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말하듯 대학은 진리탐구의 실천도량이다. 중세 왕권사회에서 왕이 마음대로 이곳을 침범하지 못하고, 제3세계의 독재자들조차 이 성역을 건드리는 것을 주저한 것은 외부의 간섭과 압력, 회유 등이 없어야만 대학의 진리가 올바로 탐구될 수 있고, 그리 탐구된 진리만이 사회와 나라의 진정한 발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대학은 진리의 자유를 외치며 학생과 교수가 함께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대학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현 정권에 와서 이런 불문율을 깨고 대학을 국가의 시녀 내지 지배 이데올로기 생산 공장으로 전락시키려는 작업이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법부에서 도저히 대학을 운영할 수 없는 온갖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라 판결하여 쫓아버린 족벌사학재단이 속속 귀환하고 있고, 진보적 성향을 갖는 교수들의 연구지원을 끊고 있다. 상지대, 조선대, 세종대, 목포과학대에선 정부와 사분위란 괴뢰조직의 비호 속에 부패한 족벌사학재단이 경영권을 되찾아 복귀하고 있다. 상지대, 성공회대, 한신대의 진보적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2,000년에 공동 설립한 민주사회정책연구원은 '2009년 대학중점연구소 사회과학 분야 지원 사업'에서 '사회·사회복지·정치 부문'의 2단계 심사결과 1위를 차지했지만 최종심사에서 탈락하였다. 중앙대학교 독일연구소도 '2009년 인문한국지원사업(HK사업)에서 1, 2차 전문가 심사 결과 1위를 차지하였으나 한국연구재단의 종합심사에서 탈락하였다. 이 또한 주요 연구자들이 시국선언을 한 데 대한 보복의 의혹이 짙다.
그런데 한국예술종합학교에는 이런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09년에는 기획 감사를 통해 정권에 비판적인 황지우 총장의 자진사퇴를 유도한 후, 다른 대학에서는 장려되고 있는 통섭교육사업을 폐지함과 아울러 그 책임자였던 심광현 교수를 정직처분했으며, 서사창작과를 폐지하고, 진보적인 교수들로 구성된 학과를 폐지하려는 시도까지 자행한 바 있다. 이런 혼란 속에 새로 임용된 총장이 설사 극우인사라 할지라도 합리적으로 운영한다면 크게 나무랄 것은 없다. 하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새 총장은 최근 영상이론과 전임교수 공채과정에서 채용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학과 교수를 심사위원에서 배제하는 등 여러 모로 무리수를 두면서 대학 운영을 파행으로 몰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새 총장은 모집공고에서부터 학과에서 요청한 '영상이론(일본영화 전공)'을 학과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이론'으로 바꾸었고, 현재 영상이론과의 전임교수가 2명뿐인데 그 중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심광현 교수를 심사위원에서 제외하였다고 한다. 총 8명의 1차 기초심사위원 중에서 영상이론과 학과장 1명을 제외하고는 7명의 심사위원을 모두 총장의 의견에 따라 구성하면서, 심사과정의 비밀유지와 공정성이라는 이유로 학과장과 심 교수에게조차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 심사 당일 회의실 바로 앞에서야 사실을 접하고 항의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영상원 전체교수회의, 한예종 교수협의회, 영상이론과 재학생과 졸업생 일동, 총학생회 등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시정을 요구했으나 총장은 이를 묵살하고 6월말 진행된 2차 전공심사에서도 심 교수를 심사위원에서 배제했다고 한다. 7월 13일에 열린 3차 심사에서는 전공심사에서 1위로 평가된 후보가 떨어지고 2위 후보가 이번 주에 총장 최종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총장은 심 교수가 '영화이론' 전공자가 아니기에 공고된 '영화이론' 전공으로 MA 학위를 취득한 자로 심사위원을 선정하였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학칙에 의하면 학과교수는 당연직 심사위원이고, 상위규정인 교육공무원임용령에서도 모집분야와 "관련이 있는" 영상미학 전공자이므로 심교수를 심사위원에서 배제하는 것은 위법행위이다. 학교 내에서는 심교수가 배제된 사실상의 이유는 2009년 정직처분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심교수가 최근 승소한 것에 대한 일종의 '괘씸죄'에 해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또. 영상이론과 학과장이 심사위원 후보로 추천한 국내, 국외 박사인 연관 분야의 외부 교수들 모두가 무시된데 반해 MA학위를 취득한 영화감독들을 심사위원으로 삼은 것은 정말 소라도 웃을 일이다. 원장단과 교학처장이 점수를 낸 3차 본부심사에서는 2차 전공심사에서 1위를 한 후보를 상식과 관행을 무시하고 떨어뜨린 후 2위를 한 후보를 최종 면접후보로 총장에게 넘겼다고 하는 것은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다 해도 내용적으로는 심사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문제가 많은 일부 사립대학에서조차 본부심사에서는 내용적인 면에서 학과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관행인데, 국립 예술대학교의 총장이 이렇게 전 과정에 걸쳐 위법적이고 독단적인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는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는 한국 최고의 예술대학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짓이다.
대학에서 '1인 권력'이란 말대로 교수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동국대의 양주동, 한양대의 이영희, 성공회대의 신영복 교수의 예에서 보듯, 한 교수의 영향력은 학과와 대학을 넘어서 사회와 나라에 미친다. 반대로 1류 대학이라 할지라도 교수 한 명을 잘못 뽑아서 그 학과가 3류로 전락한 예는 많다. 걸핏하면 동료 교수와 싸우고 강의는 알맹이가 없어 배울 것이 없는 바람에 이에 실망한 뛰어난 교수는 물론 학생조차 학교를 떠난다. 학과 교수에게 동료 교수는 아내보다 많이 만나고 사적, 공적 대화를 수시로 나누고 함께 연구하는 동반자다. 학생에게 교수는 앞 세대의 진리를 전승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이다. 그러기에 대학의 교수는 연구자로서 탁월한 연구성과를 낼 수 있어야 하며, 교육자로서 올바른 가르침을 펼칠 수 있어야 하고, 학교의 구성원과 동료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교수 채용이 지극히 공정하고 투명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학과교수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예종의 사례는 공정성과 투명성, 객관성, 합리성, 민주적 수렴과정 모두를 무시하고 총장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폭력이자 교권침해다. 당연히 시정을 요한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어디 이 대학뿐이겠는가. 교수채용에서 공정성과 투명성, 객관성, 합리성, 민주적 수렴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대학의 미래는 어둡다. 거듭 말하지만 대학의 진리탐구의 실천도량이다. 원칙이 무너진 교수채용은 대학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그 대학이나 학과를 파멸로 이끈다. 만약 이 행위가 정부와 조율 속에서 진보적인 교수로 이루어진 학과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총장은 사퇴를 해야 한다. 나치가 더 강력한 파시즘 체제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칼날을 들이댄 곳이 학계였고, 대학이 침묵한 이후 나치는 아우슈비츠 대학살과 같은 야만을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었다. 대학은 진리의 생산지이자 최후의 보루이다. 대학에서 진리가 왜곡되고 허위에 침묵하는 순간 그 대학이 속한 사회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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