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죽음 직후인 2009년 6월, 박원순이 국정원 사찰을 폭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말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런데 지난해 6.2 지방선거 시에 박원순이 태백에서 한나라당 후보 지원활동을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풀뿌리 민주주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초지방자치선거에서 정당공천제는 옳지 않다는 그의 평소 지론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더구나 그가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방문한 40개 지역 중 한나라당 후보는 두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반한나라 연대가 절실하고 선거국면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정치적 계산을 했다면 결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필자는 그 사건을 지켜보며 박원순에게 정치권 진출 의지가 없음을 재확인했다. 제도정치권 진출 이외에도 할 일이 많다는 그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었다. 그는 전인미답의 블루오션들을 훌륭하게 개척하고 있었으므로.
박원순은 제도정치권으로부터 가장 많이 '러브콜'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 달콤한 러브콜을 외면하던 그가 뒤늦게 구태여 위험한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의 방해로 희망제작소 운영조차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있는데 시민사회가 기계적 중립으로 간다는 것에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혼자 고고한 척한다는 질책에 부채의식도 느꼈을 것이다.
다양한 차원의 적대적 대립이 과도한 한국 사회에서 이례적으로 박원순은 '적'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 중에 그를 악평하는 이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니 수많은 적이 생겨날 것이다. 최근 안철수 신드롬에서 보듯이, 안철수를 찬양해 마지않던 언론과 한나라당이, 안철수와 박원순의 '아름다운 양보' 직후부터 민망한 저주들을 퍼부었다. 이제 그들은 박원순의 약점을 포착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박원순은 털어 먼지만 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그의 '결백'을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항상 그래 왔듯이 그와 관련된 사실을 면밀히 추구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런 글쓰기가 '이적행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명명백백하게 공개되는 것이 마땅하다. 공직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어서인지 연보마저 정리된 것이 없고 착오도 더러 보인다. 내가 아는 사실과 내 생각을 펼쳐보려 한다.
▲ 박원순과 문재인 비교 |
박원순은 21일 정식 출사표를 던졌다. 또 문재인은 16일, "우선 야권 대통합을 잘 이뤄내고, 총선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 그다음에 개인적 선택을 하겠다"고 말했다. 문재인의 신중한 언행들로 미루어볼 때 이 언급은 극히 이례적이다.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꺼리던 박원순과 문재인이 왜 출사표를 던졌을까? 그들은 분명 '식언(食言)'했다. 개인적으로 결코 내키지 않는 '식언'이었지만. 그 '식언'한 사정을 먼저 그들의 과거사에서 풀어보려 한다. 박원순을 다루는 글에서 문재인을 동시에 다루는 것을 여러 가지 이유로 망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펼치는 것이 왕도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필자에게 현재로서 유이한 대안이고 닮은 점이 너무 많다.
▲ 박원순의 중학교 입학 즈음 사진(어머니와 형(좌측)과 함께) ⓒ원순 닷컴 |
박원순은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하여 법학과를 선택하려 했다. 문재인은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박원순은 입학하던 해 봄에 학생시위에 가담했다가 제적되어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문재인은 사학과로 진학하려다가 담임과 가족의 반대로 법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둘은 법조인이지만 역사공부를 좋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후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필자도 역사공부를 했기에 박원순을 가까이 접할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의 대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둘 다 1975년에 제적되고 감옥살이를 맛보았다. 이로부터 두 사람의 '운명'은 시작되었다. 그 '운명'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밖에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사용하기로 한다. 박원순-조영래, 그리고 문재인-노무현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박원순-문재인의 운명적 만남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4인과 필자의 운명적 만남도 있다.
('운명(運命)'이란 말이 나온 김에 본론에서 벗어나지만 한마디만 추가하자. 보선이 예정된 10월 26일은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운명(殞命)'한 날이다. 기묘하게도 1979년과 1909년의 같은 날 한·일의 두 '영웅'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다가올 10월 26일은 총이 아니라 투표로 거사를 치르는 날이다. 10월 26일이 '운명'의 날이다. 그 말은 의미심장한데,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하겠다. 최소한의 힌트는 월산명박(月山明博, 츠키야마 아키히로.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과 박근혜)
박원순은 1975년 입학한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22일의 학내시위에 단순 가담했다가 4개월 동안 감옥살이하고 곧 제적되었다. 3개월짜리 새내기 대학생이 도대체 얼마나 나쁜 짓을 했기에 깡촌 시골에서 서울대에 진학했다며 벌인 잔치판의 여흥이 가시기도 전에 제적이라니. 여유가 없지만 그 엄혹한 시절이 생소할 이들을 위해 이 부분은 좀 상술할 필요를 느낀다.
5월 22일 시위는 속칭 오둘둘 사건이다. 4월 11일 서울 농대생 김상진이 학내의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을 읽고 할복자살했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도 그렇지만, 대학생 김상진의 할복자살도 이례적이었다. 5월 22일에 김상진 추도식을 위한 집회가 있었다.
박원순이 입학하던 1975년은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첫 해였다, 여러 단과대학 학생운동 역량들이 연대하여 오둘둘 집회를 계획했다. 오둘둘 사건은 '긴급조치9호'(5월 13일) 선포 이후의 첫 번째 시위였다. 박원순은 도서관에서 타임지를 보고 있다가 경찰의 잔인한 진압장면을 목격하고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저녁에 이대생과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가 구호를 몇 번이나 외치고 짱돌을 몇 개나 던졌을까? 단지 그것으로 새내기 박원순의 낭만적이고 꿈 많던 캠퍼스생활은 끝장났다. 박원순은 19세 미성년으로 소년수로 수감되었다.
문재인은 박원순보다는 주모자급이었다. 3학년 때 재단퇴진 농성에 참가하고 유신반대 시위에 선언문을 작성하고 낭독하는 등 주도적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4학년 때(1975년) 처음으로 실시된 총학생 회장 직선제 선거에 관여하고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았다. 총학생회가 주도하는 집회가 4월 11일(10일?, 김상진이 할복자살하던 날)에 열렸는데, 총학생 회장 강삼재(김영삼과 이회창 핵심 측근)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이 집회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문재인은 구속되고 곧 제적되었다.
▲ 1975년 5.22사건 보도(1975. 5. 23) ⓒ조선일보 |
긴급조치 9호를 전후해서 40일 간격을 두고 문재인과 박원순은 제적되고 구속되었다. 둘은 속칭 '긴(급)조(치)세대'이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이후 절대적 위력을 발휘했다('긴급조치'가 뭔지 모르는 이는 네이버 사전이라도 찾아보기 바란다). 오둘둘사건은 그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박정희의 분노와 탄압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긴급조치 9호에 때문에 오둘둘시위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다만 처벌관련 기사만 있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시위가 있던 당일 날 오후에 주동자급 25명이 전격 제명되었고, 77명이 남부경찰서에 연행 조사 중이었다. 그 77명 중에 새내기 박원순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둘둘사건의 여파로 서울대 총장과 서울시경국장의 목이 달아났다. 신문의 행간을 읽어야 하는 겨울공화국이었다.
여기서 박원순과 문재인의 첫 좌절을 비교적 상술한 것은 데모 정당성 여부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박원순과 문재인은 부끄럼이 많고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나서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헌신과 희생을 불사하는 열정을 뿜어낸다. 이런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다. 곡절 많은 현대사는 그 두 사람을 자의와 관계없이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다. 이 둘이 제적되고 감옥 갈 적에 박근혜는 영부인 역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들을 설명함에 '운명' 외에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박원순은 이후 그 좌절경험을 '실패와 고난은 인생의 보약'이라고 표현했다.
박원순은 주동자급이 아니니 곧장 복학이 되리라 여겼지만, 복학 조치는 박정희가 죽은 후 1980년 봄에야 있었다. 복학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박원순은 예비고사를 다시 치르고 1976년 단국대 사학과로 진학했다. 구태여 사학과를 택한 것은 역사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법의 사회적 실용성을 강조한 예링의 법 이론에 감화받으며 사법고시 공부했다. 1978년 8월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고, 1979년 강원도 정선등기소장에 부임하여 1여 년간 근무했다. 그는 23세에 이미 '영감(令監)'이었다.
▲ 법원사무관 시험 합격(1978. 8. 23) ⓒ경향신문 |
박원순의 병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고향에서 방위로 근무했다고 스스로 말한 것을 본 적은 있다. 그는 고3 때 무리하게 공부하다 결핵성늑막염으로 1여 년간 고향의 누님 집에서 요양해야 했다. 경복고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상경하여 재수할 적부터 입주 과외를 하여 스스로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경기고 시험을 앞두고 3개월 동안 양말도 벗지 않고 공부했다고 한다. '과로사'가 희망이라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닌 듯하다. 고졸 학력에다 과거 병력, 신체상의 어떤 문제, 혹은 집안 내 문제로 방위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문재인의 특전사 근무 |
1980년 1월 26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보듯이, 두 사람이 제적된 지 5년여 만인 1980년 1월에 복학조치가 있었다. 그러나 박원순은 서울대로 복학하지 않았다. 복학 조치 당시 그는 정선 등기소장으로 근무하며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하지만 극심한 학벌사회에서 'KS'(경기고-서울대)라는 스펙을 포기하기 어렵다. 이것이 박원순의 삶에서 발견한 최초의 불가사의다.
▲ 1980년 서울대 복학대상자(1980. 1. 26) ⓒ동아일보 |
문재인은 1980년에 복학했다. 복학생으로서 1980년 4월의 사시 2차 시험을 앞두고 학생운동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5.17계엄확대 조치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사시합격 소식은 유치장에서 듣게 된다.
박원순과 문재인은 그림에서 보듯이 1980년 6월에 사법 2차 시험에 나란히 합격했다. 그다음 해부터는 시위경력자들이 3차 면접과정에서 탈락되었지만, 1980년도는 그렇지 않았기에 합격할 수 있었다.
박원순은 1975년 서울대에 입학한 이래 8년 만에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고, 문재인은 1972년에 입학하여 8.5년 만에 경희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0년에 복학했다가 다시 구속된 이들은 대개 제적되었지만 문재인의 경우 사시 합격을 한 탓인지 학교 당국의 배려로 그해 여름학기에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참으로 길고도 기구한 대학 생활이었다. 한편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박원순과 문재인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 박원순의 사법시험 합격 보도(1980. 6. 5) ⓒ경향신문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자는 141명에 불과했다. 그다음 해부터 인원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그 141명 중에 박원순과 문재인의 이름이 있었다. 2년간의 연수기간을 거쳐 박원순은 검사로, 문재인은 변호사로 나아갔다. 그런데 사법연수원 12기에는 조영래(1947년생)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대를 수석 입학한 조영래는 법대-서울대를 넘어 학생운동권의 '전설'이었다. 사법시험을 목전에 둔 시점에도 전태일 장례식을 준비했고, 장기 피신 중에 전태일 평전을 집필했다.(자기가 그것을 집필했노라고 생전에 발설하지 않았다) 한 노동자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든 것은 조영래의 공이 크다.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연수 중이던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로 장기 피신하면서 사법연수원을 이수하지 못했다.
이런 기구한 시대와 운명으로 박원순과 조영래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박원순은 인권변호의 역사를 다룬 책('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에서 조영래를 '인권변호사의 전설'이라고 표현했다. 문재인도 조영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요즘 검찰 인사에서 사법연수원 기수가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와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세 사람은 사법연수원 동기로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 첫 번째 글은 박원순 출마 보도 기사가 나자마자 필자의 머릿속에 대충 그려져 있었다. 맨 앞의 표는 그때 작성해 두었다. 박원순은 21일 팬미팅 현장에서 조영래가 인생의 멘토라고 실토했다. 필자의 박원순 연구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박원순은 연수원을 마치고 1982년 8월 검사가 되었다. 검사를 택한 것은 오둘둘사건의 최고선배격인 이호웅 등의 조언 때문이었다. 박원순은 이후 인권변호사로서 오둘둘사건의 선배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1학년 때 시위 단순가담자로서 가혹한 처벌을 받은 경우 피해의식이 압도한다. 그러나 박원순은 '자기 인생을 망친' 선배들과 시종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원순에게 검사직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검사로서 남을 벌주고 사형현장을 임석하는 것 등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오히려 피해자를 편들기도 했다. 박원순은 천상 약자의 편이었다.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지만 부장검사의 만류로 1년을 채웠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1982년과 1983년의 같은 날짜(8월 13일) 신문에서 그의 검사 임명기사와 면직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 박원순 대구지검 발령 (1982. 8. 13) ⓒ동아일보 |
▲ 박원순 대구지검 면직(1983. 8. 13) ⓒ동아일보 |
박원순은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변호사 개업광고문에 이례적으로 '공부하겠다'는 문구를 넣었다고 박원순은 기억하는데, 그림에서 보듯이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에는 그런 문구가 없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인권상담'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 약간 이례적인 정도이다.
▲ 박원순 변호사 개업(1983. 9. 9) ⓒ동아일보 |
1980년대 인권변호에서 조영래와 박원순은 가장 핵심이었다. 같이 변론하면서 조영래로부터 "세상을 보는 눈과 통찰력, 포용력과 연대의 힘, 그리고 집요함과 끈기" 등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박원순이 서울에서 활동했다면, 문재인은 부산에서 활동했다. 문재인은 부산 민변의 핵심이었다. 1980-90년대 인권변호 역사에서 박원순과 문재인, 이 둘은 가장 열성적이고 유능한 존재였다. 인권변호에서 두 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두 사람은 인권 변호뿐 아니라 1987년 6월항쟁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7년 대선에서 조영래와 함께 후보 단일화라는 원론적 입장을 취했다. 6월항쟁의 또 하나의 산물인 한겨레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다. 이후 박원순과 문재인은 <한겨레> 논설위원, 부산지사장을 각각 역임했다. 당연히 사찰 당국의 주시 대상이 되었고 1990년 10월 폭로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명단에도 두 사람의 이름은 들어 있었다.
한편 박원순은 인권 변호 활동하면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1986. 2)을 주도했다. 검사직을 그만두면서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일본 대학으로의 유학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오둘둘의 선배들은 만류했다. 역사 공부를 본인이 전업으로 하는 대신, 이를 지원하는 연구기관을 설립하기로 하면서 역사문제연구소가 탄생했다. 역사문제연구소와 그 기관지 역사비평은 본격적 현대사 연구의 산실로, 초기에 거의 전적으로 그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했다.
그는 그동안 수집했던 방대한 자료들과 건물도 쾌척했다. 힘들여 모은 책들을 포기하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다. 그는 자료수집광인데 필자도 역시 그러해서 자료들을 포기하는 그의 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마누라만 빼고 책을 다 가져가라"고 말했는데 막상 자료가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보면서 "차라리 마누라를 데려가지"하는 심정이었노라고 후일 토로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이사장)시에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인권변호가 박원순과 문재인의 사회활동 1막이라면 그 1막은 같이했다. 박원순은 그 후 영국, 미국 유학(1991-93년)을 다녀와서 참여연대(2막, 1994-2002년) –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3막, 2002-06년) - 희망제작소(4막, 2006-11년) 등의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이제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며 인생 5막을 개척하려 한다. 한편 문재인은 노무현의 동반자로서 그의 정치 활동을 원조해야 했고, 민정수석,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박원순은 일 중독증과 씽크탱크 때문에 머리카락이 더 빠졌고, 문재인은 노무현 뒤치다꺼리로 백발이 되었고 치아를 열 개나 뽑아야 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일해야 했고, 탄핵시에는 히말라야 트래킹 중에 곧장 달려와야 했고 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노무현 사냥극'이 벌어지자 또 노무현의 곁을 지켰고, 노무현 사후에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들은 모두 문재인이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그 역할을 결코 회피하지 못했다.
박원순과 문재인, 그리고 그 멘토인 조영래와 노무현. 이들 4인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시대가 요구하면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나경원도 출마의 변으로 '헌신과 희생'을 말했다. 나는 그녀의 경력에서 그런 흔적을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다. BBK동영상에서 '주어가 없다'는 어이없는 궤변을 늘어놓더니, 이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헌신과 희생을 말한 것일까?
이 네 사람은 반듯하면서도 유능했다. 양 측면을 겸비한 이를 찾기 힘들다. 그들은 천연기념물이고 보석이다. 특히 박원순과 문재인은 부끄럼이 많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시대 그리고 멘토를 잘못(?) 만나 앞장서게 되었으니 그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조영래는 1990년 12월 폐암으로 요절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양김의 분열에 절망하며 조영래의 암덩어리는 자라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청춘을 바친 민주화가 좌절되는 지경을 목도하며 차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2009년 노무현마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이제 그들의 멘티 박원순과 문재인이 남았다. 박원순은 드디어 운명적 결단을 했다. 문재인도 결코 그 운명적 결단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박원순은 의혹에 휘말린 적이 거의 없다. 문재인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리에 있었지만 역시 그러하다. 둘 다 지독한 원칙주의자에 가깝다. 박원순은 그 말 많은 시민운동, 사회운동을 하면서도 적이 별로 없었다. 필자가 지켜본 바로는 내부 갈등이 심각할 적에 박원순은 항상 조정 역할을 감당했다. 문재인은 지난 김해 보궐선거에서 결렬 직전의 단일화를 이루는 데 역할을 했고, 이번 안철수-박원순 단일화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둘 다 원칙주의자이고 자기확신, 절제력이 강하지만 타협에 능하기도 하다. 하여튼 불가사의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박원순은 20여 년 동안 가장 빈번하게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문재인도 멘토 노무현에게 제도정치권 진입을 '협박'받았지만 이를 거부했었다. 권력의지가 없어 보이던 그들이 드디어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그들은 시대의 요구에 직면하여 헌신과 희생의 운명적 선택을 여러 번 했었다. 필자는 그 점을 위의 글에서 누누이 강조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현실의식, 역사의식이 철저했다. 둘 다 역사공부를 좋아했던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전통적인 영웅상과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또 불러낸 것도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이었다.
*사족(蛇足)
박원순(측)의 사주를 받거나 대가를 바라고 이 글을 썼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박원순을 공사석에서 가끔 만났고 잘 아는 사이지만, 그다지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그의 얼굴을 마주 한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를 만난 지 25년여 동안 서로 전화통화를 한 적도, 둘이서만 만난 적도 없는 것 같다. 필자는 누구의 지시를 받거나 대가를 기대하고 글 쓴 적은 결코 없다.
그런데 박원순의 그 모든 것을 어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필자는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박원순이란 인간이 정말 불가사의했기 때문에 더 유심히 살폈고, 출마를 결심했다기에 집중 연구했을 뿐이다. 내 평생에 좋아하고 지지한 정치인은 노무현 뿐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노무현을 더없이 좋아했듯이, 박원순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기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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