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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비전향 장기수, 그의 마르지 않은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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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 그의 마르지 않은 눈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

"'내 영혼에 금이 가버렸구나...'(눈물)"

말로만 들었던 광주민주화항쟁, 그 현장에 있었던 이를, 더구나 마지막 날까지 총을 들고 싸웠다는 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18살짜리 고3이 그 이후의 생을 살아가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영혼이 쨍하고 금가는 소리를 들은 그때에 갇혀 살고 있다." 그 말을 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그에게 고통스러운 질문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질문을 한 내가 독하다 원망스러울 만큼.

마지막 순간 두려움에 총을 버리고 도망갔던,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던 그 고교생이 고교 선배에게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를 주었다는 이유로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나라 최연소 장기수이자 세계 최연소 무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면을 받고 나오는 순간에도 전향서에 사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
전향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간첩사건이 조작이라 인정할 수 없었고 재판과정에서 변변히 항변해 보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라는 광주 민주화의 학살자들에게 또다시 반성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고문에 굴복하여 쓰레기 통속에 처박혀 버린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전향제도와의 투쟁의 과정 속에서 내 영혼이 근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더라도 이 싸움을 하겠다고 선택했고 그렇게 14년을 싸우고 나왔다."

"감옥에 있을 때 나는 '나의 전 존재를 걸고 전향제도와 싸우겠다. 그리고 내 손으로 이것을 폐지시키고 나가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렇게 싸워왔던 과정이었다. 전향제도를 폐지하고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고 나오게 되었을 때 '아, 이제 나는 세상에 빚이 없다' 싶었다."

그렇게 이제 세상에 빚이 없다던 사람이 의사가 되어 국가 권력에 의해 조작간첩으로 몰려 생에 전체가 파괴되어버린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아가고 있다. "2008년 3월에 전문의를 따고 시작했던 일이 바로 고문 생존자들 치유모임이다. 양심수도 계급이 있고 신분이 있는데 소위 민주인사, 재야단체의 인사가 1급, 민청련이니 국민운동본부 출신이 2급,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3급이다. 그 밑의 4급은 성경으로 말하면 암 하아레츠(Am Ha'arez) '땅의 사람들'로 인도식으로 표현하자면 '불가촉천민'에 해당하는 조작간첩이다."

"5.18 관련 생존자와 피해자의 경우에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5.18을 비롯한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지지 및 재활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 고통당한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망각'에 맞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서 '광주 트라우마 센타' 일을 맡게 되었다."

1980년 5월,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고3이 옆에서 쓰러지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책 대신 총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총을 들고 싸우다 두려움에 총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갚기 위해 금이 간 영혼 위에 살얼음을 걸으며, 두려운 듯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현재 진행형인 고통으로 모두가 잊고 싶어하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이들의 고통을 보듬으며 살아가고 있다. 시대가 그에게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 ⓒ프레시안(최형락)

"고문이나 국가폭력의 피해자는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요…그 경험이 되살아나면 자신도 모르게 과도하게 흥분하고 편안해지지 못할 때가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걸려온 낯선 전화에 긴장되지는 않았나? 근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국가폭력 중에서도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몸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영혼은 고문당하던 그날 그 자리에 갇혀 있다. 세월이 흘러 몸은 나이가 들어 노쇠하지만 영혼과 정신은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불법감금 되어 두들겨 맞았던 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고문의 트라우마는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고문 피해자들의 90% 정도가 다양한 형태로 고문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이것이 저절로 회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게 생기는 여러 현상이 고문의 경험과 관련이 있고 나의 영혼과 삶을 여전히 갉아먹고 있다. 고문이 준 상처를 가지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낯선 전화라고 하면 내가 있는 곳이 병원이니 환자들이 원장을 찾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꼭 나를 찾는다고 하면 경찰서나 검찰청인 때가 있다. 현재 나는 보안관찰법에 의한 피보안관찰자 신분인데 이것에 관한 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다. '보안관찰 심사받아라, 보안관찰 갱신되었다,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 됐고 약식 재판으로 벌금이 200만 원 나왔다'는 전화를 받을 때면 솔직히 마음이 힘들어진다. 경찰이 병원까지 찾아오는 경우는 애써 유지해오던 평온이나 안정감이 깨진다.

고문은 한 사람의 영혼에 죽음을 각인시키는 행위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영혼에 죽음이 각인되고, 그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 완전성이 근본에서부터 망가지고 훼손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온전한 자아와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힐러리는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고 말했는데, 나는 '고문 생존자가 다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노력뿐만 아니라 온 사회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고문 생존자의 회복을 사회 전체의 노력이 아닌 생존자의 몫으로만 남겨둔다면, 그는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당했던 그날 그 순간에서 한 걸음도 나올 수가 없다.

고3 때 광주 민주항쟁을 겪었다고 들었다. 특히 항쟁 마지막 날까지 총을 들고 서 있다 도청이 계엄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보고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총을 버리고 도망쳤고, 그 기억이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원죄처럼 따라다니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총을 들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정말 큰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 날 총을 들고 있을 때, 그리고 총을 버리고 도망쳐 나올 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듣고 싶다.

지금 총을 들라고 하면 다시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또다시 우리 모두가 총을 들고 싸워야 하는 처지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80년의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이것을 딛고 일어서서 우리는 민주화를 진전시켜왔고 그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뤘는데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면 그것만큼 재앙적인 상황은 없다. 하지만 다시 1980년 5월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때는 시민들이 자기 생존과 권리를 위해 국가폭력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시대적 상황이었다. 거기서의 선택은 불의한 국가권력에 맞서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 이 두 가지뿐이었다. 만일 그 상황이 재연된다면 다시 또 총을 들고 나가 싸울 것 같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5월 18일 광주항쟁이 시작한 때부터 27일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참여했다. 사회적 의식이 컸다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다기보다는 내 앞에서 총과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끌려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해서 싸웠다. 두렵거나 무섭다는 생각보다 추상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지키고 공수부대에 의해 학살당하는 시민들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에 있었다. 싸우다 보면 총 맞은 사람이 바로 옆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5월 26일 나는 도청 앞 YMCA 건물 안에 있었는데 밤 9~10시부터 다음날 새벽 2~3시까지 긴 시간 동안 내게 남은 기억이라곤 형광등 불빛처럼 창백한 기억밖에 없다. 다른 것은 없고 그저 그렇게 멈춰 있다. 내 안의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그 순간의 기억들을 지워버린 것 같다. 광주항쟁을 겪은 그 순간 '내 영혼에 금이 가버렸구나…'(눈물)라는 것을 느꼈다. 18살짜리 고3이 그 이후의 생을 살아가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영혼이 쨍하고 금가는 소리를 들은 그때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렇게 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그때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최형락)
이후 대학교 때 고교 선배에게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에 관한 자료를 주었다는 이유로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에서 다시 20년 감형에까지 긴 수감생활을 보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나?

분노가 나를 지켜준 원동력이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 인간으로서 내가 가진 장점과 아름다움이 하나하나씩 부서지고 내 삶의 향기라는 것이 냄새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하지 않고 버틴 것은 수많은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군사정권과 그 학살을 방조한 미국에 대한 기본적인 분노였다. 그것이 고문으로 쓰레기통 속에 처박힌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이 되었다. 설령 내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에 팔아서 남은 것은 메마른 껍데기뿐일지라도 나의 전 존재를 걸고 전향제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대부분은 악과 싸우면서 악을 닮아가고 불의와 싸우면서 불의가 가진 폭력적인 모습에 자기를 비추며 살아간다. 전향제도와의 투쟁의 과정 속에서 내 영혼이 근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더라도 이 싸움을 하겠다고 선택했고 그렇게 14년을 싸우고 나왔다.

사실 전향서 한 장만 썼다면 14년이란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나마 14년은 준 것이고 원래대로라면 정말 기약 없던 세월과 종이 한 장을 바꾼 것인데, 본인에게 전향서는 어떤 의미였나?

한 인간이 자기의 전 존재를 거는 중대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한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과정 속에서 어떤 결정을 하도록 하는 상황들이 발생하고 여기에 인간이 각각의 상황들이 주는 질문에 진실하게 답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향제도는 절대 불가침적인 인간 내면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이것과의 싸움은 누군가는 할 수밖에 없는 정언명령이다. 누군가가 전향제도를 폐지하고 양심의 자유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싸우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그 필연을 담보하고 실현하는 존재가 내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헤겔이 '역사를 발전시키는데 우연한 개인을 통해 '이성의 교지'가 발현된다'고 했던가? 그 말처럼 우연한 개인으로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정언명령이 묻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필연을 떠안고 전향제도와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전향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간첩사건이 조작이라 인정할 수 없었고 재판과정에서 변변히 항변해 보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라는 광주 민주화의 학살자들에게 또다시 반성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고문에 굴복하여 쓰레기 통속에 처박혀 버린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처음에 서울 구치소에 있다가 대전 교도소로 옮겨졌는데 '모스크바'라고 불리는 비전향수들이 있는 15사동으로 보내졌다. 당시 반공∙반북을 제일로 하는 국가보안법체제 하의 남한에서 전향하지 않던 사람은 대전교도소 15사의 비전향장기수 70여 명과 청주 보안감호소의 비전향수 몇십 명해서 약 백여 명이 있었다. 그 중 15사동에 1951년 한국전쟁 때부터 감옥살이를 하셨던 최주백 선생님이라고 계셨는데 스물네 살에 들어와서 환갑 때까지 거기 계셨다. 끔찍했다. '나도 전향을 안 한다고 했으니 저분처럼 환갑을 여기서 보내겠구나' 싶었다. 최 선생님은 위암에 걸렸는데도 전향하지 않고 버티시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그분이 돌아가시자 전향공작을 담당하던 전향공작반의 박영기 교회사(敎誨師])가 15사동에 와서 최주백 선생이 찍은 지장 날인이라며 흰 종이를 흔들면서 "이 빨갱이 새끼들아! 너희가 전향을 안 해? 너네는 죽어서도 전향해. 봐라"라고 말했다. 나는 거기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불의한 국가권력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불의할 수 있는지 밑바닥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비전향'이라는 게 평생을 갇혀 있는 일이고 죽어서야 끝나는 일이며 목숨을 다 걸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뒤, 위아래 하나 없는 쇠로 만든 관 같은 곳에 내가 놓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전향을 해야 하는데 못하겠으니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한 3~4개월 동안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런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여기서 죽었으면 죽었지 전향하지 않는다. 내가 평생 갇혀 있더라도 전향하지 않겠다. 만약 전향하라고 폭력적으로 테러하고 고문을 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이 60~70이 될 때까지 전향하지 않고 있는데 그때도 우리 사회가 이 꼴이면 그때는 정말 죽어야지'했다.(웃음)

1987년 6월 항쟁 이후 '87년 체제'라는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고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었고 교도소는 한발 늦게 조금씩 좋아졌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 양심수를 석방하라. 전향제도를 폐지하라'는 내용으로 단식을 했다. 단식은 가장 평화적인 비폭력 저항의 방법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총 300일 정도 단식을 했는데 그러다가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전향제도 폐지에 관한 헌법소원을 냈다. 1990년에 들어선 노태우 정부는 한국에는 인권문제가 없다고 대외적인 제스처를 하기 위해서 UN 인권규약에 가입했는데 선택의정서(Optional protocol)까지 가입했다. 선택의정서는 자국의 내부문제나 인권 문제를 UN 인권이사회에서 의제로 다루고 개입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이런 선택의정서에 가입하지 않았고 아시아에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규약에 가입한 나라들 중에 선택의정서에 가입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노태우가 했다. UN에서 전향제도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UN은 우리나라에게 국가보안법 폐지와 전향제도 폐지를 수차례 권고해왔다. 나는 전향제도를 국제무대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992년에 헌법소원을 냈는데 UN에 개인통보를 내려면 국내에서 밟을 수 있는 구제절차를 다 마쳐야 했다. 소송을 내면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헌법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공부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전향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향제도와 싸우면서는 헌법과 국제인권장전, 양심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책을 보면서 양심의 자유와 전향제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전향 안 한 사람들더러 빨갱이들이기 때문에 안 한다고 한다. 물론 전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중에는 이북에서 온 분들이 다수지만 나같이 우리 사회에서 태어나서 교육받고 학생운동하다 온 사람들도 있고 건설노동자로서 일본에 돈을 벌러 갔다가 조총련계 사람 있는 곳에서 일했다고 간첩으로 몰린 분들도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월북한 이후 한 번도 만나지도 못한 아버지와 접촉했다며 잡혀 온 기독교인도 있다. 이들이 끝까지 전향하지 않으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전향을 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내면의 자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을 이분들이 보여주고 있다. 나의 존엄, 자기 결정권, 양심의 자유를 종이 한 장에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나인 채로 세상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바람 때문에 전향하지 않고 감옥에서 만기를 버티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지금은 좀 잦아들긴 했지만 통합진보당 이재연, 이석기 의원 등 이른바 종북 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검증 논란이 있었다. 원래는 통진당의 당내 경선이 비민주적인 절차로 이루어져 불거진 일이 이후 보수진영에서 사상검증으로 이어져 버렸다.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사람으로 지금의 종북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일본에 연수를 갔다가 먼 친척을 만났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잡혀 재심에서 무죄를 받으신 분이 계시다. 그분이 이번 통진당의 종북 논쟁을 보면서 '내게 괜찮겠냐'고 물었다. "하도 '종북, 종북'이라고 보수진영이 떠드니까 저러다 우리 또 옛날처럼 오해받는 일 생기는 거 아니냐?"며 우려하셨다. 고문을 겪은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또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는 일들을 고문피해자들은 과도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일들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꾸 개입하지 않으려 하고 정치적인 일은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요즘 다시 종북 논쟁이 일어나니 상황이 꼭 예전과 비슷하다고 느끼시는지, 그분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힘들고 두려워진다고 한다.

통합진보당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지 매카시즘(McCarthyism)적인 사상의 문제는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훼손이 있었다면 그에 맞게 합당한 처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내의 문제고 일차적으로는 정당정치 정당 민주주의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자정이 정 안 될 경우에는 사회적인 공론이 가능하지만, 이것을 종북 논쟁으로 옮겨가는 건 문제가 있다. 종북 논쟁 가운데 '십자가 밟기'를 해야 한다는 군 장성 출신 새누리당 의원의 주장이 있었다. 우리 헌법에 양심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라 되어 있고, 양심의 자유에는 침묵의 자유가 있어서 자기 사상과 생각을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게 절대적인 양심의 자유의 핵심 내용 중 하나이다. 그런데 '너의 사상을 밝혀라'고 하는 것은 침묵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또한 양심의 자유에는 '추지 금지의 원칙'이 있다. '추지 금지의 원칙'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드는 예가 막부시대의 십자가 밟기나 성화 밟기, 일제 치하의 태극기 밟기인데 이것은 모두 추지 금지의 원칙을 위배하는 일이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십자가 밟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헌법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헌법을 훼손하고 이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우리가 민주주의다'라고 말하는 집단 정신병에 걸려 있다.

'종북 논쟁' 통해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본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이십오륙 년이 지났고 그 가운데 김대중, 노무현 민주 정부 10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나 인권과 평화라는 누구나 동의할 법한 그 기초가 너무 허약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어디까지 용인하고 포용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실천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 치열하게 토론하고 사회적 공론화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북 논쟁' 그 바탕에 있는 근본 문제에 우리 사회가 달려들어야만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오하는, 우리 사회에 적대적인. 우리 사회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상에 대해서도 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평화적이다면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사회는 아직 양심의 자유가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전히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 진부한 얘기지만 만약에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억압당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함께 싸우는 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종북 논쟁' 전에 사상의 자유시장을 열어야 한다.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토론과 경쟁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종북 논쟁'은 자칫 또 다른 형태의 메카시즘이 될 우려가 있다.

이제는 좀 밝은 이야기를 하자. 1999년에 출소하셨다. 14년 만이었는데. 그때의 심경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와서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셨나?

감옥에 있을 때 나는 '나의 전 존재를 걸고 전향제도와 싸우겠다. 그리고 내 손으로 이것을 폐지시키고 나가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렇게 싸워왔던 과정이었다. 전향제도를 폐지하고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고 나오게 되었을 때 '아, 이제 나는 세상에 빚이 없다' 싶었다. 사회는 공공선이나 공동선을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한 개인에게 부과하는 책무나 과업이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삶에 부여된 모든 것을 할 만큼 다 했으므로 사회가 앞으로 나에게 그런 책무를 다시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출소하는 순간 '이제 나는 세상과 사회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과업은 다 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의지로 살겠다. 상황이나 현실이 요구하는 그런 선택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 했으니 남은 생은 홀가분하게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좋았다. 예수의 말씀처럼 '마침내 다 이루었다' 하고 죽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감옥에 오래 있다 보니 세상과 너무 격리되어 있었고 그곳에 있는 동안은 전향제도 폐지라는 목적을 위해 영혼과 몸은 날아가는 독화살이 되어 계속 거기에 박혀 있었다. 그런 상태로 세상에 나간다면 그 독기와 파괴력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만 같았다.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라는 타이틀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왜곡되고 훼손되어온 내면의 폭력성을 세상에 풀어버리는 것은 사회에 해악을 짓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감옥에 다시 들어가 사는 게 더 도움될 것 같았다.(웃음) 내게 세상에 연착륙할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세상과 화해할 시간과 이 속에서 내 마음껏 살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출소하고 이곳저곳에서 강연을 와달라고 했는데 감옥에 있을 때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가 됐던 딱 두 곳만 갔다. 빚을 졌기 때문에 갚아야 했다.(웃음)

사회에 연착륙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교로 돌아갔던 것인가?

의대는 감옥에 가기 전까지 4년을 다녔는데, 예과 2학년밖에 못 마쳐서 2학년 2학기로 복학했다. 2월에 출소 한 다음에 전남대 총장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총장님께서 '뭐 할 거냐'고 묻기에 '복학하겠다'고 했더니, '의대는 힘드니 법대나 사회대로 돌리는 것은 어떠냐'고 하셨다. 당시 의대 교수님이 총장이었기 때문에 의대 수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고 '과연 수업에 따라갈 수 있겠느냐'고 했다.(웃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총장님은 복학을 환영했지만, 8월에 복학하려 했더니 제적되었기 때문에 학칙 상 복학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칙을 바꿀 테니 내년 2월에 복학하라'고 했다. 하지만 바로 복학하지 않으면 학교와는 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총장님을 다시 만나 "저 꼭 지금 복학해야겠습니다.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2주일이 있다가 학칙이 개정되었다. 학칙을 바꾸려면 학장회의를 해야 했는데 방학 중이라 다들 외국에 나가고 없어서 일일이 전화를 걸어 동의를 받았다고 했다. 이렇게 한 학생, 한 사람이 학업을 다시 하기 위해 온 학교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공부하니 어땠나. 행복했나?

정말 너무 힘들었다. 고3때 이후로 20년 만에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대학에 다니긴 했지만, 학생운동에 매달리면서 사회과학 서적이나 보았지 의대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먼저 생화학, 물리화학 같은 기초과목을 배웠는데 '아, 이거 고등학교 때 배웠는데' 싶으면서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웃음) 수업에서는 공유결합과 수소결합을 자세히 가르치지는 않았고 TCA(Tri-Carboxylic Acid)사이클 같은 것을 가르치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대 공부는 이해가 안 되면 조선시대 때 학당에서 한문을 통으로 외우는 것과 같이 무조건 외우는 것인데, 나는 잘 외워지지가 않았다. 아이들은 한 장을 15~20분간 가만히 앉아서 보고 나서는 그대로 외워내는데, 나는 두 줄 암기하는 데 30분이 걸렸고 그 아랫부분으로 넘어가면 아까 외웠던 윗줄이 생각이 안 났다.(웃음) '아이고! 정말 총장님 말씀대로 유급당해서 진짜 2학년 못 올라가겠구나'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중 2000년에 의약분업 파업이 있어서 두 달인가 수업을 못했는데, 의약분업이 끝나고 다시 수업을 했을 때 속성으로 가르치고 시험도 속성으로 보는 바람에 통과가 되었다. 천운이었다.(웃음) 기초과목이 그렇게 어려웠는데 학년이 올라가서는 그동안 머리가 단련되어 좀 더 잘 외워지기도 하고, 공유결합도 없고 TCA사이클도 없으니 살 것 같았다.(웃음)

마흔 넘어서 학교에 들어갔으니 나의 목표는 '중간만 하자'였다. 밑으로 가는 것은 창피하니까 딱 중간이 목표였다. 우리는 4년 동안 계단 강의실에서 한 강의 당 200명이 수업을 했는데 나는 항상 앞에서 세 번째 줄 안에 앉았다. 뒤에 앉으면 다음 학년으로 못 올라갈 것 같아서 점심만 먹으면 졸려서 잠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앞자리를 고수했다. 처음에 내가 복학한다고 하니 교수님들 태반이 "강용주가 2학년 올라가나 보자"고 했다. 그런데 졸더라도 앞자리에서 졸고, 결석이나 지각도 하지 않고 늘 앞자리에 앉아 있으니 나중에는 나를 좋아하셨다. 성적은 상위권은 아니고 중상 정도였는데 졸업을 하기까지 아이들이 많이 도와줬다. 필기를 받아 적기도 힘들어서 중요 기출문제만 체크해 그것만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예쁜 글씨로 쓴 강의록을 많이 보여줬다.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었는데, 특히 98학번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그들이 나를 위까지 끌고 올라가 줬다.(웃음) 정상적으로 복학한 지 5년 만에 졸업했는데 졸업식 때 공로상을 받았다. 의대는 성적순으로 1등부터 3등까지는 총장상, 학장상이라 해서 이름이 있는 상을 주고 4, 5등에게는 공로상을 줬다. 그런데 나는 학업성적 우수상이 아니라 그냥 공로상이었다.(웃음) 똑같은 공로상인데 내용이 "위 사람은 학업성적이 우수하여~"가 아니라 "위 사람은 인화단결(人和團結)에 힘쓰고 다른 학우들의 모범이 되었기에 이에 공로상을 드립니다"였다.(웃음) 공로상을 받으러 나갈 때 동기들이 모두가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아이들이 나를 졸업시킨 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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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강용주 한 사람을 같이 키웠다고 할 수 있겠다. 후배들 입장에서는 형님, 오빠를 키우면서 자기들이 운명 공동체라는 생각과 함께 끈끈한 공동체 의식을 키워나갔을 것 같다.

지금도 아이들과 연락하며 지내고 결혼할 때 나를 부르기도 한다. 98학번과 함께 다니면서 아이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다 보니, 나는 컴퓨터와 핸드폰 문자를 이용함에 있어서 내 나이 또래 사람들에 비해 얼리어답터였다.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과 함께 놀러다니기도 했다. 술 먹고 당구 한 판 치고 또 술 먹고. 그다음은 항상 게임방에 갔다.(웃음) 나는 게임을 할 줄 모르니 옆에서 졸다가 애들 게임 끝나고 나면 또 술 먹으러 갔다.(웃음) 아이들이 나를 무척 배려했다. 감옥 용어로 '감옥에 들어오면 나이를 영치시켜둔다'고 하는데 '영치'라는 말은 '어디에 넣어둔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스무 살에 감옥에 들어왔으면 스무 살을 영치시켜놨다가 나갈 때 그 스무 살 나이를 가지고 나가는 거다. 내가 14년을 살아서 마흔이 되었어도 나갈 때는 스물 몇 살 나이 그대로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신체적인 나이는 먹지만 사회적∙관계적 나이는 멈춰 있는 것이 감옥살이다. 나는 스물네 살에 들어갔고 14년을 살고 나갔으니 실제 나이는 사십 대에 가깝지만, 생각이나 느낌은 이십 대 중반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나 대학교 친구들 만나면 다 아저씨들처럼 느껴지고 98학번 아이들과 있으면 참 편하고 좋았다. 물론 아이들 입장은 달랐겠지만 말이다.(웃음) 세대격차나 나이 차이가 있어서 힘든 것은 별로 없었지만 아이들은 날 챙겨주느라 힘들었을 것이다.(웃음)

의사가 되고 첫 환자를 진료했을 때의 소감은 어땠나?

본과 3학년이 되면 폴리클(Polycle, 학생 의사)이라는 실습을 나가 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교수님들이 진료하시는 옆에 가서 보고 수술실에 들어가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교수님이 "야, 너 이거 잡고 있어"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인턴 때도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소위 인턴을 '3신'이라고 하는데 일하는 데는 등신, 먹는 데는 걸신, 자는 데는 귀신이라는 뜻이다.(웃음) 그래서 의대에서 인턴은 아직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한다.(웃음)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레지던트가 되면 자기가 담당하는 환자를 본격적으로 진료하게 된다. 물론 인턴도 환자를 보지만, 레지던트는 자기가 담당하는 환자가 생긴다. 병원에도 위에 슈퍼바이저들이 있어서 레지던트 위로 몇 년차들이 있고, 그 위에 과장님 계셔 항상 매 건마다 검열을 받는다. 의사의 훈련과정은 A부터 Z까지 하고 나면, 검열받고 지시받는 피드백 과정의 반복이다. 정해진 규칙을 익숙하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의대 교육과정인 것이다. 첫 환자를 본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마 응급실에서 잠도 잘 못 자면서 진료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때는 잠이 너무 부족해 틈만 나면 구석에 가서 잠잘 생각만 하고 있었다.(웃음)

개인적으로 의대 복학했던 이유는 1980년에 광주항쟁을 때 의사들이 보여줬던 헌신적인 모습들 때문이었다. 당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교병원에 총상 입은 사람, 대검에 찔린 사람, 몽둥이에 맞아 머리 터진 사람들이 실려 오면, 모든 의사들이 달려들어 치료했었다. 그 의사들이 응급실에서 부상당한 시민들을 치료하고 있으면 계엄군이 응급실에 난입해서 수술하던 사람들을 때리고 또 끌고 가기도 했고, 심지어는 수술하고 있는 수술실 위로 총알이 유리창 깨고 날아오기도 했다.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하게 총을 난사하고 앰뷸런스(구급차)는 사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공수부대들은 그 앰뷸런스에 대해서도 사격을 했고 운전사가 죽기도 했다. 적십자 마크를 단 앰뷸런스는 전쟁 중에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최후의 도덕률인데도 말이다. 이런 의사들의 헌신적인 모습들이 겹치면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작은 병원을 하면서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고문-조작의 피해를 당한 고문 생존자들의 치유를 위해 정신과 전문의, 임상심리전문가, 변호사, NGO 활동가들과 '고문치유모임'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근래에는 '진실의 힘'이라는 재단법인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려 고문당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고문당한 자로서 고문당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 자신의 상처를 보듬기도 벅차지는 않나? 고문당한 이들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상처를 함께 떠올라 힘들지는 않은가?

보안사나 안기부와 같은 치안본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거나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재활과정이 있어야 한다. 왜곡되고 훼손되어 망가진 내면과 영혼을 치유한 다음 사회로 나가야 건강히 살 수 있다. 이들은 감옥에 살다가 나와서 자신을 보면 고문 후유증과 감옥 후유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 스스로 환자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는 치료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치유에 힘쓰지 않았다. 우리나라 과거 청산에 대해 비판적인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을 이어오며 지속적으로 과거 청산을 해왔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결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희생자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이는 테오 반 보벤(Theo Van Boven)이라는 UN 특별보고관이 과거사 청산에 있어서의 원칙으로 UN에 보고했던 핵심내용 중 하나이다. 그는 과거 청산을 하는데 희생자의 고통이나 아픔을 주변의 문제로 다루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고 희생자의 관점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도 가입되어 있는 '고문방지협약'의 14조에는 고문 피해자들에게 배상∙보상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완전한 재활수단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완전한 재활이란 정신적∙육체적∙사회적 복귀를 의미한다. 우리보다 먼저 과거 청산을 했던 남아공, 칠레, 아르헨티나 등이 작성한 과거 청산 총괄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청산 후 아쉬웠다고 하는 내용 중 하나가 국가폭력을 겪는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의 치유 문제에 소홀했다는 점이다. 그 부분이 강화됐어야 한다며 반성적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이미 UN 보고관의 기본원칙도 있고 '고문방지협약'이나 타국들의 보고서에도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 나라들보다 늦게 과거 청산을 했음에도 피해자들의 육체적∙정신적 상흔들에 대해 치유하려 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수감생활은 사람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고 그 사람의 영혼에 죽음을 각인시키고 그 사람의 전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경험이다. 겉으로 아무리 정상적으로 보일지라도 내면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다. UN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6월 26일을 고문피해자의 날로 정해 매년 우리도 고문생존자진원 행사를 하고 있는데 2008년도에 고 김근태 의장님이 행사에 참석하셨다. 앞에서 다른 고문피해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분은 뒤에 앉아서 계속 울고 계셨다. 고문의 기억 때문이다. 김근태 의장님이 아무리 국회의원을 하고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했다 하더라도 늘 그 안에서 힘겹게 살아오셨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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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에 전문의를 따고 시작했던 일이 바로 고문 생존자들 치유모임이다. 양심수도 계급이 있고 신분이 있는데 소위 민주인사, 재야단체의 인사가 1급, 민청련이니 국민운동본부 출신이 2급,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3급이다. 그 밑의 4급은 성경으로 말하면 암 하아레츠(Am Ha'arez) '땅의 사람들'로 인도식으로 표현하자면 '불가촉천민'에 해당하는 조작간첩이다. 다른 사람들은 의식과 신념으로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온 사람들이고 조작간첩들은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국가라는 괴물한테 덥석 물려서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이들을 가리키며 '막걸리 간첩'이라고 부르면서 막걸리 마시다 걸렸다는 식으로 조작간첩들을 대한다. 그래서 양심수의 범주 내에서도 제일 밑바닥이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대접조차 해주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트라우마와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분들은 맨몸으로 그 칠흑 같은 세월을 견뎠다. 그리고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를 이끌어냈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하여 책임을 추궁한 끝에 이뤄낸 배상금으로 '진실의 힘'이라는 재단법인을 만든 것이다.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피해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진실의 힘', 그 자체가 곧 치유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분들이 그렇게 나설 때 통증치료 해 드리고 영양제 놔드린 일밖엔 없다.

많은 이들이 고문당한 자의 고통에 대해서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잘 모르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고문당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침묵의 음모'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했다"라고 표현했는데, 2012년이 된 지금, 이들이 겪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조작간첩이라는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로 누가 짓밟고 뭉개도 편들어줄 사람이 없고 그에 대해 항변하고 큰소리칠 힘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이 짓밟아버렸다. 이분들은 감옥 안에서 그렇게 작고 왜소한 존재로 대접받으며 살아오시다가 세상에 나와서 '나는 억울하다. 불법으로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재판이 조작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20~30년을 싸워오고 계신다. 이들 중에는 마침내 무죄를 받거나 여전히 재판이 진행 중에 있는 분도 계시다. 나는 이분들에게서 낮고 미천한 한 인간이 어떻게 위대하고 큰 인간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지 보았다. 이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승리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분들을 기억하거나 알아주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형성된 침묵의 음모가 있어 침묵을 강요하고 이 분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이 망각의 음모를 깨뜨리고 이 분들이 세상 속으로 나오려고 한다. 이제 본인 스스로가 사회적인 신분을 획득하고 세상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 하는 것이다. '진실의 힘'은 '오직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성경 말씀처럼 오랜 투쟁 속에 무죄를 선고받았던 분들이 다시는 우리 사회에 자신이 경험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받은 배상금 일부를 모아 만든 재단이다. 그들은 나아가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와 같은 나라들의 고문피해자나 수감자까지도 도우려 한다. 아마 전 세계에서 고문피해자들이 자기 돈을 내어 고문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재단을 만든 곳은 없을 것이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우리 사회가 이분들이 스스로 얻은 이름과 명예를 옳게 기억해줄 때 비로소 우리 안의 유리천장, 대나무 천장들을 깨뜨리고 정상 사회로 나갈 수 있다.

우리사회의 가장 큰 통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 통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통증은 위기신호다. 알람인 것이다. 몸의 위기를 알려주고 그 통증을 표현함으로써 우리 몸이 더 안전하고 좋아질 수 있다. 통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좋은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증이 과도하면 사람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치료를 한다. 어떤 사회이든지 간에 모순이나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순과 갈등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을 알람으로 인식하고 이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 불평등, 즉 양극화의 문제, 민주주의의 위기 등 수많은 통증이 존재한다. 87년 체제 이후 민주정권 10년을 지나며 민주주의가 다 이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을 보면서 국민의 권리와 자유, 인권은 누가 저절로 지켜주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눈을 감으면 훼손되고 망가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깨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깨우쳤다는 점에서는 잘 된 일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민주화 10년을 반성적으로 되짚어봐야 한다. 미친 소가 들어온다고 촛불시위를 할 때 정부는 야간집회금지법을 위반했다고 다 입건했다. 이것을 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하는데, 야간집회금지규정은 노무현 정부 때 집시법을 개정해서 들어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 들어간 규정을 법대로, 그것도 엄격하고 광범위하게 집행한 죄는 있다.(웃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도 노무현 정부 때 결정된 것이다. 제주도 특별자치법에 의해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고, 이것이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두어 달 있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강정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정리해고나 노동유연화가 가지고 온 문제이다. 정리해고나 노동유연화는 김대중 정권 때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도입이 되었고, 이어 노무현 정권 때 강화된 법률이 통과됐고, 그 법을 기업가들이 악용했다. 그래서 터진 사건이 한진중공업이고. 쌍용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이것을 시정하고 싸워야 할 대통령이 "이미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며 항복 선언을 해버리는 게 말이 되나.

우리 사회의 의제들, 갈등의 중심에 있는 통증들이 "과연 'MB OUT'으로 해결될까"하는 의문이 있다. 통증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되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MB OUT'만 외친다면 그 사람들은 또다시 야간집회금지규정을 만들 것이고, 정리해고와 노동유연화를 또 실시할 것이고, 강정에 군사기지를 또 만들 것이다. 정말로 성찰하고 내면을 들여다봐야지 모든 것을 'MB OUT'으로만 돌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북 논쟁과 관련해서 보통 사람들은 그저 이념논쟁이라고 여기지만, 권력의 폭력에 고통 받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시 고통 받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고문피해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약한, 그래서 통증에 가장 민감한 우리 사회에 이상 신호를 알려주는 알람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우리 사회가 그분들을 귀한 존재로 생각해야 할 텐데.

우리 사회가 고문피해자들을 귀한 존재로 여긴다면 그만큼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뜻이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사람 중심의 가치가 자리 잡은 사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는 젊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제일 존경하는 기업인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거의가 이건희라고 대답하는 사회이다. 재산 상속하고 탈세하고 재판받고 얼마 안 돼 사면받고 또다시 재판받는, 우리나라 기업인 중에 가장 재판을 많이 받는 사람을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도착(倒錯)된 사회이다. 사회가치가 물신(物神)과 돈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바뀐다면 조작간첩과 같은 분들을 사회 공동체가 존경하고 보듬어주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적게 벌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장미꽃만 있는 사회가 아니라 백화제방(百花齊放) 온갖 꽃이 피는 사회, 무지개 같이 색깔이 다 달라도 같이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IMF 이전에도 배금주의가 있었으나 온 사회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배금주의를 입 밖으로 꺼내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1980년대에 내가 학교 다닐 때 의대생이라면 누구나 인술을 말했다. '나는 돈 버는 의사가 될 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했을지 몰라도 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늘 스스로를 절제하고 자기의 무한한 이기심과 탐욕이 분출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2000년대의 의대생들은 전부 인술이 아닌 돈 버는 이야기를 했다. 사회의 가치가 물신(物神)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이 흐름이 멈추고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를 중심에 놓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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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트라우마 센터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가폭력에 의해 고문당하거나 가혹 행위, 구속 수감을 겪은 피해자들은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또한 피해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가족들도 외상 후 스트레스를 입는다. 5.18 관련 생존자와 피해자의 경우에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5.18을 비롯한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지지 및 재활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 고통당한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망각'에 맞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서 '광주 트라우마 센타' 일을 맡게 되었다.

'광주 트라우마 센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기는 '광주 트라우마 센터'는 5.18 관련자뿐만 아니라 고문, 수감, 의문사, 열사, 반인권적 공권력 집행 등에 의한 국가폭력 피해자, 생존자, 그리고 그 가족들이 국가권력으로부터 당했던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어 공동체 안에서 다시 일상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세워졌다. 이를 위해 국가 폭력 피해자들에게 포괄적인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의료지원을 하고 치료자들과 인권운동가들에게 국가폭력의 피해나 후유증, 더 좋은 치유방법 등에 관해 교육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고문과 같은 반인도적이고 반인간적인 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그런 야만적인 일들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것이 '광주 트라우마 센터'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이다.

강용주에게 자유란?

자기의 이유,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이 자유이다. 또한 자유란 공자의 말처럼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하여 '내가 하기 싫으면 남한테도 하라고 하지 마라'와 같다.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 근저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결국 자유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한다면 그 배려는 정의와 평등이 될 수도 있다. 자유는 평등과 함께 가고 평등이라 하는 것에 자유가 받쳐주어야 온전한 자유가 된다. 자유와 평등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이고 이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 그게 자유라고 생각한다.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가끔 친구들과 만나면 "우리가 어떻게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하며 만약 지금 같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더이상 개천에서 용은 절대로 나올 수 없고 미꾸라지만 나오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 이러한 현실이 나아지지 않고 더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니 더 미안하다. 파멸을 향해 가는 이 기차를 멈추고 함께 갈 수 있는 꿈을 꾸고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젊은 이삼십 대 청년들 혹은 그보다 더 젊은 중, 고등학생들이 나이를 먹어서도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한다. 나의 청년시절은 군사정권이 집권했고 경제개발의 시대였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미래가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젊은 사람들은 미래 자체가 잿빛이니,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힘내자, 무엇인가 해보자" 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젊은 청년들에게 무슨 힘이 될지…. 시대가 아픈데 그 시대를 사는 청춘인들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겠나. 요즘 '힐링' 열풍이 불고 있는데 나는 시대가 아픈데 어떻게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고 힐링이 가능할 수 있는지 동의할 수 없다. 지금 시대는 고통스럽고 힘겹다. 해고는 살인이라며 스물 몇 명이 죽어가고, 사회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젊은 청년들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상처 아래에 고름이 차 있는데 힐링을 한다며 위에 화장을 하는 것이 어떻게 힐링인지.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구조를 만들고 그 위에 힐링을 해야 진정한 힐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장지선)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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