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절 모르시지만 전 형을 압니다. 제가 형을 안다는 건 뭐 특별한 일도 아니지요. 대한민국 국민 중 유시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전 정치인 유시민, 경제학자 유시민, 장관 유시민은 잘 모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전 20년 넘는 세월동안 신문도 읽지 않았고 TV 토론회도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형이 장관을 하던 시절엔 한국에 있지도 않아 공인으로서의 유시민은 정말 거의 모릅니다. 그런 제가 굳이 형을 아는 체 하며 말을 거는 건 제가 간직해온 형에 대한 아주 특별한 기억 때문입니다.
1984년, 이미 너무 오래된 날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늘 눈앞에 환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저를 그 오래된 추억 속으로 안내하는 특별한 기억, 그이가 바로 시민이형 당신입니다. 당시 전 2년차에 접어든 극렬 운동권 학생이었고 형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었어요.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학생회관에서는 연일 농성이 이어졌고 당시 수배령(?)이 내려진 형은 물론이고 전형적인 단무지과(단순무식지랄과격) 운동권이었던 저도 학생회관에서 장기무단투숙자 노릇을 하고 있었지요.
세상에 행복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던 날들. 그때 형은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생회관의 어지러운 동아리실에서 밤마다 형이 풀어놓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에 시간가는 줄 몰랐고, 형의 현란한 입담에 넋을 놓고 웃다 정말 턱이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후유증으로 가끔씩 턱이 빠집니다 ㅠㅠ) 그 엄혹한 시절에도 늘 얼굴에는 장난기가 그득하고 온통 유쾌한 유머로 무장했던 형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벌써 27년. 그 사이에 강산도 바뀌었고 역사도 몇 번의 격동을 겪었습니다. 형도 많이 변하셨겠지요. 이젠 더 이상 그 유쾌 발랄한 순수청년 유시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전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형의 그 깡마른 얼굴에서 아직도 개그맨보다 더 웃겼던 청년 유시민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봅니다.
이렇게 오래된 이야기를 왜 새삼스럽게 끄집어내는지…. 김해 보선이후 형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위로의 글들을 보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인터넷에서 '노무현에게 있고 유시민에게 없는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갔더군요. 하지만 비난이든 위로든 모두 하나같이 같은 말이었습니다. 유시민과 노무현을 비교하고, 노무현의 짙은 그림자 아래 서 있는 유시민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시민이형~ 사람 좋아하고 정의롭고 마음 약한 형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나 큰 비애로 자리잡고 있을지... 감히 다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상상은 됩니다.
이제 곧 노무현대통령 서거 2주기가 되네요. 전 형이 2년상을 치르고 이제 그만 상복을 벗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그만 그분을 보내드리길…. 그분은 그분의 삶을 완전하게 살아내고 가셨습니다. 그분의 삶을 억지로 연장하고 그 삶에, 그 죽음에 억지 의미를 붙여야 할 만큼 그분의 삶이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세인들의 언어일 뿐 그분에게는 성공도 실패도 그 아름다운 삶의 온전한 부분이었습니다. 전 죽는 날까지 노무현대통령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했던 제 인생의 빛나던 시간들을 노래할 겁니다.
이젠 유시민과 함께 할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도 제 인생의 몫으로 하고 싶다면 그건 너무 큰 욕심일까요? 형이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죄책감과 분노, 형을 옭아매는 성공에 대한 부채의식, 이제 이런 것 다 버리고 제가 원래 알던 유쾌 발랄한 유시민으로 돌아오면 안 되는 건가요? 누구보다 똑똑하고, 누구보다 유쾌하고, 누구보다 깊은 통찰을 가진 유시민이 분노와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을 학대하는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가요?
전 믿습니다. 형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고, 다시 삶의 환희를 기꺼이 마주하고, 원래 그랬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노무현이 아닌 유시민과 함께 다시 한 번 빛나게 아름다운 시간을 가질 거라는 걸.
시민이형~ 형은 이제 더 이상 '노무현의 빙의' 노릇을 해선 안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전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립지만 시민이형 당신도 못 견디게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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