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 캘리포니아 주립대 산타바바라 분교의 정치학 교수인 로버트 라우차우스(Robert Rauchhaus)는 핵무기 등장 이후 세계 분쟁사를 분석한 결과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핵보유국간에는 전면전을 억제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저강도 도발에 대해 강력한 보복을 가하면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크다는 우려 때문에 확전을 자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비대칭적 상황, 즉 핵보유국-비핵국가 사이의 사례로써,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사례는 상대적으로 많다고 한다.
핵보유국 사이의 '안정과 불안정의 역설'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1999년 카르길 전쟁(Kargil War)이다. 무력 충돌은 1999년 5월 파키스탄군이 인도의 영토인 카르길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 전에도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지만, 두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한 이후 무력 충돌은 이때가 처음이어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키스탄이 선제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핵무장에 따른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러나 자칫 핵전쟁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인도는 확전 자제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카르길 전쟁은 확전으로 치닫지 않았고 전쟁 발생 2달 만에 평화협상을 통해 종결됐다. 여러 국제정치 학자들이 카르길 전쟁을 '안정과 불안정의 역설'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일컫는 까닭이다.
안보 환경이 복잡한 한반도는?
그렇다면 한반도는 어떨까? 우선 한반도의 군사안보 환경은 비대칭성과 대칭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핵무장 자체를 놓고 볼 때에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대칭적이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대칭적이다. 핵전력의 수준을 놓고 볼 때에는 미국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고, 재래식 군사력 수준에서도 미국은 물론이고 남한도 북한보다 우세하다. '안전-불안전의 역설'을 단순 적용하기 힘든 까닭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핵보유국 굳히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는 어떻게 전개될까?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곳곳이 화염에 휩싸인 연평도 ⓒ뉴시스 |
일단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 및 전쟁 가능성도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다. 우선 '안정-불안정의 역설' 이론에 따르면,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전면전 가능성은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1993년 북핵 문제 발생 이후부터 미국 내에서 유행했던 선제공격론은 오늘날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미국이 핵보유국을 공격한 사례도 아직까진 없다. 북한의 대미 선제공격은 공상과학에 영역에 속한다. 북한도 "핵 억제력"의 명분으로 이 점을 줄곧 강조해왔다. 2월 25일 <노동신문> 논설에서는 "우리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을 위한 강력한 힘을 키우기 위해 허리띠를 조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억세게 투쟁했다"며, "우리에게는 영원한 자주권과 평화로운 내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핵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군비경쟁과 군사적 긴장이 격화되면 우발적 충돌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이나 동맹국에서 핵 테러가 발생할 경우 부상할 수 있다. 핵의 출처가 북한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미국의 보복 공격이 개시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고, 심증만으로도 한반도는 급격한 전쟁 위기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억제력'과 남한의 '능동적 억제'가 만날 때
더욱 현실적인 문제는 남북한 사이에 있다. 나는 앞선 글을 통해 북한의 '핵 억제력'과 남한의 '선제타격론'이 악순환을 그리면 '코리아 아마겟돈'의 위험도 커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국지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과 2002년, 그리고 2009년 세 차례의 서해교전, 2010년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전이 잘 보여주듯 북방한계선(NLL) 인근 서해는 '한반도의 화약고'이다. 또한 반북단체의 삐라살포와 김포 애기봉 점등식 때마다 반복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도 여전하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확전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의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의 "핵 억제력"과 남한의 "능동적 억제"가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이 "핵 억제력"의 위력을 믿고 군사 모험주의를 자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파키스탄이 핵무장에 성공하자 인도의 행정구역인 카르길을 기습 공격한 데에는 카슈미르 분쟁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컸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유령선'이라고 주장해온 NLL를 무력화하기 위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거나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남한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 및 국지 도발 가능성에 대비해 '능동적 억제 전략'을 공식화한 상태이다. 능동적, 혹은 적극적 억제는 ▲교전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신속하고도 강력한 대응 ▲'선 조치, 후 보고' ▲도발 원점과 함께 지원부대에 대한 타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방침에 대해 국방부는 "적의 도발의지를 사전에 억제하고, 실제 적 도발 시 이를 격퇴하고 응징·보복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북한이 감히 어떠한 도발도 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므로 전쟁이 오히려 억제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국방부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 적 비대칭 위협 대비능력 강화, 북한 특수전 대비태세 보강, 정신전력 강화 등 4개 분야를 집중과제로 선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이러한 전략을 유지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 상태이다.
이러한 능동적 억제 전략의 문제점은 다양한 각도에서 지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군 사고와 우발적 무력 충돌, 그리고 확전의 위험성을 높인다는 점에 있다. 이 전략 채택 이후 발생한 세 가지 사례는 이러한 우려가 과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5일 후인 2010년 11월 28일에는 남한군이 북한을 향해 포탄을 오발하는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산에서 훈련 중이던 포병이 실제 상황으로 착각해 155mm 포탄 1발을 발사했는데, 다행히 포탄은 군사분계선 수백여m 이남에 떨어져 인명 피해는 없었다. 만약 북쪽 군사분계선을 넘어갔거나 한국군 GP에 떨어졌다면 남북 간 무력 충돌이나 아군의 피해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2011년 6월 17일 새벽에는 남한 해병대원이 민항기를 적기로 오인해서 사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같은 해 9월 21일에는 NLL을 월선해온 북한의 어선들을 향해 남한 해군이 경고사격을 가해 퇴각시킨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남한이 '선 조치, 후 보고'를 골자로 하는 능동적 억제 전략을 채택한 이후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가상 시나리오, 그러나
서해에서 또다시 남북 해군 간 교전이 발생하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에 휩싸인다. 교전의 발단은 NLL를 넘어온 수척의 북한 경비정이 남한의 경고 방송과 경고 사격에도 불구하고 퇴각하지 않자, 남한 해군이 '선 조치, 후 보고' 지침에 따라 격파 사격에 나서면서 시작된다. 피격을 당한 북한 경비정 일부는 퇴각했지만 잔여 경비정은 대응 사격에 나선다. 동시에 북한의 해안포 포문이 개방된 것이 확인되었고 남한 역시 자주포와 다연장 로켓 발사 준비 태세에 돌입한다. 남북한 공군기는 중무장한 상태에서 초계 활동에 나섰고, 남한 해군이 구축함과 초계함을 전진 배치하자 북한은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 발사 태세에 들어간다. 교전은 잠시 멈췄지만, 남한의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북한이 공격해오면 지원부대까지 타격하라는 지침을 하달한다.
남한 국방부는 즉각 성명을 발표해 "북한의 NLL 침범은 명백한 도발"이라고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경비정과 전투기를 즉각 후방으로 돌리고 해안포와 지대함 미사일의 발사 준비 태세도 해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북한이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의 국방위원회 역시 즉각 성명을 발표해 "NLL은 불법적인 유령선"이라는 기존 입장을 거듭 천명하면서 남측이 사죄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위협한다. 한편 미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고 동맹국인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면서도 한국 정부에게도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비밀 외교 전문을 보낸다. 중국 정부는 남북 양측에게 냉정과 자제를 촉구한다.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대책 회의를 주재하던 한국 대통령은 국방장관으로부터 긴급 보고를 받는다. "북한의 장사정포 부대와 미사일 부대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됐고 탄도미사일에는 핵탄두가 탑재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대책 회의에서는 선제타격론과 확전 자제론 사이에 격론을 벌어진다. 대통령은 북한 지도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은 현재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답한다.
'데프콘 2'가 발령됨에 따라 전시작전권을 행사하게 된 미국은 한국 정부에 세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째, "미국의 한국 방어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대북 억제력 강화를 위해 추가적인 군사력을 한반도 인근에 배치할 계획이다." 둘째, "북한의 장사정포 부대와 미사일 부대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된 것은 맞지만 발사가 임박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한국이 미국의 동의 없이 선제타격을 가하는 것은 자제해달라."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계속되면서 한국 사회는 자제론과 응징론이 맞부딪치면서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다. 증시는 폭락하기 시작했고, 외국 관광객의 여행 취소와 주한 외국인의 탈출도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군사적 긴장과 상호 비방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남북한 정부는 최후 통첩성 성명을 발표한다. 북한은 남한이 사죄하지 않으면 '곧' 보복 공격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을 가하고, 남한은 북한이 모든 무기체계의 발사 태세를 즉각 해제하지 않으면 자위권 행사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한다. 외신들은 '코리아 미사일 위기'가 시작됐다며 일제히 긴급타진하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기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가상의 시나리오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앞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들에서 다뤄보기로 하고, 몇 가지 시급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우선 '제재와 도발'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 시급하다. 유력한 방법은 추가적인 대북 제재 유예와 북한의 핵실험 및 로켓 발사 유예를 맞교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본격적인 협상을 위한 신뢰와 분위기 조성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명박 정부 시기에 거의 단절된 남북한 대화 채널을 복원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소간에 '비밀 루트'라는 정상간 대화 채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조속히 남북 정상간 핫라인 구축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때 남북 간의 합의 사항이기도 하다. 아울러 능동적 억제 전략에 대한 차분한 재검토와 NLL 문제에 대한 해법도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과 함께 미국의 북폭에 의한 한반도 전쟁 위험을 크게 걱정했었다. 그리곤 수시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 무력 사용 자제를 요구했다. 며칠 전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한 운명에 직면하고 있다. 10년 전에는 미국발 위기의 성격이 짙었다면, 오늘날에는 북한발 위기의 가능성이 높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대한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적 공간의 범위는 대단히 좁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마음먹기에 따라 주도적으로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대통령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점을 늘 가슴에 새긴다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열 수 있는 길도 서서히 열릴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