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는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나 ☞<1> 우리는 왜 뉴라이트를 수구세력이라 부르는가? ☞<2>일제강점기 조선경제 발전론, 터무니없는 소리! ☞<3>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서술 |
1. 뉴라이트의 입장
1) 건국주체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련된 내용은 뉴라이트 교과서 '대한민국의 성립'(136~149쪽)에 있다. 교과서는 대한민국을 건립한 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개화기와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 온 근대화 세력과 해방 이후 미국을 따라 들어온 자유민주주의 국제세력의 결합으로 대한민국이 성립하였다."(134쪽)
식민지 근대화세력 즉 친일세력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친미세력이 결합하여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말이다. 독립운동세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민족독립운동의 전통을 부정하는 역사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교과서의 '민족독립운동의 전개'에 관한 서술이 '구색 맞추기 용'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건립한 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다음에 보인다.
"문명사의 융합과 전환을 이끌어 온 정치세력은 개항을 전후하여 전통 사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성립한 개화파가 그 선구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개화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은 긴 한국사에서 전통문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역사적 계보에 서 있다."(149쪽)
교과서는 개화파를 발전적으로 계승해온 문명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며, 그 증거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박규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으로 이어져 온 개화파를 계승하였다."(149쪽)고 하여,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개화파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잘 알다시피 이승만은 무력항쟁이나 의열투쟁의 부질없음을 공박하고 외교론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은 사람이다. 이에 맞서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무정부주의와 무장투쟁론에 근거하여 외교론을 비롯하여 문화운동론, 준비론 등을 철저히 비판하면서, 민중폭력혁명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제기했다.
▲ ⓒ연합뉴스 |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첫째는 외교론이니, (……)일본이 수십만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러 양국을 물리치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한 자루의 칼과 한 방의 총알도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며 포악한 관리나 나라의 원수에게 던지지 못하고, 청원서나 여러 나라 공관에 던지며 탄원서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의 외롭고 약함을 슬피 호소하여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 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 년 만의 처음 당하던 치욕에 조선민족의 분노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 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리고도 나라가 망한 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아무개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미일전쟁・러일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에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분발하여 전진하는 의기를 쳐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이승만의 외교론은 미일전쟁이 현실화될 때까지 한국인은 무력투쟁을 삼가고 실력양성과 외교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승만에게는 한국의 독립전망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919년 국내의 3・1운동 발발과 거의 동시에 미주지역에서 제기되었던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청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쟁에 대한 책임과 유럽 각국의 영토 조정, 전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이승만은 "당분간은 한국을 국제 연맹 통치 밑에 둘 것을 바랍니다."라는 요청을 담은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문을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고안된 위임통치제도란, 식민지 재분할에 따른 승전국 열강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약소민족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제도적 장치로서, 실제로는 특정 수탁국의 식민통치와 하등 바를 바 없었다. 그것은 아프리카와 태평양지역에 퍼져 있던 독일의 식민지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형식을 빌려 승전국 열강이 분할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분명해진다. 이승만은 한국인의 자력에 의한 독립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차선의 해결책으로서 미국의 잠정적인 한국 통치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 내 독립전쟁론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특히 단재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다."며 분개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이러한 이승만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을 서술할 때, 3・1운동의 결실인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통일전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중국 관내의 민족주의세력이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임정의 이념과 노선도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무장독립노선을 지향하게 되었다. 임정은 1941년에 발표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통해 독립국가의 체제 및 정책 방향의 대강을 밝혔는데, 그 주된 내용은 보통선거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의 수립, 토지와 대 생산기관의 국유화, 국비교육과 사회보장제 시행 등이다. 이처럼 임정이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했다는 점은 식민지시기 우익 민족주의의의 질적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처럼 독립운동이 민족해방을 전망하면서 좌우익의 분립과 대립을 극복하고 질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뉴라이트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독립은 연합국이 준 '선물'이라는 외인론의 입장에서, 타율적 해방론에 따라 '대한민국의 성립'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외세에 맞서 싸운 민족독립운동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것은 곧 민족의 독립능력과 자치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전형적인 '자학사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타율적인 해방론은 해방공간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한 중도세력은 물론, 정부수립에 참여한 우익진영조차도 배척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가장 우파적인 헌법초안은 행정연구회가 만든 '한국헌법'이었다. '한국헌법'은 민권옹호 투쟁의 역사를 가진 불란서나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상실하였던 국가를 찾는다는 점, 즉 광복한다는 점에 대한민국 건국의 특수성이 있다"라는 인식하에서 마련된 헌법초안이었다. 대한민국은 인권옹호투쟁의 역사는 비록 미약하지만 반면에 국권회복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입장이다.
대한민국 출범과 함께 제정된 제헌헌법을 기초한 인사는 유진오 박사이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보인 친일 행적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다. 유진오 박사는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 해설에서, "우리가 지금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데 이는 단순한 연합각국의 승리와 후원의 선물이 아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3・1정신과 같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종시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한 결과이며 금반 헌법을 제정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정부도 기미년에 삼천만의 민의에 의하야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하는 것이라는 것을 웅장하게 선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헌법해의, 15~16쪽). 대한민국의 독립은 연합국이 준 선물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불굴의 투쟁으로 쟁취하였다는 주장이다. 아무리 우파세력이나 친일인사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을 건립한 주체는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민족운동세력이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흐름을 배제한 채 대한민국의 역사를 친일세력과 친미세력 중심으로 이해한 결과, 교과서는 민족독립운동이 추구했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의 전통을 외면한 채,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기초로 출범하였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사저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마지막 청사인 경교장이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오후 시민들에게 복원현장이 공개되고 있다. ⓒ뉴시스 |
2) 정치체제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하면서 표방한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이며 경제이념은 자유시장경제라고 주장한다.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태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는데, 그 까닭은 "이 국가가 인간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기에 적합한, 지금까지 알려진 한 가장 적합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6쪽)이라고 하였다. 뉴라이트의 이론가인 이영훈 교수의 글에서도 같은 내용이 확인된다.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국제의 기본으로 하여 출발하였습니다."(<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223쪽)
심지어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날 한국의 자유시장경제는 어떻게 성립하였나?"와 같은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찾는 데 있다고까지 교과서는 말한다(12쪽).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뉴라이트 역사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인 셈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주장만 무수히 되풀이할 뿐, 그 근거를 어느 곳에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파악하려면 헌법에 의거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적 공동체의 존재형태와 기본적 가치질서에 관한 합의를 법규범적인 논리체계로 정립한 국가의 기본법이 헌법이기 때문이다. 헌법은 대립하는 정치세력이 공존을 위해 정치·사회적 질서에 관한 합의를 규범화한 것이다. 때문에 헌법에는 사회구성원이 합의한 정치이념과 가치질서가 정립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정부수립과 함께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를 제헌헌법 또는 건국헌법이라고 한다. 제헌헌법에는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가치질서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이를 근거자료로 삼으면 된다. 교과서의 제헌헌법에 대한 서술은 다음 두 부분이다.
⓵ "제헌헌법은 7월 17일에 공포되었다. 헌법은 한성임시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을 주권이 있는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였다.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권・자유권・재산권・교육권 등의 기본권을 인정하였다. 헌법의 권력 구조는 내각적 요소가 섞인 대통령제로 결정되었다. 헌법은 건국 이후의 정치 과정을 규정한 몇 가지 중요 사항을 담았다. 헌법은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농지개혁을 기정사실화하였다. 또한 '해방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142쪽)
⓶ "대한민국은 혼란 속에서 어렵게 출발했지만 지금까지 세계가 주목하는 물질적, 정신적 발전을 성취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이 확고히 정착되고, 보통선거로 정권을 평화롭게 교체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주주의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빈국의 수준에서 1995년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위업을 거두었다. 대한민국의 이 같은 발전은 1948년의 제헌헌법에 담긴 건국의 이념과 방향이 정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건국 이후에도 적지 않은 시련과 도전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건국의 기초 이념을 충실히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148쪽)
⓵은 제헌헌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은 채, 주변적이며 비본질적인 내용만 서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헌헌법이 지니는 역사적・정치적 의미를 부인하였다.
⓶는 "제헌헌법에 담긴 건국의 이념과 방향이 정당했"다는 주장만 하였을 뿐, 건국이념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후반부에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건국의 기초 이념을 충실히 발전시킴으로써"라고 하여, 건국의 기초이념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하였는데, 어떤 민주주의이며 어떤 시장경제인지는 여전히 밝히고 있지 않다. 문맥상으로만 보면, 제헌헌법이 지향하는 가치가 마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이 표방한 민주주의는 교과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미국에서 직수입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전통을 반영한 역사성이 있는 민주주의였다. 제헌헌법은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약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고, 실질적·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헌법이 지향하는 정치체제는 교과서가 말하는 것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최소강령에 해당하는데, 이는 자유롭고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평등한 투표권을 수단으로 하는 정치적 참여의 권리, 선출된 대표에 의해 통치되는 정부, 신체적 자유와 표현·양심·집회·결사·언론 등의 자유 등을 골자로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대의제의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면서 체제 내에서 혁명적 변화를 꾀했는데, 유럽의 경험은 사회민주주의로는 애초 기대했던 변혁은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시민권의 내용이 자유권에서 사회경제권으로 확대 심화하여 민주주의가 실체화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회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는 구현하지 못했지만, 계급정당과 의회의 타협정치를 통해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면서도 대부분의 삶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해주는 복지국가를 이룩했다(최갑수, 2012).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형식적・절차적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인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적・사회적・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19세기에 이르러서 등장하였는데, 그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세기 후반에 흥기한 산업자본주의는 19세기에 이르러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소수의 번영과 다수의 기아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탄압을 거치면서도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정치적 개혁을 주창하는 움직임인 차티스트운동이 성장했다. 이러한 사회적 파국과 위기의 상황에 대한 자유주의의 응답이자 적응을 위한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였다. 즉 최초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기본전제를 수용하면서도 정치적 선거권의 영역에서 민주주의(평등)의 요소를 도입하려 했던 이념적 조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자본주의의 모순은 기존의 자유주의 형태를 가지고는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자유주의의 응답이 자유민주주의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또한 형식적 평등에 치우쳐 경제적 약자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실질적인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가 19세기 중엽에 등장하였다. 자유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 보장을 최고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인데 반해,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 사회적 정의·복지와 평화주의를 가미한 민주주의이다. 자유권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생활영역에서의 민주주의 이념으로, 사회권을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생활영역에서의 민주주의 이념으로 강조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절차적 제도적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실질적 평등을 통해 인간 존엄성을 보장하려는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성과 개혁성 그리고 혁명성을 담고 있다. 생산수단의 사회적(공적) 소유와 사회적(공적) 관리에 의한 사회의 개조를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 까닭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 때문이었다. 자유주의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수용해 자유민주주의로, 그리고 이어 다시금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수용해 더욱 개혁적인 민주주의 즉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해간 과정은 광범위한 사회갈등과 투쟁과 희생을 수반한 고난에 찬 과정이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은 정부수립을 하면서 정치현실을 규제하고 기본적인 가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헌법을 제정하였다. 헌법을 제정하면서 무엇보다도 어려움을 느낀 것은 헌법의 기본정신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헌법 기초위원으로 참여하였던 유진오 박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 1948년 유진오 작성 제헌헌법 초안. 1948년 헌법학자 고(故) 현민 유진오가 육필로 작성한 것으로 현재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연합뉴스 |
"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끝까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서는 그들을 희생해도 좋다는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으나, 그렇다고 무제한 한 자유가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를 결과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무정부적 상태로 빠지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면서, 거기서 올 수 있는 폐단을 제거 또는 방지하느냐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고, 해방 후 대학 강단에서 계속해 중점을 두어온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나는 그것을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란 용어로 설명하기도 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18세기적 고전적 헌법개념'에 대한 '20세기적 현대적 헌법개념'이란 용어로 설명하기도 하였다.)"(헌법기초회고록, 20쪽)
자본주의체제에서 발생하는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폐단을 치유하기 위해, 정치적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 이념을 헌법의 기본정신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1948년 6월 23일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제안 이유에 대한 설명은 기초위원회를 대표하여 유진오 박사가 하였다.
"이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꾀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면 불란서혁명이라든가 미국의 독립시대로부터 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어 온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위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경제적 균등을 실현해 보려고 하는 것이 이 헌법의 기본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면서 이 자유와 평등이 국가 전체의 이해와 모순되는 단계에 이르면 국가권력으로써 이것을 조화하는 국가체제를 생각해 본 것이올시다."(헌법기초회고록, 236쪽)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헌법의 기본정신으로 삼되, 양자가 가치충돌을 일으키면 국가권력이 나서서 조정하는 국가체제를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즉 제헌헌법의 최고 정신은 자유보다는 평등이라는 것이다. 유진오박사는 대한민국 헌법의 특징으로, 가장 먼저 '균등사회의 수립을 기한 것' 즉 경제적 민주주의의 수립을 들었다.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보장하고 그의 창의를 존중하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어느 민주국가의 헌법에도 뒤지지 않으며 각국 헌법이 열거한 국민의 권리와 자유는 거진 빠짐없이 규정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간에 빈부의 차이가 현격한 현재에 있어서는 국민에게 법률적, 형식적으로 자유, 평등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는 영토에 비하야 인구가 조밀할 뿐 아니라 산업의 발달이 충분하지 않어서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려면 국가가 일방으로는 국민의 자유, 평등과 권리를 될 수 있는 대로 보장하는 동시에 일방으로는 적극적으로 국민의 균등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하므로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의 균등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야 특히 노력하였으며 그를 위하야 제종의 규정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나라 헌법은 다른 민주국가와 같이 정치적 법률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헌법해의, 10쪽)
제헌헌법은 제5조에서,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될 수 있는 대로 존중하고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그를 적극 보호하고 조정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함으로써 경제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천명하였다. 민주주의라 하면 과거에는 정치적 민주주의 즉 각인의 자유를 정치적으로 확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경제, 사회, 문화의 제 영역에 있어서도 또한 각인의 자유를 확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인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것은 과거에 있어서와 같이 자유방임주의를 취한다는 의미가 아님이 물론이다. 그러기에 다시 제84조에서 우리나라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며, 또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제5조가 규정한 대원칙을 더욱 구체적으로 천명하였다.
이처럼 제헌헌법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추구한 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전통이 영향을 끼쳤다. 하나는 1919년에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헌법이다. 이 헌법은 종래의 비스마르크헌법과는 달리, 민주주의 원리의 바탕 위에서 독일국민의 통일을 지도이념으로 하고, 다시 사회국가적 이념을 가미한 특색 있는 헌법이었다. 바이마르헌법은 사회국가 즉 복지국가의 이념을 취하여 근대 헌법상 처음으로 소유권의 의무성을 인정하고, 재산권행사의 공공복리 적합성을 규정하였으며, 생존권을 보장하였다는 점에서 20세기 민주주의 헌법의 전형이 되었다.
제헌헌법에 영향을 준 또 하나는 평등주의를 추구한 민족독립운동의 전통이다. 3.1운동 이후 민족평등, 국가평등, 인류평등의 대의가 민족독립운동의 핵심적인 가치였다. 이 중 민족평등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1일에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을 선언하였다.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기본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1930년 이후 중국 관내(關內)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단체 간에는 이념적 차이는 없었으며, 그 이념을 건국강령이 대변하였다. 건국강령은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앞둔 시점에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합의한 미래사회의 준칙이었다. 건국강령은 민족통합의 핵심이념으로 균등주의를 추구하였다. 임시정부에서 등장한 균평・균등이념이 제헌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지향가치가 되었던 것이다.
3) 경제이념
뉴라이트 교과서는 "대한민국은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장경제체제로 출발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건국의 기초 이념을 충실히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148쪽)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장경체제체란 자유시장경제를 뜻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는 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이지요."(<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73쪽)라고 하여, 대한민국이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은 식민지시기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 체제를 복구,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아담 스미스적 자유방임주의는 20세기 중엽에 처한 한국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신하였고, 그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인의 대부분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불만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였다(헌법기초회고록, 42쪽). 자유방임주의 체제 하에서는 우승열패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약자는 도리어 자유를 확보치 못하는 것이 상례이며, 그것이 또 정치적 민주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되기 때문이었다.
자유시장경제는 해방공간에서 우익세력조차도 배척하였다. 민족독립운동 기본이념인 균등주의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1948년 당시 가장 우파적인 헌법이 행정연구위원회가 기초한 '한국헌법'이다. '한국헌법'은 제2편 국민의 권리 의무 제3장에 경제생활을 아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경제 질서의 기본원칙과 관련하여 '한국헌법'은 임시정부 헌법, 건국강령의 균평・균등 이념을 대체로 계승하고 있다. 즉 당시 가장 우파적인 헌법임에도 불구하고, 제 75조에 "국민각개의 균등생활의 확보"와 "민족전체의 발전" 및 "국가보위"를 위한 정의의 원칙을 경제의 기본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의 경제상 자유도 이 한계 내에서만 보장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 헌법의 기본원칙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의 내용과 동일하며, 건국헌법과도 거의 동일하다. 또 다른 주목할 점은 경제생활 및 경제 질서를 기본권에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과 마찬가지로 경제 장을 따로 두지 않았으며, 경제생활에 관련된 조항들을 기본권에 편입시키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좌우파 모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48년 4월 유진오의 '최초의 초안'이 작성되기 이전의 헌법문서는 모두 동일한 특징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기본권에 헌법의 경제체계를 규정한 것은 균평・균등 이념이 헌법의 기본이념이자 민주공화주의의 구체적인 실천이념이었음을 시사한다(서희경・박명림, 2007).
우파의 이념을 대변하는 '한국헌법'은, 건국강령이 규정하고 있는 토지 국유와, 적산몰수,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언급하고 있지 않아, '소유'에 관한 사항은 조심스럽게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소유권은 법률의 정하는 제한 내에서 이를 보장함. 소유권은 의무를 포함함. 소유권의 행사는 동시에 공공복리를 위하여 함을 요함. 소유권의 공용 징수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상당한 보상으로써 함을 요함"(한국헌법 77조)라 하여, '소유권의 공공성'마저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제헌헌법의 특징은 '경제'에 관한 규정을 별도로 장을 마련하여 두고 이에 관한 대원칙을 밝혔다는 점인데, 그 이유에 대해 유진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경제에 관한 규정을 헌법에 설치하는 것은 18,9세기 헌법에 있어서는 재산권의 신성불가침을 규정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현상이었었는데, 그 시대에는 각인의 경제생활은 오로지 각인의 자유에 맡기고 국가는 가능한 한-즉 각인의 자유 활동의 결과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함에 이르지 않는 한-그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주의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전에 누설한 것과 같이 빈부의 현격이 심해져서 국내에 있어서의 계급 간의 투쟁이 격화하고 사회적 경제적인 난문제가 층생첩출하여 종전과 같이 각인의 경제생활을 각인의 자유로 맡겨두고 국가는 될 수 있는 대로 이에 간섭하지 아니하는 것은 민주주의 본래의 목적인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케 하며 그들의 균등 생활을 보장하는데 도리혀 장해가 있음이 명백하게 되어 독일 와이말 헌법을 위시로 하는 제일차세계대전 이후의 20세기 각국 헌법은 경제에 관한 규정을 극히 중요시하여 그에 관한 규정을 많이 설치함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헌법도 그의 예를 따라 본장에서 6조에 걸쳐서 경제에 관한 대원칙을 선명한 것이다."(헌법해의, 176쪽)
국민의 균등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바이마르공화국헌법을 준용하여 제6장에 별도로 경제조항(제84조~89조)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마르헌법이 경제조항을 별도로 둔 까닭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고전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소유권의 신성불가침과 경제활동에 대한 사적 자치가 원칙이었고 작은 정부가 좋은 정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헌법도 자유권과 재산권의 신성불가침을 규정하였고 별도의 경제조항은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내재한 여러 모순, 즉 경제적 빈곤과 불평등, 노사 간 대립, 국민경제의 불균형과 불안정, 공황 등이 새로운 시대적 문제로 터져 나오면서 헌법도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은 이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부응한 최초의 사회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헌법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은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와는 또 다른 조건에서 만들어졌으며(민족해방운동 경험, 한반도와 세계적 규모의 좌우 대립 등), 바이마르헌법에 비해서도 국가 역할이 훨씬 더 크고 평등주의 요소도 강하다. 또한 한국 제헌헌법의 편제 방식이 바이마르헌법의 편제와는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이마르 헌법에는 기본권 영역 안에 경제조항을 두고 있는 반면에, 우리 제헌헌법은 경제조항(제6장)을 기본권 조항(제 2장 국민의 권리 의무)과 별개의 장으로 두고 있다. 이렇게 기본권 영역과 별도로 경제조항이 설정되어 있음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바이마르 공화국헌법 정신을 따른 한국 헌법의 경제이념은 수차례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이는 우리 헌법의 경제이념이 고전적 자유주의를 넘어선 사회국가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념을 보존하고 있음을 말한다.(이병천, <대한민국 헌법의 경제이념과 제119조의 헌정사>)
한편 유진오 박사는 제헌헌법에서 별도로 경제 장을 마련한 까닭은, 헌법 전문(前文) 과 제5조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구체화하여 우리나라가 채용하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제 원리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대원칙은 제84조의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 된다"(제84조)는 것인데, "국민에게 가능한 최대한도의 경제상의 자유를 허용하여 그의 창의를 존중하고 발휘시키는 것은 국가경제의 발전을 위하여서든지 또는 국민의 명랑한 생활을 위하여서든지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자유를 무제한하게 허용하면 경제상의 강자의 횡포를 야기하고 빈부의 현격한 차이를 초래하여 민주주의의 목적에 도리혀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본조는 국민 각자의 경제적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여 국민의 균등생활의 확보를 기한 것이다"(헌법해의, 178쪽). 헌법이 제84조에서 밝힌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대원칙은 다음 두 가지이다.
▲제헌헌법 전문 대한민국 지. 제헌헌법 전문을 한 글자씩 정성스레 새겨 넣어 대한민국 지도를 완성한 한한국 세계평화작가의 '희망대한민국 원형백자' ⓒ연합뉴스 |
"첫째, 사회정의의 실현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질서는 먼저 사회정의의 실현을 기본으로 한다. 사회정의의 실현이라 함은 막연한 것 같으나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여 일방에는 의식이 풍족한 국민이 있는데 일방에는 기한에 신음하는 국민이 있는 것과 같은 사태를 없게 함을 말한다. 그리고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함은 최저생활을 확보한다는 의미보다는 넓으며 생리적 최저생활을 확보하는 동시에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생활을 확보할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수립이다.
다음에 우리나라의 경제 질서의 대원칙은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수립을 기하는 데 있다. 즉 국민경제가 균형 있게 발전되지 못하며 소비자재의 생산과 생산자재의 생산이 균형을 얻지 못한다든가 일부 산업만이 발전하고 일부 산업이 부진하다든가 부의 편재가 심하다든가 하면 결국에 있어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으로 각 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하고 국민 각층의 경제상의 차이를 완화시키기 위하야 필요할 때에는 국가는 적극적으로 국민경제에 간섭하고 그를 조정하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질서는 이상과 같은 2대원칙을 기본으로 하게 되였는데 따라서 각인의 경제상의 자유는 이 2대원칙의 범위 내에서 인정되게 된다. 즉 각인의 경제상의 자유 활동이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장해(障害)가 된다든가 또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하는데 방해가 된다든가 하면 각인의 경제상의 자유 활동은 그 한계에 있어서 제한을 받는 것이다."(헌법해의, 178-9쪽).
그리고 제헌헌법은 제84조에서 천명한 경제 질서의 대원칙을 구체화하여, 국민경제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국유로 하는 규정(제85조),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규정(제86조),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중요 기업은 원칙적으로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는 규정(제87조),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요하고 절실한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제88조) 기업의 '사회화' 규정 등을 두었다.
이상 제헌헌법은 특정계급이 아닌 한국민족 전체의 균등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자유시장경제를 부정하였다. 반면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schaft)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복지국가를 지향하였다.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라 함은 사유재산제의 보장과 자유경쟁을 기본원리로 하는 시장경제질서를 근간으로 하되, 사회복지·사회정의·경제민주화 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통제경제)를 가미한 경제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균평 균등에 가까운 민주공화주의는 1954년 개헌 시점에서 미국의 요구로 자유시장경제체제와 원칙이 도입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된다. 국유 및 국영에 관한 헌법 조항들은 시장경제원칙에 따라 한국전쟁 후 삭제되거나 크게 수정되었다. 1919년 이후 건국헌법을 거쳐 견지되었던 균평·균등주의가 자유주의 시장경제 원칙과 본격적인 경쟁관계에 돌입한 것이다. 1954년 헌법은 한국 현대 헌법정신과 원칙의 뚜렷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에는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였다. 대외원조, 투자유치를 명분으로 한 경제 질서의 개편요구였다. 실제로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관료들에게 국유화의 조항 등이 외국인 투자유치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지적하며, 경제운영을 민간 기업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 것이 시장경제체제로의 헌법 개정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적어도 경제민주주의에 관한 한 1954년 이후에도 근본적인 수정이나 전면 부정은 없었다는 점이다. 현행 1987년의 헌법 역시 119조 2항에서 이러한 점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을 갖는 조건에서 한국은 시장경제로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왔다. 요컨대 한국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에서 균평 균등 이념과 경제민주주의 정신은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왔던 것이다.(서희경・박명림, 2007)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정하였다.
"우리 헌법의 경제 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헌재 1996.4.25. 92헌바47)
"우리 헌법은 자유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헌재 1998.5.28. 96헌가4등)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로 형성되는 것을 일차적으로 하나, 경제를 개인과 기업에만 맡겨둠으로써 발생하는 소득불균형, 경제력 남용, 경제주체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경제에 관한 국가의 보충적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시장은 '자유주의 시장'이 아니라 '조정된 시장'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시장'이라는 것이다.
이상 제헌헌법은 시민권의 내용을 자유권에서 사회・경제권으로 확대 심화하여 민주주의가 실체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헌헌법은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면서도 국민의 삶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해주는 복지국가를 추구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제(國制)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라는 뉴라이트 주장은 역사적 사실(史實)과 배치되는 시대착오적인 도그마일 뿐이다.
4) 헌법정신 부정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기본가치를 줄곧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고 말해 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65년 전 우리는 그토록 갈망했던 광복을 맞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우리 민족은 인류사의 보편적 길로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두 바퀴로 삼아 '발전의 신화'를 창조할 토대를 닦았습니다"(2010.8.15.)라 하여, 마치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양 말하였다.
▲ 지난 2006년 1월 23일,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박근혜(왼쪽) 당시 대표가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뉴라이트 교사연합 창립대회'에 참석,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새누리당의 대선후보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역시 "만약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 나라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것이 보수라면 저는 자랑스럽게 보수를 택할 것이고, 그런 게 진보라면, 자랑스럽게 진보를 선택할 것이다"(2007.2.8.)라 하여, 마치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헌법가치인양 말하였다. 그는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걱정을 덜었다"는 축사를 하기도 하였다(2008.5.26.). 뉴라이트 역사관을 신봉하고 헌법가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는 일란성쌍생아인 셈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최근 중・고등학교 역사교육에까지 침투하였다. 작년에 있었던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지침 개정사태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2011년 12월 30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확정・발표한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을 보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17쪽)라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서술에서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 현대사를 가르치는 중심 개념이었다. 이를 시장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로 바꾸게 되면,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발전을 설명하는 틀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또한 독립운동을 비롯한 한국 근대사를 보는 틀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 교육과정의 내용체계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작년에 갑자기 등장하게 된 까닭은 뉴라이트의 역할 때문이다. 뉴라이트 계열인 한국현대사학회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할 것"을 교과부에 요청하자, 정부가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하여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사회과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민주주의'를 모조리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한 것이다(2011.8.9.).
이에 대해 역사학계는, 교과부가 근거로 주장하는 헌법 전문에 쓰여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라, 독일 기본법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the principles of freedom and democracy)'를 의미한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게다가 (1)지금까지 사용해온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2)용어를 바꾸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도 무시하였고 (3)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정의조차 하지 않았으며 (4)사회, 도덕(윤리), 정치, 경제 등 과목에서는 민주주의라고 쓰는 반면 유독 역사 과목에서만 자유민주주의를 사용하는 것은 과목 간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나, 교과부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강변하는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세력의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며, 공화주의와 평등주의의 전통을 지닌 독립운동의 역사를 외면한다.
둘째, 독재체제를 찬양하며, 모든 억압, 착취, 배제, 차별 등에 대해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폄하한다.
셋째, 냉전체제를 선호하며,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체제구축과 평화통일을 비난한다.
이로 볼 때, 뉴라이트 역사관은 친일・독재・분단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헌법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는데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헌법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였다고 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불굴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세운 나라이다. 헌법은 반침략·반독재의 역사적 경험을 계승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둘째, 헌법 전문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 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사회복지국가를 지향한다.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셋째, 헌법 전문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한다고 한 것처럼, 평화통일과 평화주의를 지향한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지우며(66조 제3항),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을 준수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
헌법이 부여한 자유, 평등, 민주, 평화 등의 가치가 현실에서 실효성을 발휘하여 헌법이 '권리장전'으로서의 실질적인 역할을 할 때, 대한민국의 정통성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정부가 나서서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 고시하였다. 또한 헌법정신에 따라 나라를 이끌어갈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자유민주주의'라며, 앞장서서 헌법정신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정책을 "헌법적 가치와 국익의 관점"에서 결정해왔다고 호언장담한(2007.2.8.)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역시, 반민족・반민주・반평화 등의 헌법적 가치에 반하는 내용으로 점철된 뉴라이트교과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이제 걱정을 덜었다"는 축사를 하였다.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작태들이 아닐 수 없다.
참고한 글
유진오, 『헌법해의』, 명문당, 1949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일조각, 1980
이병천, 「대한민국 헌법의 경제이념과 제119조의 헌정사: 지배의 정당성 대 민주적 정당성」
서희경・박명림, 「민주공화주의와 대한민국 헌법 이념의 형성」 정신문화연구 봄호 30권 1호(통권 106호), 2007
최갑수, 「서양의 민주주의-이념과 변용」 제55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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