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들이 이런 짓을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법치주의, 헌정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등, 온갖 구상과 이론과 이상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날 선거에 출마하는 모든 정치인들은 법률과 헌법을 수호하겠노라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인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노라고 공약을 내건다. 그렇지만 정치인이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을 샅샅이 빠짐없이 전심을 다해서 지킬 것이라는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의 선거용 수사와 집권 후의 행태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은 선거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보인다.
현대의 정치에서 선거공약은 지키기 위한 약속이 아니라 후보라는 상품을 더 좋은 값에 팔아먹기 위한 광고문구일 뿐이다. 누가 당선되든지 내세운 공약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못 지킬 수밖에 없다. 누가 당선되든지 반대파에서는 그가 지킨 공약보다 지키지 못한 공약을 부각해서 다음 선거에서 반전을 노린다. 이를 위해 반대파에서는 때로 왜곡과 과장도 서슴지 않는다. 정당 간의 정책 경쟁이 공론장에서 평가받게끔 만듦으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은 정책이 개발되도록 한다는 정당정치의 이념을 아직도 강의실에서 되뇐다는 것은 수 십년 묵은 강의노트를 녹음기 틀듯 반복하는 무능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경쟁은 정책의 옳고 그름을 둘러싸고 벌어지지 않는다. 정책의 입안 단계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책이 시행된 다음에는 정책의 결과를 평가할 잣대가 권력의 입맛에 따라 춤을 추기 때문에, 정책의 옳고 그름을 확정적으로 판가름할 길은 없다. 이런 판국에서 경쟁은 내 잘못은 숨기고 남의 잘못은 침소봉대하는 방식으로만 벌어진다. 한국처럼 공론장이 지성보다 감정에 휘둘리는 곳일수록,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는 이치나 공익보다는 선동과 조작과 협박과 바람몰이에 의해 좌우된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동원체제로부터 이런 대중조작의 기술을 거의 생득적으로 익혔고, 이제 대통령이 되자 국가의 모든 기구를 거대한 대중조작의 기계로 바꾸고 있다.
민주정치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를 묻는다는 것은 무력하고 감상적인 한탄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자가 인민을 인질로 취급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한다면, 이런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군주정이든 민주정이든 이것은 권력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다. 권력이 자기 보전을 위해 인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그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인민만이 가지고 있다. 인민이 나서서 권력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권력의 못된 작태는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민이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무척 긴 시간이 필요하다. 못된 권력에 빌붙어 출세만을 지향하는 사람들, 당장 자신에게 위해가 닥쳐오지 않는 한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들, 현재의 권력이 아무리 못돼먹었더라도 혁명의 혼란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권력에 반대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애당초 겁을 집어 먹은 사람들이 대개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기 전에 권좌에서 쫓겨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자스민' 혁명이든, '오렌지' 혁명이든, 아니면 '4월 혁명'이든 '6월 항쟁'이든, 인민의 봉기에 의한 정치 변동은 자체로 불행한 일이며 결과적으로도 배신감만을 안겨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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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선거개입의 구렁텅이에서 박근혜가 빠져나갈 출구는 사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안했듯이, 권력기관의 선거공작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처벌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되, 다만 전 정권의 일이었다고 차별화하기만 하면, 여론은 가라앉을 것이다. 박근혜 캠프 또는 박근혜 본인이 연루되었는지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는 데에 있기 때문에, 설사 꼬리자르기로 처리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순한 시민들은 그 정도의 봉합에 대충 만족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왜 박근혜 또는 박근혜의 정치적 브레인은 이렇게 하지 않을까? 여론의 조작의 기법 상으로 극적인 타이밍을 노리기 때문이다. 여론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론을 누를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여지를 시험해 보는 것이 벼랑 끝 전술에서는 합리적인 시도가 된다. 여론을 도저히 누를 수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그때 가서 사과하고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자르면 되리라고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반대자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망각의 덫에 빠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주권자의 위임을 받은 권력을 가지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생성해 보려는 의욕으로 마음이 바쁘다면 이런 식의 권력게임에 시간을 낭비할 리가 절대 없다. 현재의 기득권 체제를 수호하고, 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기득권 체제를 강화하는 일 말고 따로 가치 있는 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정권이라면 이런 식의 소모적인 정쟁을 오히려 가급적 오래 연장하는 편을 선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작은 정부'란 현재 시장을 지배하는 권력을 보호하거나 강화하는 방편으로서 국가 권력을 무력화하겠다는 이념이다. 대처를 존경한다는 박근혜는 지금 이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자본과 조직에게 짓눌려 신음하는 작은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시장의 강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조직의 전횡에 항거하는 개인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탄압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권력이 이런 식의 벼랑 끝 전술을 행사할 때마다, 인민이 번번이 단호하게 결집해서 정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번번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악한 정권은 인민을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악용할 유혹을 받는다. 저항의 목소리는 낼 수 있는 만큼 내야 한다. 정권의 사악한 행태를 고발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고발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아마도 4년 남짓 남은 임기를 어떻게든 마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다음에 어떤 정부를 선택할지, 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 정부에 대해 누가 어떤 방식의 지지 또는 반대를 얼마나 극렬하게 표명할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이런 질문들이 얼핏 현재처럼 급박한 국면에서 사치스러운 것으로 비친다고 해서, 마냥 방치하고 간과하다가는 다음에는 김무성이 대통령이 되고 여전히 국회 다수는 새누리당이 점유할 위험이 높다. 그리하여 5년쯤 후에도 여전히 한국 정치는 "종북" 매카시즘과 안보 장사가 횡행하는 가운데, 국가 권력은 사적 강자들의 전횡을 뒤에서 후원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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