나온 인상이 강하다"고 말했다.

▲ 2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시간 선택제 일자리 채용 박람회. ⓒ프레시안(최하얀)

대기업이 '선전'한 시간제 일자리…알고 보니 '2년제 기간직'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주최로 열린 이날 채용 박람회에서는 삼성, LG, CJ, 롯데 등 주요 10개 그룹 82개 기업이 나서 시간제 일자리에 1만 명을 채용할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정부의 '고용률 70% 달성'의 주 사업인 시간제 일자리 확대 사업에 본격 시동을 거는 행사인 만큼 언론의 주목도도 컸다.

실제로 행사는 시작부터 인산인해였다. 이른 오전부터 입구에 길에 늘어선 줄은 30~40대 경력 단절 여성들의 재취업 의지를 실감 나게 했다. 특히 시간제 일자리 6000명 채용을 발표했던 삼성 부스에는 유난히 많은 구직자들이 번호표를 뽑고 상담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 끝에 돌아온 대답은 "2년 계약직"이거나 "지금 당장은 자리가 없는데 곧 생긴다"는 정도였다. 삼성전자 부스에서 상담을 받고 나온 ㄴ 씨는 "집으로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이전 경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저급한 일자리들만 설명 들었다"고 말했다. ㄴ 씨는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연구원으로 일하다 출산과 동시에 경력이 단절됐다.

그는 "여기 대기업들이 말하는 시간제 일자리란 것은 보통 월 100만 원 정도에 2년 계약직"이라며 "삼성은 무기계약직으로만 전환만 해주고 정규직 전환은 원천 차단해 놓았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무기계약직은 근속연수가 쌓여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 저임금 일자리다.

'오버 스펙'으로 아예 상담 거절당하기도…

지나치게 높은 자격이라며 아예 상담을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LG 부스에서 막 상담을 마친 ㄹ 씨는 "스펙이 지나치게 좋으니 여기서 일자리를 찾지 않는 게 좋겠다란 조언을 들었다"며 "대기업 잘 다니다 남편이 해외 파견돼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 뒀던 건데,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나를 원하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은행에서 10년여 일하다 출산·양육으로 일을 그만둬야 했던 ㄷ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구직 활동을 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눈높이를 낮추라'는 얘기였다"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년 은행 경력을 알아주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채용 시 약간 우대해줄 뿐이지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아줌마 일자리'라는 점에선 기존에 알아보던 일자리들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ㄷ 씨는 이번이 두 번째 경력 단절이다. 재작년 시중 은행에서 계약직 텔러로 일했지만, 재계약이 되지 않아 다시 실직자가 됐다. 그는 "계속 경력이 끊겨 있는 나이 많은 나를 써주는 곳은 없는 것 같다"며 "가는 세월에 내 모습이 초라하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하얀)

국무총리 방문 소식에 "총리한테 묻고 싶다. 여기 어떤 일자리가 양질이냐"

박람회장 한가운데에선 화장품 회사가 별도의 부스를 차려 '화장 서비스'를 해주고 있었다. 구직자들은 지친 다리를 두들기며 차례를 기다린 후 이곳에서 화장을 받고 바로 옆에 있는 사진 촬영 장소로 이동해 이력서에 부착할 증명사진을 찍었다.

화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ㄹ 씨는 "일자리가 없으니 화장이나 받고 가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 부실 문제가 떠오른 A그룹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그는 "이 박람회는 완전히 생색내기용"이라며 "상담을 받는 족족 지금 당장은 일자리가 없고 1월 초에 생기니 그때 홈페이지를 보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먼 미래에 생길지 안 생길지 알 수 없는 대기업의 계약직 파트타임이 아니"라며 "안정적인 일자리라면 중소기업이어도 상관없는데, 그런 면에서 이 박람회는 안 하는 게 나았을 행사"라고 비판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자 박람회장 안 경비가 눈에 띄게 강화됐다. 정홍원 국무총리와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방문할 거란 소식이 전해졌다. 검은색 옷을 입은 경비원들 수가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던 ㅁ 씨는 "총리가 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여기서 어떤 일자리가 정부가 말하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인지"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박람회장 앞서 "시간제 일자리 정책 중단하라" 규탄

민주노총은 26일 오전 9시 반께 시간선택제 일자리 박람회가 열리는 행사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 노동자를 무시하는 시간제 일자리 확대와 박람회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는 일자리가 필요한 여성 노동자와 청년 노동자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이들을 시간제 신규 일자리로 유인, 93만 개 시간제 일자리 실적 채우기를 달성하려 하고 있다"며 "이는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는 여성과 청년에게 '실업이냐, 시간제냐'를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또 "정부가 지원하는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의 시간당 임금은 평균 6840원으로 정규직 노동자 평균 시급의 44.7%, 비정규직 노동자 평균 시급의 73% 수준에 불과하다"며 "시간제라는 이유로 저임금과 무료노동이 강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정부는 이런 상황은 개선하지 않고 거짓 홍보로 시간제 일자리의 열악함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삼성이 시간제 일자리 6000개를 만들겠다 발표한 것에 대해 "지난달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 노동자 최종범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삼성이 시간제 일자리를 대거 양산하겠다고 한다"며 "무노조 경영과 노조 탄압 등을 자행하고 있는 삼성그룹의 후안무치한 행태는 끝이 없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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