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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협동조합 만능론'에 대한 우려를 우려한다

[기고] 이제 겨우 시작…내실 있는 지원 필요

금융과 보험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5명 이상이면 누구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게 된 '협동조합기본법'이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사회는 가히 협동조합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으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그 마지막 대미를 협동조합 프렌들리로 마감하고 있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이면서 한편으로는 당연한 귀결이다. 중앙정부 뿐만 아니다. 수많은 지자체 특히 진보적 성향의 지자체에서는 지금 협동조합 육성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비록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문재인 후보는 선거공약에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강조했고, 곧 집권할 박근혜 정부 또한 협동조합을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위한 유효한 도구로 활용할 태세다. 협동조합밖에 모르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도, 지금의 상황은 좀 당황스럽고 우려 섞인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근래에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협동조합 만능론'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들이 제기하는 논점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협동조합은 그 성공 사례면에서 자본주의 기업과 비교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둘째,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완할 지속성과 확장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셋째, 협동조합은 국민의 복지 향상이라는 국가의 당연한 의무마저도 최소화해서 시장과 민간에게로 떠넘기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의 목소리는 협동조합 진영에 자성의 의미는 될지언정, 정작 필요한 도움은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협동조합의 성공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음을 십분 이해하고라도, 눈에 보이는 규모로서의 성공 사례가 자본주의 기업만 못하다고 그것이 마치 협동조합의 한계인 양 이야기하는 데는 쉬 동의하기 어렵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으면서도 왜 세계는 아직도 민주적이지 못한가,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한계가 아닌가라는 논리와도 같다. 물론 협동조합에도 한계는 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넘어서야 할 과제인 것이지, 그것이 협동조합을 폐기처분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이제 겨우 노동의 주체가 노동현장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확보된 마당에, 협동조합을 통해 이루어가야 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탐색은 뒤로 미룬 채 그것이 지닐 수 있는 한계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더욱이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협동조합 만능론'에 대한 우려가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 부족, 자본주의의 극복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은 자본주의를 낳은 성과주의와 국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협동조합의 성공과 지속성은 자본주의 기업처럼 그 규모나 수명으로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협동조합은 구성원 개개인의 삶과 그들이 놓인 사회 전체의 변화 발전에 목적이 있지, 사업체로서의 성장과 발전에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업은 협동조합의 이런 목적을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니다. 물론 협동조합의 수명과 규모는 일부 다국적 기업을 제외한 일반적인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협동조합 설립의 동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에 대한 평가 또한 그런 기준으로 매겨져서는 안 된다. 협동조합은 그 목적에 합당하게 구성원의 삶의 질과 사회 전체의 공정성 및 공평성 향상이라는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협동조합의 지속성과 확장성 역시도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과 같은 차원에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협동조합의 역사는 새로운 협동의 주체, 그 주체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업 영역, 그 사업 영역에서 펼치는 협동조합에 맞는 사업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의 과정이었다. 농업사회에서는 농민을 주체로 한 농협이, 산업화사회에서는 중소상공인을 주체로 한 신협이, 그리고 산업사회에서는 가사노동자를 주체로 한 생협이 성장 발전해온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가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협동조합은 국가로부터 배제 당하고 시장으로부터 낙오된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절실한 영역에서 자율적 협동 행위를 끌어내어 성공적인 경제 행위를 펼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협동조합의 성공을 쫒아가는 자본주의 기업과 국가로 인해 기존의 사업 영역과 사업 방식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런 상황은 사업적으로는 협동조합의 위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사업 영역을 국가의 거시적 산업정책 틀 안에서 보호받으려는 것은 소비에트의 콜호즈나 우리나라의 농협을 연상시키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협동조합의 지속성과 확장성은 그 시대에 맞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주체와 사업 영역과 사업 방식의 끊임없는 탐색 과정을 통해 담보되어야 한다. 사업 영역과 방식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한 협동조합의 사업적 위기는 다른 한편에서는 협동조합의 본질을 탐색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협동조합이 국민의 복지 향상이라는 국가의 당연한 의무마저도 최소화해서 시장과 민간에게로 떠넘기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 역시도 지극히 단편적이다. 소득의 재분배와 국민의 복지 향상은 국가의 당연한 역할이다. 하지만 이런 국가의 책무는 거저 마련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수준은 국민의 의식과 실천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 법이다. 일례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통한 노동자들의 자구적 상호부조 활동이 서구의 사회복지 정책을 낳았고, 지금도 보편적 복지의 구체적 서비스 제공 주체로서 협동조합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소득의 재분배와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당연한 책무지만, 재원 마련과 정책 입안을 넘어 재분배 실행 과정과 복지 서비스까지를 국가가 일률적으로 집행해 들어갈 때,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국민의 만족도를 떨어뜨리며 부정의 온상이 되는지를 우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국가의 책무는 그 시기별로 항상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를 국가의 수혜가 미칠 때까지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복지의 사각지대와 복지 서비스의 제공 주체를 이윤을 쫒는 자본주의 기업에만 맡길 수도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복지의 사각지대를 시민의 입장에서 서로 돌봄의 힘으로 구제하자는 것이고 복지 서비스의 질을 대면성에 기초한 수혜자 입장에서 효율적으로 진행하자는 것이지, 결코 국가의 당연한 책무를 민간에게 떠넘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근래에 제기되는 '협동조합 만능론'에 대한 우려를 깊이 있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 우려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협동조합이 필요한 사람,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협동조합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협동조합 만능론' 운운은 생경함을 넘어 거지 망태기 빼앗는 격이다. 오히려 협동조합이 만병통치약인 양 떠드는 이들은 성과주의에 빠진 정부 당국자나 그들로부터 고용된 관제 아카데미즘, 그리고 그들에 기생해서 새로운 밥벌이를 쫒는 장사치들이다. 그들은 필경 노무현 정부 때 사회적 기업이 최선이라고 떠벌렸을 터이고, 정부 지원 기간이 끝나면 자생력을 갖지 못하고 소멸해버리는 수많은 사회적 기업에 대해 나몰라 하면서 이제는 협동조합으로 사다리 갈아타기를 할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질문은, 지금 이 시대에 가난하고 지치고 쓰러진 자들의 아픔을 동감하고, 그 아픔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분석하며, 이런 아픔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고, 그 해결을 가난한 이들과 연대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다. 따뜻한 동감,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 해결책을 찾는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철저한 연대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지금은 협동조합이 만병통치약인 양 선전하고 다닐 필요도, 그러는 장사치들에게나 할 지적을 정작 협동조합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떠들 필요도 없다. 지금은 희망의 작은 불씨라도 보듬어 성취의 경험을 쌓아가야 할 때다. 누가 그 불씨가 태양이 되리라 거짓말하는가. 누구에게 불씨가 태양이 될 것처럼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는가.

물론 필자 역시도 근래의 협동조합 붐에 대해 우려하는 면이 있다. 현정부는 향후 5년간 8000에서 1만개의 협동조합을 만들어낼 태세다. 이렇게 설립된 협동조합이 어떻게 안정적으로 운영되게 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물량적 성과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일부 지자체에서 쏟아내는 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각종 지원 역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 진영조차도 이런 정부의 성과주의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설립이 기존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해서 그것이 협동조합의 설립동기를 유발하지는 못한다. 주식회사에 비해 협동조합은 아직도 그 설립 절차가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정부로부터의 지원 때문이지만, 설립 이후의 지원이 거의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런 붐은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렇게 거품에 쌓인 협동조합 유행 속에서 그나마 제대로 협동조합을 꾸려보려는 이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이 일궈내는 것이지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협동조합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다. 정부나 지자체가 만약 진정으로 협동조합의 성장을 바란다면, 협동조합에 대한 홍보와 그 설립을 위한 안내를 넘어 협동조합의 취지와 운영 방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나 지자체가 협동조합의 설립 이후까지를 걱정한다면, 각각의 협동조합이 그 사업 영역에서 성공적 사례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각종 후방 지원 체계, 즉 협동조합의 재화와 용역을 소화할 수 있는 소비 시장의 형성, 필요한 자금의 조달과 위험의 분산을 담보할 수 있는 협동조합적 금융과 보험의 구축, 협동조합 구성원의 인적 자원 계발을 위한 재교육 체계의 확립 등에 힘써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기업을 위한 경제 환경과는 다른 협동조합을 위한 경제 환경을 마련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기업에 맞게 짜놓은 경기 룰과 운동장을 협동조합에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당연한 의무마저도 최소화해서 시장과 민간에게로 떠넘기기 위한 방편으로 협동조합을 이용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협동조합은 제도의 민주주의를 넘어 생활 속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우리 사회의 유효한 도구다.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피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면,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땀을 통해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다운 사회는 사람들의 피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이번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땀을 함께 흘려 완성시켜가야 할 단계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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