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 상처 입은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일 게다. 누구나 갖고 있는 깊은 상처의 기억. 여기엔 종종 공통점이 있다. 뿌리를 캐보면 학창 시절의 경험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요즘 논란이 되는 학교폭력 사건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학교는 오래 전부터 꽤나 폭력적인 곳이었다. 주먹질로 코피를 터뜨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다. 마음에 멍자욱을 남기는 것도 폭력이다. 집안 환경, 성적 등으로 줄 세우는 학교 문화, 개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는 교사 등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어른이 돼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넓게 보면, 이들 역시 학교폭력 피해자다.
마침, 학교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도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몸이 다친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 역시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기 마련이므로, 너도나도 '힐링'을 강조하는 현상은 일단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주먹질과 달리 눈에 띄지 않는 폭력은 가해자를 찾기 어렵다. 상처에선 고름이 흐르지만, 누가 낸 상처인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사회 전체가 가해자와 공범이니까. 아파트 평수 때문에 당한 따돌림, 이게 누구 책임이란 말인가. '힐링' 열풍이 때로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래서다.
학교폭력 연속 인터뷰 기획 여섯 번째로 만난 사람은 현직 초등학교 교사다. 중앙정부와 교육청이 학교폭력 관련 공문을 수시로 내려보내는 올해 1학기를 거치며, 그는 학교에 대한 절망감만 더 깊어졌다. 하필 교육청이 요즘 학교폭력과 관련해 강조하는 단어 역시 '힐링'이다. 그러나 하루종일 아이들과 부대끼는 그가 보기에, 교육청 프로그램 전단에 찍힌 '힐링'이라는 단어는 영 공허하기만 하다. 부모의 소득에 따라 끼리끼리 뭉치는 요즘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려면, '힐링'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질 때, 아이들의 상처는 조금씩이나마 아물어간다.
구조를 바꾸자는 말. 역시 공허하게 들린다는 걸 그 역시 잘 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그게 솔직한 태도라고 본다. 아이들의 내면에 깃든 폭력성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런 폭력성을 잉태한 시간의 무게만큼, 혹은 그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폭력을 지워갈 수 있다. 학교폭력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것,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것. 그게 솔직하지 않은 태도다. 정 교사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교육공동체 벗 펴냄)이 최근 잇따라 특집기사로 낸 내용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학교의 교육 불가능', 그 구조적인 절망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용주 서울 백석초등학교 교사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18일, 서울 성산동 '교육공동체 벗'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정용주 교사. ⓒ프레시안(최형락) |
"한두 달 안에 급조된 대책으로 학교폭력 도려낸다는 발상, 우스운 일 "
프레시안 : 학교폭력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하지만 막상 학교 현장의 목소리는 덜 소개된 듯 하다. 실제로 어떤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교 폭력 관련 공문도 많이 내려온다던데….
정용주 : 그렇다.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학교폭력 근절 대책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론의 뭇매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다.
어차피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몇 가지 없다. 전수조사를 통해 학생들이 학교폭력 경험이 있나, 없나를 파악하는 정도다. 여기에 그동안 거의 열리지 않았던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분기별로 소집하라 게 고작이다.
경찰 차원에서 실적을 높이려는 움직임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계기관들이 학교에서 학교폭력 대책 연수를 한다. 하루는 검사가, 또 하루는 경찰서장이 직접 찾아와 연수를 한다. 학부모와 교사들에게도 연수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한두 달 안에 급조된 대책으로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도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정부가 학교폭력을 너무 기계적으로 정의하고 대응하는 느낌이다. 예컨대 교과부 대책을 보면, '한 아이가 같은 아이와 두 번 이상 싸우면 학교폭력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아이들이 분노를 표현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폭력이야'라고만 말하면, 한계가 뚜렷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수밖에 없다. 폭력이 이런 식으로 해결될까. 아니라고 본다.
현병호 <민들레> 대표의 지적대로 '사과가 썩었는데 그거 그냥 걷어내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다른 사과도 썩었을 수 있기 때문에 상자가 문제인지, 비료와 흙이 문제인지 다각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누가 폭력적인지를 짚어내는 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련 기사 "'일진' 솎아내면 학교폭력 해결?…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
"못 사는 동네 애들과 분리시켜달라는 학부모들, '은밀한 폭력'이 진짜 무섭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이 공론화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책을 내놓은 덕분에, 학교폭력이 조금 줄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용주 : 학생들끼리 휘두르는 가시적인 폭력은 줄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외에 교사와 학생 간, 또는 학생과 학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폭력'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은밀한 폭력'은 데이터에 안 잡힌다.
폭력을 보다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은밀한 폭력'까이 아울러서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들에게 사회가 전달하는 가치가 문화화·제도화 되어 있는 게 학교다. 교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경우가 있다. 학군이 같아서 잘 사는 지역과 못 사는 지역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 에 다니게 됐다. 그런데 잘 사는 지역 학부모들이 교육청에 진정을 넣었다. 못 사는 지역의 아이들 때문에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며 학군을 조정해달라는 게다. 결국 못 사는 지역의 아이들만 다니는 학군과 잘 사는 지역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군으로 쪼개졌다. 이건 폭력이 아닌가. 맞다. 학부모와 교사의 폭력이다. 학교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봐서는 안 된다.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학교 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누가 더 학교의 여론을 더 형성하기 쉽겠는가. 더 많이 배운 사람들, 잘 사는 엄마들과 그런 엄마를 둔 아이들이 의견을 형성해 나간다. 당연히 소외되는 사람이 생긴다.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다"
프레시안 : 학교 구성원이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했을 때도 폭력적인 상황이 생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른들의 경우 말고, 아이들끼리 자율적으로 하는 의사결정이라면 어떨까. 그 경우에도 폭력적인 상황이 생길까.
정용주 : 그렇다. 아이들 역시 순수하지 않다. 아이들도 폭력성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실제로 폭력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스스로 체득한 것일 수도 있고, 부모나 사회에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마냥 순수하다면 평화적 감수성을 기르는 게 별로 힘들지 않을 게다. 그게 아니므로, 폭력적 문화에 노출된 것보다 몇 배가 되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아이들의 평화적 감수성을 개발할 수 있다.
학교폭력은 다층적으로 봐야 한다. 굉장히 구조화되고 심화된 학교폭력의 영역이 있고,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한번 싸우고 마는 지속성이 없는 폭력이 있고, 학교끼리 묶인 일종의 카르텔 형식으로 조폭처럼 움직이는 폭력도 있다.
최근에는 머리를 쓰면서 잔혹한 방식으로 학생들끼리 왕따를 시키는 경우가 늘었다.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중 한 명은 이를 '단속사회'라는 말로 표현했다. 특히 거주지별로 계층이 분화되면서 못사는 지역과 잘사는 지역 아이들의 구분이 선명하고, 못사는 지역 내에서도 일종의 순혈주의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평수, 어떤 아파트에 산다는 기준에 의해 자기들끼리 철저하게 배척한다. 이런 폭력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이런 폭력은 눈에 잘 띄지 않고 크게 이슈가 되지도 않는다.
'학교가 폭력의 숙주다'라는 명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실 학교만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곳도 드물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 사회 역시 뭔가 좀 특이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배격한다. 이런 구조에서 폭력이 싹튼다.
"'학교 착각'에서 벗어나야…"
프레시안 : '학교가 폭력의 숙주다'라는 명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체벌'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교사가 아이에게 공식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인데, 인권 활동가들은 교사의 '체벌'이 아이들로 하여금 폭력에 무디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정용주 : 참 어려운 문제다. 학교폭력을 인권 측면에서 바라보는 배경내 활동가의 지적이 정확하다. (☞관련 기사 "교육부의 '밥상머리 교육'? 밥 먹다 체할라")
학교폭력 문제 이전에 체벌 문제가 굉장히 이슈가 됐었다. 그때 교사들이 확인한 게 있다. 일종의 자기 고백인데, 그동안 학교가 '교사는 언제든지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기반 위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체벌의 빈도보다 이런 정서적 기반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서울시 학생 인권조례가 그걸 건드렸다. '체벌을 교육적인 수단으로 볼 수 없다.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라는 말에 교사들은 심리적 박탈감을 느낀 이유다.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쓸 수 있다는 기반 위에서 학교가 움직이는데, 그걸 금지하면 교사 입장에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오늘의 교육> 특집으로 "언터처블 학교"를 진행하면서 마치 학교가 개인의 발달과 성장을 돕는 '돌봄과 배움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사고하는 현상을 '학교 착각(school illus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학교가 배움의 공간, 평화의 공간이라고 착각하다 보니, 폭력이 발생하면 교사들도 '어떻게 학교에서 폭력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학교가 폭력적인 공간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은 법률 강의, 방관자 문제 못 푼다"
프레시안 : 학교폭력 담론은 넘쳐나지만, 주로 행정적인 관리를 중시하는 내용이다. 인격적인 만남 대신 행정적인 관리만 강조되는 상황 역시 어떤 면에선 폭력일 수 있겠다.
정용주 :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은 사실 법률 강의다. '이건 폭력이야. 이건 갈취고, 이건 언어폭력이야. 이걸 하면 학교에 못 올 수도 있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평화에 대한 감수성이 생기지는 않는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누가 때리고 맞았다며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나뉘는 상황은 이미 교육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이걸 교사가 수사해서 무엇 하겠나. 이미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약자일수록 철저히 짓밟힌다'라는 생각을 내면화 한다. 그냥 약육강식의 문화다. 폭력 상황에서 다수의 방관자가 생기는 건 그래서다. 방관자의 존재는 피해자 입장에서 그 자체로 가해적 분위기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엄격히 나누고 가해 행위에 따른 처벌을 명확히 규정하는 법률적 해법으로는 이런 방관자 문제를 풀 수 없다.
"지시와 명령만 있는 학교, 그리고 용산 참사"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걸 보면,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만 있다. 그 안에서 이해 관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은 없다. 행정 지침만 있을 뿐이다. <두개의 문>을 보면, '용산 참사 가해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학교폭력 문제도 그렇다. 폭력의 진짜 원인은 감춰져 있다. 일사불란한 체제, 지시 전달만 남은 체제, 일을 빠르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문화, 이런 학교 문화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진도를 늦게 따라오는 아이에 대해 배려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서로 협력하는 법을 가리치지도 못한다. 지시와 명령만 남아 있는 문화에서 우리가 그 지시와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싸우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게 용산 참사다. 학교 문화 역시 다를 게 없다.
교사와 엄석대는 공범?
프레시안 : 학교폭력의 가해자를 지목하는데만 급급하다 보니, 온통 '일진' 이야기다. '일진'하면 떠올리게 되는 게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인데….
정용주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소재로 모의재판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한 학생의 질문이 무척 날카로웠다. 학생이 "(소설 속에서) 엄석대에게 반을 맡겨두고, 선생님은 승진하려고 교무실 가 있었던 것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엄석대의 사례는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밖에서 보면 분명히 학교폭력인데, 교실 안에서는 일종의 치안 기능인 경우가 있다. 일진이 그 기능을 담당한다. 교사 입장에선 그 아이 한 명만 관리하면 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앞서 소개한 학생의 반응은 이런 점을 잘 짚은 것이다.
A반과 B반이 있는데 일진이 없는 B반은 급식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반면, 일진이 있는 A반은 소란이 없다. 소설 속 엄석대의 반이 그런 경우다. 또 다른 반 아이들이 A반을 못 건드린다. 학교 안에서의 폭력이 치안화 되면서 교사도 생활지도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암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프레시안 : 교사가 엄석대의 숨은 공범인 셈이다.
정용주 : 그렇다. 눈에 보이는 학교폭력의 이면에는 일진 또는 힘이 센 아이들이 엄석대처럼 치안 기능을 하는 현실이 있다. 이는 '복종에 기반한 평화'다. 교사들 역시 이런 식의 평화를 원한다. 시끄러운 것 싫어하고, 토론 싫어하는, 누구 한 명이 결정한 대로 따라만 가는 문화가 교사들에게 있다. 엄석대의 폭력을 묵인한 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상담교사, 정규직으로 뽑자"
프레시안 : 학교폭력 문제가 불거지자, 교과부는 일선 학교에 상담교사를 배치하겠다고 했다.
정용주 : 상담교사를 일괄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교사를 지금보다 더 소극적,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목소리가 교사 사회 일각에서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를 먼저 짚고 싶다.
우선 비정규직 문제가 있다. 교과부 정책은 결국 비정규직 상담교사를 대거 뽑아서 배치한다는 것이다. 정규직으로 뽑는 게 옳다. 정규직으로 뽑아서 학생의 심리 발달에 대해 일반 교사와 지속적인 협의를 할 수 있어야만, 교과부 정책이 의미가 있다.
상담교사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 '담임교사가 학급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라는 생각은 굉장히 이상적인 것이다. 현실에선 가까운 사람이라서 오히려 속 이야기를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교사들이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엄마들이 '내 자식은 내가 다 안다'고 말하는 게 위험한 것처럼. 교사 스스로가 '내가 학생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학생이 교사와 얘기할 수 없는 것을 조금 더 은밀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전문가가 배치돼야 한다. 상담 중 학생이 교사를 비난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옳은 방향이다.
"'담임'만 통하는 일원화 구조 벗어나야"…"상담만능주의 역시 위험"
지금의 학교는 너무 일원화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담임이 개입해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이런 일원화된 통로는 문제 해결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이들에 대한 배려라는 점에선 문제가 있다. 학교에서도 일원화되지 않은 체계가 작동할 필요가 있다. '정규직' 상담교사 배치는 그런 면에서 필요하다.
물론, 상담 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도 학교폭력 문제를 상담에 의존하는 모양새인데, 걱정스런 부분이 있다. 관련 내용을 보면 몇몇 단어가 집중적으로 쓰인다. '멘토', '코칭', '컨설팅' 등의 단어가 넘쳐난다. 예컨대 어른은 '멘토'가 되어서 '코칭'과 '컨설팅'을 해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 폭력을 개인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폭력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고, '네가 잘 조절해'라고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이 필요한 면도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상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담을 하면, 결국 답은 치유 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다. 그런데 한 아이의 폭력성이 사회적 문제, 예컨대 빈부 격차 때문에 생겼다면, 문제가 다르다. 이런 아이에게 상담과 힐링으로만 접근하다 보면, 아이에게 해줄 말은 '그냥 적응하고 살아라' 밖에 없다.
학교폭력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곪아있는 문제가 드러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사회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걸 개인 차원, 학교 차원으로만 접근하면 결국 통계 놀음이 된다. 상담을 몇 차례 실시했고, 폭력 사건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놓고 경쟁하게 된다.
"저항성 사라진 진보 교육감, '멘토' '힐링' 남발 우려스럽다"
프레시안 : '힐링' 유행에 대한 지적이 인상적이다.
정용주 : 요즘 진보 교육감들이 '컨설팅, 상담, 코칭, 힐링, 멘토' 같은 말을 많이 쓰는 게 좀 우려스럽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건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 담론일 뿐다. 어느 순간, 진보 진영도 '이런 상태에서 못 가르치겠다, 바꿔야 한다'라는 저항성이 사라지고 긍정의 주체로 바뀌었다.
교사도, 부모도 계속해서 긍정의 담론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킨다. '긍정적으로 생가하고, 감정을 코칭하고, 스스로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데, 귀착점은 결국 '자기 착취'다. 자기 계발을 계속하게 만드는 셈이다. 한편, 자기 계발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낙오한다.
ⓒ프레시안 |
"'횡단보도 교통 지도, 길 건너 사는 아이 부모들만 해야 한다'는 학부모들"
프레시안 : 잘사는 아이들이 못사는 아이들을 배척하면서 생긴 폭력성이 '힐링'이나 '코칭'으로 풀릴 리는 없다. 또 '자기 착취'를 더 이상 할 여력이 없는, 말 그대로 방전되다시피한 아이들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정용주 : '마을이 학교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이 말은 '학교 자체가 배움의 공간이 아니다'라는 지적도 곁들여야만 의미가 제대로 살아난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등교 시간 40분 동안 통학로 횡단보도에서 멈추라는 깃발을 들고 하는 녹색 교통지도를 학부모들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학부모 총회에서 '길을 건너서 등교해야 하는 학생의 부모가 교통지도를 해야지, 왜 모든 학부모가 해야 하느냐'라는 항의가 있었다.
길을 건너서 등교하는 아이들은 맞벌이 가정이거나 조손 가정, 형편이 나쁜 가정이 많았다. 주변 지역 구분이 그렇게 돼 있었다. 상대적으로 등하굣길이 위험하다. 그러니까 저항성이 더 강해지는데, 이걸 가리켜서 잘 사는 집 부모들은 '쟤 폭력적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말 자체가 폭력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은 다시 저항성이 강해지고, 결국 악순환이 된다.
"너 어느 아파트 살아?", "평수는 그런대로 좀 사네"
이런 사례도 있다. 목동에 한 중학교가 있는데 외국어고등학교를 1년에 60명씩 가는 학교다. 서울 외곽에 있는 아이들도 외고를 가기 위해 종종 목동으로 진입한다. 그런데 한 아이가 심각하게 다시 전학을 고민하길래 만났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목동으로 전학 갔더니 아이들이 '너 어느 아파트 살아?'라고 물었다고 했다. 목동 아파트도 길 건너로 구분되는데, '길 건너 살아'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더 이상 말을 안 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 ○○아파트'라고 말했더니, '그런 아파트도 있어?'라며 '평수는 몇 평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40평이야'라고 답했더니, '아, 평수는 그런대로 좀 사네'라고 했단다. 또 과외를 같이 받는 아이들끼리 서로 뭉쳐 다니는 문화도 있다. 비슷한 경제력과 문화를 지닌 이들끼리의 동질성은 계속 강화되고, 외부를 향해서는 엄청나게 배타적이 된다. 결국 그 아이는 중학교 3년을 오기로 버텼다고 했다. 그 아이가 경험한 폭력이 과연 '힐링'이나 '코칭'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6학년만 돼도 가난하면 학생회장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초등학교 6학년만 돼도 '전교 학생회장은 엄마가 학교에 와서 열심히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못사니까 나는 회장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통한다. 공동체에서의 정치적 참여에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폭력과 불평등, 불합리에 대해 관조자가 된다. '나는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아이들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고 잘못된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오히려 냉소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학교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무의미한 존재로 규정하게 된다. 학교는 그저 의미 없이 왔다 갔다만 하는 곳이 된다.
학교는 이런 식으로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될 수 없어'라고 가르쳐 놓고는, '넌 커서 뭐가 되려고 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이런 학교에서 무슨 소통이 가능하겠나.
"학교폭력은 갑작스런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오늘의 교육>이 초기부터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을 썼는데, 몹시 인상적이었다. 학교 교육의 구조적인 절망을 똑바로 보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희망도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정용주 : 우리는 민주시민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민주시민을 길러 내는 과정은 굉장히 어렵다. 일단 어른부터 민주시민이 아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입시점수로 남을 누르는 경쟁 속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 오직 점수로만 학생을 평가하는 학교 문화에 별 문제의식이 없었고 오히려 수혜자이기만 했던 이들이 종종 교사가 된다. 서로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한 경험도 많지 않다. 팀티칭(team teaching)을 유난히 부담스러워하는 교사들이 많다는 점이 그 방증이다.
학교와 교사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학교는 사실 몹시 폭력적인 곳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니까, 일부 폭력 사건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다. 더 중요한 폭력에 대해선 눈을 감으면서 말이다. 학교폭력은 갑작스런 병증이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온 문화다. 이런 문화를 지탱해 왔던 시간의 무게가 있다. 그만큼, 아니 그보다 몇 배 무거운 노력을 들여야만 학교폭력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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