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시인에게 '또또'는 그저 한 마리 개가 아니었다. 17년 세월 동안 같은 집에 살면서 감정을 교류한 반려자였다. 그런 또또가 지난해 시인을 두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반려자가 떠났지만, 시인은 또또를 떠나보내는 경험을 통해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예민하고 공격적인 개 또또를 만나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해하면서, 나중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또또는 시인에게 교감의 기쁨과 생명에 대한 경건함을 일깨워줬다. 늘 아팠던 또또는 시인에게 보호해줘야 할 딸이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시인의 스승이었다.
시인은 외로울 틈 없이 자신에게 기쁨을, 때론 슬픔을 주었던 또또에 대한 기억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17년간의 반려 생활을 담은 책 이름은 <또또>다. 시인은 책에서, 또 인터뷰에서 또또를 어떻게 말 잘 듣는 강아지로 키웠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또또와 어떻게 마음을 나누었는지에 대한 경험을 풀어놓었다. 인터뷰는 지난 18일, 시인과 또또가 함께 살았던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편집자>
▲조은 시인. ⓒ프레시안(최형락) |
"사랑스러운 것도 불편할 때가 많다"
"자유로운 인간들에겐 자신의 삶을 망칠 자유까지도 있지만, 오직 생존만을 원하는 인간 곁의 동물들은 하나같이 생존이 위태로워 보인다. 인간에게 길들어져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들이 버려지거나 상처받은 채 죽어가는 모습은 더욱 괴로워 점점 외면하게 된다."(20p)
18년 전 어느 날 시인이 집 대문 앞에서 만난 또또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바지 끝에 매달려있는 '갈색 나뭇잎이거나 실꾸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작고 예쁜 강아지였다.
"그렇게 예쁜 강아지를 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키울 생각은 단 1%도 없었어요. 어렸을 적 키우던 개 '마루'에 대한 기억 때문이에요.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루가 없었어요. 집에 놀러 온 아버지 친구들의 안줏거리가 되고 난 후였죠. 혼절을 했을 정도로 저한텐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그래서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눈에 쏙 들어온 강아지가 사랑스러웠지만, 불편했다. 또또는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마루와 같은 '앞날이 뻔한 잡견'에 불과했다. 또또는 원래는 시인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기르던 강아지였다. 집 주인은 사람에겐 선량했지만, 개에겐 그렇지 않았다. 시인은 종종 집주인이 또또를 '개 패듯'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정말 운명처럼 그 강아지에게 끌렸어요. 하지만 그 개가 주인에게 얻어맞는 걸 보고도 전 적극적으로 말릴 수는 없었어요. 제 소유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두고 본 과정이 길게는 1년 정도 됐어요. 주인집에 '그렇게 대할 거면 저한테 팔라'고 했지만, 고작 '만 원짜리'였으니까 사고 팔기가 애매했어요. 결국 나중엔 학대를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제 마음대로 개를 데리고 와 버렸죠."
그렇게 시인과 작은 강아지의 사랑스럽지만 불편한 동거 생활이 시작됐다.
"개도 자존심은 있다"
"또또는 죽을 때까지 나를 물었고, 물고 난 뒤엔 자신도 괴로워했지만, 차츰 살짝 무는 기교를 익혔다. 살짝 물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녀석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무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나와 또또를 보면서 인간과 개의 상하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112p)
한 가족이 됐지만 서로에게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대의 기억 때문인지 또또는 공격적이었다. 수시로 이빨을 드러내고, 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시인은 딱 한 번만이 사람을 물 타이밍에서 또또가 참길 바랐다. 하지만 이내 또또를 길들이는 것을 포기했다. 언젠가 시인의 조카가 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잡혀 사는 시인을 보고는, 또또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보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또또의 공격 성향은 더욱 심해졌다.
"또또는 자기를 향해 갑자기 다가가는 손을 보면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공포가 생겼고, 제가 보기엔 그 기억을 평생 지우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또또가 가끔 혼비백산해 저를 물기도 했지만 그냥 감싸줬어요. 학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싫었고, 어차피 나이가 들면 느슨해질 테니까요."
시인은 또또에게 한 번도 '훈련'을 시켜본 일이 없다. 그 흔한 '앉아, 일어서'조차 한 적이 없다. 무엇보다 또또에게 유별난 자존심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또또는 너무나 이상한, 개답지 않은 자존심이 있는 개였어요. 외출을 하려고 목줄을 매려는데, 또또가 움직이질 않았어요. 오전에 목줄을 했는데 밤이 되어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결국 밤이 돼서 풀어주니까 그제야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더라고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또 한 번은 어떤 시인이 또또를 걷어찬 적이 있는데, 너무나 민망한 표정을 짓는 거에요. 또또에겐 인간인 제가 지켜 주고 싶은 그런 자존감이 있었어요. 녀석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잡견이라 해도요."
▲조은 시인의 반려견이었던 또또. ⓒ로도스 |
"개가 원하는 것은 인간 곁에서 외롭지 않는 것"
"장례를 치르고 오는 동안 또또는 내가 준비해 두고 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자다가 뭔가가 이상해 눈을 떠 보면, 또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또또는 내가 걱정되어 앞발을 침상에 올려놓은 그런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135p)
시인과 또또는 잘 통했다.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듯 그런 동물도 있다. 조 시인에게는 또또가 그랬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다. 마음을 나누는 방식은 따로 있지 않았다. 또또에게 정말 그랬느냐며 물어볼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에게는 그렇다는 확신이 있었다. "또또와 교감하고 있다는 게 그냥 느껴졌다"고 했다.
시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이었다. 어머니 임종을 지킨 뒤 장례 준비를 하러 집에 들른 시인을 마중 나온 또또의 표정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평소라면 힘껏 달려와 안겼을 또또는 유독 그날은 멀찍이 떨어져 서선 시인의 머리 위를 응시했다.
"정말 슬픈 날엔 제 슬픔을 감당할 수 없는 건지 눈을 안 마주쳤어요. 잘 보면, 또또는 제가 기쁠 때 하는 행동과 슬플 때 하는 행동이 달랐어요. 또또뿐 아니라 많은 개들이 주인의 감정을 스펀지처럼 흡수해요."
그러나 교감에도 한계가 있다. 어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반려 동물은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지 않는다. 또또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시인은 고민했다. 또또는 자궁염증으로 종일 고름을 내뱉었다. 시인은 매일 고통에 신음하는 또또를 더 지켜볼 수 없었다. 결국 안락사를 선택했다.
"고통이 없었다면 안락사를 안 시켰을 텐데, 제가 보기엔 또또 상태가 상당히 심각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은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서, 평소 다니던 동물 병원 말고 다른 동물병원으로 갔어요. 예전 동물 병원은 또또에게 공포의 공간이었으니까요. 병원에선 그날 저녁이나 그 다음 날 아침에 죽을 거라고, 지금 굉장히 아플 거라고 했어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병을 앓는 개 열 마리 중에 한 마리만 죽고 싶지 않고, 일곱 마리 이상은 아프니까 떠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한 게 생각났어요. 또또도 떠나고 싶어 할 것 같았어요."
또또는 시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일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개들이 죽는 순간을 보면, 그냥 죽지 않아요. 다들 주인을 기다려요. 주인의 모습을 눈에 담고 그런 다음 죽음을 맞이해요. 죽는 순간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게 사람의 몫이죠."
17년 동안의 교감을 통해, 시인은 또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반려동물을 위한 것인지 확신할 순 없어요. 하지만 특히 도시에서 사람이 아닌 동물은 생존이 불안한 존재들입니다. 무엇보다 생존을 위협받지 않게 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 사람들 곁에서 편하게 살다가 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게 반려동물이 원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프레시안(최형락) |
"반려동물과의 생활은 성숙한 삶을 만드는 기회"
또또와의 이별 이후 17년간의 반려 생활을 정리하면서, 시인은 자신과 또또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시인은 처음엔 '또또 엄마'라는 호칭을 거북해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또또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내가 왜 개의 엄마가 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서로에게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또또는 너무나 힘들게 살아가는 생명이었고, 그 때문에 시인에게서 따뜻한 보호를 원했다. 그래서 또또의 옆에 있는 한 그는 필연적으로 때론 또또의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또또에게 '엄마가', '아가야' 이렇게 한 적은 없지만 나중에 보니 어느 순간 보니 병든 자식을 돌보는 엄마의 심정으로 돌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또또의 엄마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압축된 언어를 쓰는 시인이지만, 그는 또또와의 관계를 한 단어로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게 용어는 중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또의 견주이기도 했고, 병든 딸을 보살피는 엄마였으며, 심지어 또또에게서 무언가를 깨우쳤으니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또또한테서 배운 게 참 많아요.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참 성숙했어요. 개는 타인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고통을 감내해요. 그런 점은 정말 본받아야 해요. 그리고 또또와 있으면서 제가 굉장히 관대하고 너그러워졌어요. 주변을 보면 개에 집착해서 여러 마리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른 사람은 미쳤다고 하지만, 전 이해가 돼요. 인간 사회에서 얼마나 위로를 못 받았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선 또또가 제 선생님인 거죠."
17년을 함께한 반려자를 멀리 보냈지만, 그는 또또의 죽음 이후 도리어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마루의 죽음은 저에겐 너무나 큰 상처였어요. 그래서 다신 제 옆에 동물을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하지만 또또와의 추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또또의 죽음이 슬프지만 극복하기 어렵지 않았어요. 만약 새로운 동물을 만나게 되면 그땐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성숙한 삶을 위해 기회가 닿는다면 반려동물을 맞이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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