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는 총 350여 건. 이 중 사망 사례는 영·유아 수십 명을 포함해 110여 건에 이른다(2013년 2월 기준,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질병관리본부 접수 사례 통합). 이런 가습기 살균제의 유독성이 밝혀진 지 3년이 지나도록 제조·판매 업체를 처벌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첫 번째 인터뷰 : 아내와 아기를 잃은 이 남자, "살인자는 바로…" ● 두 번째 인터뷰 : '옥시싹싹'이 망가뜨린 이 남자, 그 기막힌 사연은? ● 세 번째 인터뷰 : 삶이 파괴된 남자의 눈물 "그녀를 앗아간 회사는…" ● 네 번째 인터뷰 : 지옥에서 보낸 10년! 누가 '천사'의 날개를 꺾었나? |
너도나도 떠넘기는 부처들
지난해 7월 공정거래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 4곳(옥시레킷벤키저·홈플러스·버터플라이이펙트·아토오가닉)에 과징금 총 5200만 원을 부과했다. 인체에 유해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면서 제품 용기에 안전하다고 허위 표기를 했기 때문이다. 1사당 평균 1000여만 원에 불과한 액수다.
그나마 롯데마트와 글로엔엠에 대한 처분은 경고 조치에 그쳤다. 이들 업체는 제품 용기에 안전 성분을 사용했다는 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흡입하면 심각한 폐 질환을 일으켜 사망에까지 이르게 하는 화학 물질로 생활용품을 만들어 놓고도 업체는 모든 책임을 피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가족을 잃거나 평생 호흡기 장애를 갖게 된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간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한마디로 '우유부단' 혹은 '지지부진'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물론이고 독성 물질을 관리하는 환경부, 제품 판매를 허가하는 지식경제부, 질병 발생에 따른 정부 차원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가 모두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환경부 국정 감사에서 당시 유영숙 환경부 장관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환경부 산하) 환경보건위원회에 올려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환경성 질환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채 100일도 못 돼 장관의 말을 뒤집은 것이다.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과 손혜옥 사무관은 25일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제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돼서 발생한 사례"라며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어떻게 보호할지는 '제품 안전 기본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부의 소관이 아니"라고 밝혔다. 또 그는 "환경부에서 이에 대한 논의는 모두 끝났다"고 덧붙였다.
현재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한 조사를 진행 중인 부처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다.
지난 2011년 8월께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면 원인 미상의 폐 손상이 일어날 확률이 47.3배 높아진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동물 실험 중간 결과를 발표하며 가습기 살균제 6종(옥시레킷벤키저, 홈플러스, 버터플라이이펙트, 아토오가닉, 롯데마트, 글로엔엠)을 놓고 수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후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지난 17일 검찰이 과실 치사 및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 10곳을 놓고서 시한부 기소 중지 처분을 내린 것도 바로 질병관리본부의 역학 조사가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의 역학 조사 결과가 나와야만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것.
현재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상당수는 자신의 사례가 피해로 공식 인정됐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사건 발생 때부터 조사를 담당해온 윤승기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과 과장은 "현재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질병관리본부의 접수 사례를 통합해 357건의 피해 사례가 모였는데 이를 분류하고 조사하는 데 시간적인 어려움이 있다"며 "최대한 조사를 진행해 오는 9월까지 모든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산하 기관인 기술표준원이 가습기 살균제 제품에 국가 인증 마크를 내준 지식경제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절규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 서울 광화문 광장 해치마당에서 25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진 광화문 전시회'에 전시된 가습기 살균제. 전시회는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진행된다. ⓒ프레시안(남빛나라) |
길고 긴 소송, 피해자 구제는?
결국 피해자는 개별 소송에 나섰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다. 옥시레킷벤키저 등 기업 측은 '김&장' 등을 앞세워 소송에 적극 대응하고 있어서 피해자 대부분은 대법원까지 갈 것을 각오하고 있다. 현행 민사 소송 사건이 대법원까지 가면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통상 약 4년 정도가 걸린다. 그나마 그 결과도 낙관할 수 없다.
외국과 같은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고액의 배상액을 치르게 하는 제도다. 피해자의 손해에 상응하는 액수만을 보상하는 전보적 손해 배상(보상적 손해 배상)과는 다르다. 가해자를 '징벌'함으로써 불법 행위의 재발을 막는 데 역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천문학적 배상액을 지불해야 한다.
미국, 영국에서는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맥락에서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지난 2011년 6월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서 '하도급 업체의 기술 탈취·유용'에 한정해 원청 업체가 하청 업체의 기술 자료를 유용하면 최대 3배까지 손해 배상하도록 규정한 것이 전부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정부 기관(한국소비자보호원)과 시민 단체(참여연대 등)를 중심으로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 2006년 당시 정보통신부도 '정보 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기업이 개인 정보를 악용하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고,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그 필요성에 동감했었다.
자동차 덧칠했다가 징벌적 손해 배상액 200만 달러
지난 1996년 미국에서 있었던 아이라 고어 씨와 자동차 제조업체 BMW 간의 법적 공방을 보면 국내 기업이 얼마나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물건을 판매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고어 씨는 9개월 전에 산 BMW 자동차를 정비소에 맡겼다가 제조업체가 차의 사소한 결함을 감추려고 재칠(Repaint)한 상태에서 차를 팔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록 차는 외관상 아무 흠이 없었지만 그는 BMW가 완전하지 않은 자동차를 판매해 자신을 농락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걸었다. 결국 법원은 BMW 측이 원고에게 징벌적 손해 배상액 20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 사례의 대표격으로 스텔라 리벡 씨와 맥도날드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1994년 뉴멕시코에 거주하던 81세의 리벡 씨는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사고 나서 자동차 안에서 다리 사이에 컵을 끼우고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려다 커피를 쏟았다. 그녀는 다리, 사타구니, 둔부에 3도 화상을 입었다. 그는 맥도날드가 다른 가게보다 커피를 뜨겁게 만들어서 화상을 입었으며 지난 10여 년간 맥도날드 커피로 인해 발생한 화상 사고가 700건 넘게 있었지만 사 측이 이를 알고도 사태를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은 맥도날드가 그녀에게 약 29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중 치료비는 16만 달러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에 따른 보상액이었다. 이런 사건이 거듭되자 미국에서는 징벌적 손해 배상액이 터무니없이 크다는 비판이 일 정도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의 판례에 의해 실손해액의 네 배를 넘지 않는 범위의 징벌적 손해 배상액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손 놓고 있는 국회, 이러니 욕먹지!
한국에서는 이런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 도입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대 의견이 등장한다.
그러나 제대로 보상을 받지도 못한 피해자가 기나긴 소송 과정에서 경제적, 정신적 부담으로 2중, 3중의 피해를 겪는 현실을 고려하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징벌적 손해 배상액이 실손해액 대비 일정한 배수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면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해소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한국법제연구원이 발표한 <공정거래법 및 소비자 관련 법상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 도입 방안 연구> 역시 "소비자들은 피해를 입은 경우에 제소를 통하여 얻는 피해 구제라는 이익보다 승소에 이르기 위하여 투입하여야 하는 노력, 시간 및 비용이 더 크기 때문에 합리적 소비자라면 소송을 제기하여 피해를 배상받으려 하기보다는 소송을 포기"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에도 한국에서 이런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의 도입은 요원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성공의 기약이 없는 외로운 싸움을 수년째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제 역할을 가장 못하는 기관은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국회다.
그나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심상정 의원(진보정의당)이 26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를 위한 결의안'을 대표 발의(민주통합당 17명, 진보정의당 5명, 새누리당 3명)했다. 이 결의안은 △국무총리실에서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총괄 △질병관리본부에 접수된 피해자 중 생계가 곤란한 피해자들을 우선 지원 △환경부가 타 부서와 협력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 방안과 예산 집행 계획안을 재난 지역에 준하여 마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장하나 의원(민주통합당) 역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 대책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제안했다. 해당 의원실 관계자는 "앞으로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주시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심상정 의원, 장하나 의원의 노력에 동료 의원, 정당의 반응은 아직까지 시큰둥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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