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군의 가족이 20일 국회를 찾았다. 수십 명의 기자 앞에서 여태껏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유를 눈물로 설명했다. 아버지 이왕용 씨와 큰 누나 이지연 씨 옆에는 민주당 장하나 의원과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노무사, 알바노조와 청년유니온 활동가들이 함께 섰다. 이들은 "배수관 안전 점검 공사를 발주한 한국농어촌공사가 사고 발생 보름이 넘도록 유족들에게 사과하거나 재발 방지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CCTV 로봇이 조사하기로 했던 배수관로에 알바생 투입
이 군이 들어간 배수관로는 당초 사람이 아닌 폐쇄회로(CCTV) 로봇이 들어가 관로 결함 여부를 조사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다 촬영 로봇이 장애물에 막혀 전진하지 못하자, 이 군이 투입됐다.
장하나 의원은 "사망 경위가 너무나 기가 막히다"며 "(공사를 담당한 하청업체) 직원들의 말은 더 황당하다. '왜 직원이 들어가지 않고 아르바이트 학생을 시켰느냐'는 질문에 한빛환경(하청업체) 현장 관리자는 '무서워서 못 들어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빛환경 관계자는 20일 통화에서 "어떤 미친 사람이 그런(무서워서 못 들어갔다)말을 하겠느냐"고 부인했다.
노동건강연대 산재감시팀 박혜영 노무사는 "살인"이라고 일갈했다. 박 노무사는 "사진으로만 봐도 당장 도망치고 싶을 만큼 열악하고 무서운 현장"라며 "이 사건을 함께 검토한 한 전문가는 '(이 군이) 너무 착했나 보다. 어른들을 믿고 들어갔던 것 같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장 의원과 박 노무사 등이 유족을 대신해 사건 경위를 설명하는 동안, 아버지 이왕용 씨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회견을 시작하던 때만 해도 검지로 닦아낼 수 있을 정도였던 눈물은, 박 노무사가 '어른들을 믿고 들어갔던 것 같다'라고 말하자 순식간에 굵은 줄기로 바뀌었다. 결국 아버지 이 씨는 카메라를 등지고 돌아섰고, 누나 이지연 씨가 아버지의 어깨를 감쌌다.
▲ 장하나 민주당 의원과 청년유니온, 알바노조, 노동건강연대 대표들이 20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지난 5일 경북 문경의 한 저수지 배수관에서 안전점검 도중 숨진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이해준 군 사고와 관련해 한국농어촌공사의 공식사과와 보상, 사고재발방지대책 및 안전관리개선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은 이해준 군의 아버지 이왕용 씨와 큰 누나 이지연 씨. ⓒ연합뉴스 |
한국농어촌공사 "도의적 책임 다 할 것"
유족은 이날 회견에서 "공사를 지시한 책임자들에 대한 명확한 민형사상 책임 소재를 물어 처벌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특히 공사를 발주한 한국농어촌 공사 차원의 대국민 사과를 강하게 요구했다.
회견 참가자들은 "발주처인 한국농어촌공사와 용역업체(한빛환경)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보상 문제는 소송으로 결론을 낸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번 사고의 일차적 책임은 자신들이 발주한 공사의 안전관리 책임을 회피한 한국농어촌공사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국농어촌공사 측은 20일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사고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식적 보상은 어렵다. 관계자들이 성금을 모으는 형식으로 도의적 책임을 다하려고 하고 있다"고 밝혔다. 누나 이 씨가 언급한 공사 측의 "회유와 협박"에 대해선 "어느 사람이 그렇게 하겠느냐"고 짧게 답했다.
유족 "책임자 사과는 받고 치러야지"
누나 이 씨는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문제 해결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이 씨는 "책임자 사과는 받고 장례를 치러야겠단 생각으로 일단 장례를 미뤄뒀었다"며 "그러나 시일이 지나도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비웃음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회견 참가자들에 따르면, 사고 발생 다음 날 한국농어촌공사 관계자가 영안실로 찾아왔다. 누나 이 씨는 "영안실에 찾아와 하는 말이, '로봇이 촬영해야 하는데 왜 사람이 들어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공사는 그런 작업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안전관리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을 하기에 급급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유가족을 만날 때마다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다"며 "'(공사에) 민형사상 책임이 없다. 소송으로 이어지면 유가족에 대한 도의적 책임 격인 성금도 줄 수 없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청업체(한빛환경)도 피해 보상을 못하겠다고 드러누우면 어쩔 것이냐. 적절한 선에서 하청업체와 항의를 해라',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왜 모르냐. 우리는 공기관이기 때문에 법률적 책임이 없다면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유가족과 농어촌공사가 면담하던 도중 한 공사 직원은 비웃는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다"며 "진심 어린 반성을 하지 않는 농어촌공사 직원들의 뻔뻔함이 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내지 못하고 기자회견까지 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아버지 이 씨는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겨운데, 내 자식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조차 몰라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힘들다"며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모른 척 할 부모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나. 좋은 곳으로 보내줄 수 있도록 (한국농어촌공사는) 더 이상의 죄는 짓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원청 책임 법에 명시해야"…기업살인법 제정 필요성 또 대두 회견참가자들은 이른바 '기업살인법' 제정이 시급하다고도 주장했다. 장하나 의원은 "이런 산재 사고가 났을 때 책임 회피를 하지 못하도록, 원청 책임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며 "거대 기업들이 공사를 하도급 주는 진짜 이유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안전 문제를 회피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박 노무사 역시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영국에서 1명이 일하다 죽을 때, 한국에선 13명이 죽는다"며 "대체 한국 사람은 무슨 죄인가. 안전장비도 없이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위험한 현장으로 내몬 책임을 한국농어촌공사는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노무사가 언급한 영국은 지난 2007년 작업장에서 발생한 사망을 '살인'으로 취급, 사업주를 형사처벌하고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기업살인법(Corporate Killing Law)을 제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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