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교육의 새 활로, '혁신학교' ☞<1>학교 수업시간에 맨유를 수학적으로 분석한다고? |
시행 1년여 만에 일선 학교 교사들을 매료시킨 혁신학교, 비결이 뭘까. 서울시 강북구 삼각산고등학교 중간고사 첫날인 지난 1일, 이 학교 김정안 교사를 만났다. 우선 물어본 건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인 시험. 혁신학교에선 시험을 어떻게 치를까. 김 교사는 "(일반학교보다) 평소 (학업) 과정을 평가하는 수행평가 기준이 높다"며 "과목에 따라 (시험을) 안 보는 과목도 있다"고 밝혔다.
▲ 삼각산고등학교 김정안 교사 ⓒ프레시안(이명선) |
1975년 처음 교편을 잡은 후, 줄곧 '학교를 단위로 한 교육혁신과 개혁, 가능한 실천'을 고민했다는 그는 "제도개혁과 현장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교실 단위의 교육 혁신이 없었던 게 아니라, 교사 개개인이 교육 혁신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혁신학교와 일반학교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구성원 간 합의나 공감이 잘 이뤄지느냐, 안 이뤄지느냐'하는 거죠."
합의와 공감, 교육 혁신을 부르다
삼각산고처럼 지난해 서울 혁신학교로 선정된 서울 강동구 강명초등학교는 1·2학기가 아닌 사계절 학기를 운영한다. 이 역시 혁신학교만의 특이 사항은 아니다. 일반학교도 학교장 권한으로 방학을 여름과 겨울에 국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다. 단지 필요한 것은 교사 간 합의다.
지난 1일부터 6일까지 5일간 달콤한 봄방학을 만끽한 강명초는 기존 학기제가 오히려 교육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판단해 지난해부터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학기를 운영하고 있다.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중간에 한 번쯤 쉬는 시간을 둬 숨을 고르는 것이다. 또 사계절 학사운영을 통해 계절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도시 아이들에게 자연의 흐름을 익힐 수 있게 교육과정도 바꾸었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하기 어려운 맞벌이 가정을 위해 등교 희망 신청을 따로 받아 운영하고 있다. 2012년 봄 학기 총 1020여 명의 학생 중 봄방학 등교 희망 신청자는 40여 명이었다. 지난해 80여 명에 비하면 크게 줄었다. 그렇다면 '4학기 제 운영'에 대한 교사-학생-학부모의 만족도는 어느 정도일까.
ⓒ강명초 이부영 교사 제공 |
강명초는 2011년 진행한 교육과정에 대해 '교사-학생-학부모'를 대상으로 지난해 12월 설문 조사를 했다. 그중 '4학기 제 운영과 방학'에 대한 조사를 보면 응답한 교사 27명 모두('매우 만족' 14명, '만족' 11명, '보통' 2명) 보통 이상의 만족감을 나타냈다. 학생의 경우, 223명은 '매우 만족', 210명은 '만족', 82명은 '보통'이라고 답해 총 538명의 학생 중 515명이 사계절 학기에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학부모들은 전체 605명 중 가장 많은 286명이 '만족'을 표시했고, '보통'이라고 답한 사람이 '매우 만족'보다 24명이 많아 교사와 학생보다는 만족도가 떨어졌다.
강명초 이부영 교사는 "계절에 따른 학기 제 운영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혁신학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삼각산고 김정안 교사의 말대로, 그는 "학교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교장과 교사 간 합의가 용이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삼각산고와 강명초가 행한 '일부 과목 시험 안 보기'나 '4학기제 운영'은 암기 위주로 그칠 수 있는 문답형 시험보다는 평상시 교육 과정 중 다양한 수행평가를 통해 아이들이 가진 시험 스트레스를 낮추고, 초등학생에게는 교실과 책상에 '갇힌' 공부가 아닌 자연의 순리에 다른 '열린' 공부의 기회를 제공한다. 합의가 바탕이 된 혁신학교 교육 운영 주체들의 창의적 교육이 반영된 결과다.
혁신학교는 집단지성의 총아
"절도 사건이 있었는데, 교사들 간에 '아이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담임교사가 학생들에게 '물건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과 '훔쳐가지 않았는데도 의심받은 아이의 심정'에 대한 글을 쓰게 한 뒤, 공유했다. 이후,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찾아냈다."
김정안 교사는 이 과정에서 집단지성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구성원(교사와 학생)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역량을 다 꽃 피게 해서 이것의 총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자부했다.
삼각산고의 집단지성은 '월드카페 토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동물실험의 윤리성'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 학생들은 "인간을 위해서 어떻게 동물을 잔인하게 살인할 수가 있어?", "그렇지만 그래야 신약이 개발되잖아"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의견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로 찬성·반대 입장을 선택한 후, 학생들이 일대일로 옮겨 다니며 토론을 했다. 학생들은 토론을 할수록 상대방의 논리에 자신의 주장이 더해져 균형 있는 관점을 취하게 됐다.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은 지금도 복도에 게시되어 있다.
▲ '월드카페 토론'은 끝났지만, 동물실험금지법에 대한 찬반 의견은 계속되고 있다. ⓒ프레시안(이명선) |
교사들이 기본 틀을 마련했지만, 학생들이 직접 규정을 마련하고 참여함으로써 교사-학생 간 집단지성이 꽃 핀 것이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드는 교육이 혁신학교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교사는 강명초등학교 이부영 교사가 즐거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이처럼 고등학교 교사와 초등학교 교사가 학교 간 장벽을 넘어 "즐겁다"고 말하는 데에는 교사 스스로의 자존감이 회복에 기인한다. 김정안 교사는 과거 교육청-교장-교사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식 관행 때문에 "자율성을 존중받지 못해 (교사의) 자존감이 많이 상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자존감을 존중받는 것은 즐거움"이라며, "무엇보다 (혁신학교는) 자율적으로 무엇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록 업무 부담이 있어도 회복된 자존감과 보장된 자율성으로 상쇄된다고 덧붙였다.
허물어진 '고교 평준화', 돌파구가 필요하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서울시 후기고 학교 배정 방안 연구'(2011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 2173명 답)를 보면, 학생들은 주로 '명문대 진학 성적 및 학습 분위기'(5점 만점에 3.8점)와 '통학거리'(3.7점)에 따라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그러나 최상위권 학생들은 '통학거리'(3.7점) 보다 '명문대 진학 성적 및 학습 분위기'(4.2점)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대학 입학 여부가 '어떤 고등학교에 입학했느냐'에 좌우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중학교 때부터 내신관리에 들어간다.
상위권 학생들이 자사고와 특목고에 몰리면서 내신 80~90퍼센트 대 학생들은 일반 공립형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고교 선택제에 따라 1·2지망에서 떨어진 학생들도 오기 때문에 학습능력이 뛰어나도 학교에 대한 실망감에 공부를 등한시하는 경향도 생겼다. 시교육청이 전산추첨으로 배정하던 과거 방식과 달리, 2010년 도입된 고교 선택제는 학생들이 서울 전 지역과 집과 가까운 학교군 중 원하는 학교 두 곳을 지원할 수 있다.
김정안 교사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위기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학습 부진 학생이 많아 새로운 수업을 도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도 덧붙였다. 김 교사는 "자사고가 내신 50퍼센트 이상 아이들의 선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고교 평준화가 완전히 해체됐다"고 주장했다. 자사고는 국어·영어·수학 위주의 학원식 집중교육을 펼치며 대학진학률을 끌어 올리고 있다. 1년 학비가 1000만 원 이상이지만, 학생과 학부모가 몰리는 이유다.
올 상반기 서울 혁신학교로 선정된 30곳 중 초등학교(16곳)와 중학교(7곳) 외 고등학교 7곳 모두가 인문계 공립형고등학교다. 김 교사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혁신학교를 신청했을 것"이라며 학교를 떠나고 학습에서 벗어난 아이들을 볼 때 교사로서 무력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만큼 빠르게 인문계 고등학교의 슬럼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대로 말하면 혁신학교가 길인 것"이라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입학사정관제'를 관통한 혁신학교 수업
서울 혁신학교는 '소통을 통한 배움과 돌봄의 책임교육 실현'을 목표로 한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교육과정'과 '수업' 그리고 '학생평가방법' 등 세 분야 혁신을 통해 정상화할 계획이다.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블록식수업·협동학습·참여중심학습·프로젝트 학습 등 다양한 방법과 내용을 수업 과정에 결합해 창의성과 소통 능력을 갖춘 인재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1·2 학년 학생 600여 명이 다니고 있는 삼각산고는 '참여와 상호작용의 수업'을 지향한다. 2011년 개교와 함께 개방형교장공모제를 통해 홍석 교장이 취임, 혁신학교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혁신학교인지 모르고 온 경우가 많았지만, 개교 1년 만에 1지망으로 삼각산고를 쓴 학생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삼각산고만의 수업은 '혁신학교는 대입 준비를 안 한다'는 오해를 불식시켰다. 과목를 넘나들며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교과 과정이 오히려 입학사정관제에서 필요로 하는 전공적합성과 성격이 맞는다는 평가다.
삼각산고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표현역량에 중점을 둬 1학년은 문학적 글쓰기, 2학년 인문계는 소논문 쓰기·자연계는 탐구와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탐구보고서 쓰기, 3학년은 구술면접에 대비해 말과 글쓰기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문집이나 1인 1프로젝트를 시행한다.
▲ '기후변화 프로젝트' 결과를 포스터로 표현했다. ⓒ프레시안(이명선) |
혁신학교 중에서도 고등학교 사례로 모범을 보이고 있는 삼각산고.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이다 보니, 결국 대학진학률로 평가 될 수밖에 없다. 김정안 교사는 현재 2학년 학생들이 3학년이 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될 2014년, "삼각산고의 미래가 낙관적"이라면서도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지 불안하다"고 했다.
이부영 한국교육복지포럼 상임대표는 "혁신학교는 좀 더 큰 (교육의) 변화를 위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면서도 "문제는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현 입시 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와 '혁신학교라는 이름의 개혁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것. 또한 그는 "우리 사회 출세 문화에 대한 가치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혁신학교는 과연 우리 교육 현장의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 혁신학교의 다양한 운영 방식과 수업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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