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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서울 불바다'로? 불가능하다!"

[이철희의 이쑤시개]<10> 북핵 본질은 '안보', 경제와 안보는 교환 안 된다

북한이 계속해서 '서울 불바다', '제2의 조선전쟁', '핵 선제타격'을 언급하며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현재 한반도 안보 상황은 북한이 실제로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던 1993년 3월(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과 닮았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전쟁, 정말 일어날까?

"전쟁 나요, 안 나요? 우리 마누라도 물어봐."

"매일 받는 질문인데, 요즘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전쟁이) 안 난다는 것을 알고 확인받기 위해 질문한다."


'전쟁은 안 난다.' 지난 19일 팟캐스트 <이철희의 이쑤시개>를 찾은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의 대답은 명쾌했다. 김종대 편집장은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이 꼽는 '민간인 출신 미래 국방부 장관 1호'이다.

김종대 편집장은 '남북한 모두 준전시상태 또는 국가 비상사태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남한의 경우 "주말에 장성들이 골프장에 가고, 국방부 장관 임명은 언제 될지도 모르고, 안보실장은 유령조직"이라며 평시와 다를 바 없는 국내 상황을 예로 들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전시라면) 국가지휘시설 지하벙커에 있어야 할 지도자(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동선이 매일 (북한 언론을 통해) 나오"고 있기 때문. 김정은 위원장은 11일에는 백령도 인근 부대를 시찰했으며, 13일에는 서해에서 포격 훈련을 직접 지도했다. (☞ 팟캐스트 바로 듣기)

▲ 조선중앙TV는 지난 11일 북한 인민내무군 군인들이 '연평도의 불바다를 청와대의 불바다로', '워싱턴에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걸린 표적을 향해 사격 연습을 하는 장면을 방송했다. ⓒ연합뉴스

북핵 본질은 '안보', 경제와 안보는 교환 안 된다

<이철희의 이쑤시개>는 이날 "국방 25년" 전문가에게 그동안 북한과 관련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철희 소장은 먼저 "북핵, 퍼주기로 만든 것이냐"라고 질문했다.

김종대 편집장은 북한이 영변에 원자로를 건설한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북한이 핵을 처음 만든 게 1986년"이라며 "이때까지만 해도 연구용 원자로가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북한 개방을 위해 진행한 '7.7선언'(1988년)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적대 관계도 청산이 안 되고 점점 고립되어 갔다"며 "이게 핵개발의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 팀스프릿 훈련이 92년 3월에 재개되니까 즉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했다. 그게 94년 '서울 불바다' 위기의 본질이다. 이렇게 해서 (북한) 핵개발이 마구마구 간 것이다."

김종대 편집장은 "북한이 경제적 여력이 있을 때 그 돈을 쏙 빼먹어서 핵 개발로 전용했다기보다는 안보위기, 주로 국제 정세에 북한의 고립감이 극심할 때 핵을 개발한다"며 북한 핵개발의 본질은 안보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진보가 남북 관계 좋아지면 핵 문제가 저절로 풀린다"고 착각하고 있다며 "북한하고 경제협력이 잘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돼도, 그것이 북한의 안보를 괄목할만하게 개선하지 않는 이상 핵 문제는 나빠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북한이 (자국의) 안보가 우려되면 핵개발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것이 북한의 체제유지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북한 경제는 어려웠다 좋았다 그런다. 그럼, 돈 있으면 (핵) 만들고 안 만들고 그런답니까. 그건 안보문제이다. 본질이 안보문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경제적인 대북지원 협력하고 같은 연장선에 놓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안보 대 안보의 교환으로만 이 문제는 풀린다."

김 편집장은 "(남북관계에 있어) 지금까지 오류는 경제와 안보를 교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라며 접근법을 달리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진보 정권은 선불제, 경제 협력을 먼저 하고 정치군사 비핵화를 하자"였다면, "이명박 정권의 '비핵·개방·3000'은 후불제, 핵을 포기하면 그때 경제를 왕창 지원해주자"는 것이었다고 정리했다. 이는 진보·보수 모두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교환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노무현 정부 남북 관계, 1년만 더 연장됐어도…

이에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DJ정부 때도 햇볕정책이 경제와 안보 교환에 대해 기능주의적 접근이라는 비판이 많았는데, 개선이 안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종대 편집장은 "주로 미국의 태도에 따라서 안보, 즉 북한의 행동이 결정됐다"며 "남한의 일명 '퍼주기'와 관계없이 주로 미국이 결정적인 변수였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과 가까워지려면 주어진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경제적 문제에 몰려들게 되는 것이고 기능주의적 접근이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10.4 공동선언' 역시 "돈으로 평화를 사자는 발상이 기초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성과는 있었다. 2007년 9월 7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할 경우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협정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공동 서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 당시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의 중간 선거 패배와 이라크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북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때 조지 부시는 우리에게 천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우리도 북한과 다시 협상에 들어가고, 6자회담에서 평화체제 하기로 한 것 재가동되고, (2005년부터 동결된)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은행) 풀어주고, 갑자기 한반도에 봄이 오네. 세상에 이런 일이! 그게 이듬해에 남북정상회담으로 연결되고, 같은 시간에 중국 북경에서는 6자회담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이 같은 평화 기조는 다음 정권으로 계승되지 않았다. 김 편집장은 "그 분위기가 1년만 더 갔어도 역사가 바뀌고 우리가 지금 이런 핵문제에 시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가 북한 상대 안 하는 것은 좋은데 남들도 못하게 했다"며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6자회담 무용론'을 퍼뜨린 일을 지적했다. MB 정권이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의 최초 협력 사례"인 6자회담을 무너뜨린 것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6자회담은 2007년 9월을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단 한 차례로 열리지 않았다.

한편, 김종대 편집장은 '핵무장 주장론'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 편집장은 '우리도 한 방이 있다'는 식으로 북한에 대해서 위신은 세울 수 있겠지만, "(국내적으로) 우라늄 확보를 위해 원자력 발전소가 멈출 가능성이 크다"며 "국제적으로 NPT 탈퇴, 유엔 안보리 제재 등 지금 북한이 받고 있는 제재 똑같이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편집장은 또 지난 대선 기간 이슈가 됐던 "NLL 논쟁은 대선 패인 중 하나"라며 "민주당이 아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 관리한 의제"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논쟁은 대선 기간 새누리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서 안보 중시로 분위기가 바뀐 원인"이라며 "지금까지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권력의 성격까지도 영향을 준, 선거 그 이상의 문제"라는 말이다.

노태우 정부 '7.7선언'에서 북한 NPT 탈퇴까지

1988년 7월 7일 발표된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은 북한과의 적대·대결 관계를 청산하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 북한과 우방 간의 관계 개선을 적극 도우며 남한도 중국·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나가겠다는 정책 선언이다.

다음 해 남북한 경제교류가 시작됐으며, 1991년에는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직후 '한반도 비핵과 공동선언'이 발표됐으며, 1992년 2월 정식 발효됐다. 당시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결정적 계기는 한미 팀스피릿 훈련 중단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92년 1월 7일 팀스프릿 중지를 공식 발효했고, 같은 날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해 핵사찰을 받겠다고 천명했다.

노태우 대통령 임기 마지막이었던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중 이동복 남쪽 대표단 대변인의 '훈령 조작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의 바뀐 훈령이 회담 대표인 총리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그해 이산가족 상봉 협상은 무산됐다.

그리고 10월 6일 안기부가 "남로당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며 95여 명을 간첩 혐의로 적발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민자당은 '북한의 민주당 지지 지령'을 언급하며, 야당인 민주당에 대한 색깔공세를 폈다. 이틀 후 남한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요청해고, 1993년 3월 훈련이 재개됐다. 북한은 이에 분개하며 NPT를 탈퇴했다.

▲ <이철희의 이쑤시개> 출연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서양호 실장-김종대 편집장-이철희 소장-김윤철 교수 ⓒ김대현

* 더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 팟캐스트 <이철희의 이쑤시개> "북한이 '서울 불바다'로? 불가능하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이철희의 이쑤시개> 바로가기 클릭! http://pressian.iblug.com/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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