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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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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민주주의

[다산포럼] 결국 '민중의 각성된 역량'이 중요하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시민혁명의 불길이 이집트로 옮겨 붙어 마침내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에 불어오는 이 선풍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디까지 진전되어 세계정치의 지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이집트의 경우만 하더라도 무바라크의 퇴출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만 분명할 뿐, 극심한 빈부격차와 억압적인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집트 민중의 열망이 300명 이상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어떤 정치적 미래를 낳을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고귀한 희생으로 얻은 성과, 정해지지 않은 미래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이집트 민중봉기의 폭발이 연일 보도되는 것을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저절로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이집트 민중봉기는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민주화 요구시위와 비슷한 기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물론 그 우연 때문에 이집트의 현재 위에 우리 자신의 과거가 겹쳐 보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6월항쟁과 이집트의 시민혁명을 둘다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어느 외국 언론인은 데모군중의 조직과 열의에 있어 한국보다 이집트가 더 강해 보였으므로 이집트 민주주의의 미래가 낙관적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과 이집트는 단순비교를 하기에는 각각 너무나 이질적인 역사와 복합적인 내부현실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독재자의 즉각적 퇴진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이집트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의 선례는 1960년의 4월혁명이다. 알다시피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개혁을 겨냥한 변혁운동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는 이승만정권의 퇴진을 목표로 삼은 정치투쟁조차 아니었다. 만약 4월혁명이 지속적인 민중운동에 기반한 정치적 승리의 결과물이었다면 아무리 야심적인 정치군인들이라 해도 5‧16과 같은 반동적 쿠데타를 감히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하야선언이 미국의 압력 없이 나오기 어려웠던 데 비해 무바라크의 진퇴를 두고 미국이 한때 우왕좌왕했던 점을 생각하면 1960년 4월 26일의 한국과 2011년 2월 11일의 이집트는 확실히 다른 맥락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계산에 따른 일정한 개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과 관계없이 4월혁명은 한국 민중의 위대한 성취임이 분명하다. 촉발의 계기가 무엇이었든 1960년 4월부터 1년여 동안 이 나라의 정치와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는 '혁명'이라는 이름 이외의 다른 것으로 명명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세에 의해 실종된 8‧15의 복원을 지향하는 '제2의 해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장면 정부는 분출하는 민중적 요구와 미국의 세계전략이라는 외적 제약 사이에서 현명한 탈출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5‧16쿠데타는 장면 정부의 허약성에 실망한 미국의 암묵적 지지가 성공의 배경일 것이며, 1965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부와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붕괴한 사태와 마찬가지로 제3세계 민중운동의 활성화에 대한 냉전시대 미국의 전략적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미국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군사정권의 강권통치에도 불구하고 독재권력에 대한 민중저항은 그칠 날이 없었다. 박정희의 집권 18년 동안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한국의 정치적 안정은 늘 불안한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9년 가을의 '부마항쟁'부터 1980년의 '서울의 봄'까지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시민봉기에 의해 사실상 끝장난 셈이었다. 그러나 민주정부의 탄생 대신에 실제로 벌어진 사태는 측근에 의한 독재자의 암살과 새로운 군사정권의 등장이었다. 이러한 사태진행의 심층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어떻게 은밀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는지 아직 세세히 밝혀진 바 없다.

나라 운명은 결국 민중의 각성된 역량에 의해

독재권력에 대한 세 번째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난 것은 우리의 생생한 기억이 말해주듯 1987년 6월이었다. 이제 남아메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총칼을 앞세운 군부통치의 시효는 소진되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인도네시아와 칠레에서 그랬듯이 학살의 전력을 가진 독재자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재임하고 나서 이른바 '87년체제'가 성립되었다.

최근 <연합뉴스>는 미국 백악관의 안보라인에서 전 세계 민중봉기와 정치변혁에 대한 기록들을 놓고 검토하면서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칠레, 터키, 체코 가운데 어느 것이 이집트 민주화에 가장 적합한 모델일지 고심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한 나라의 정치적 장래를 다른 나라의 관리가 걱정해준다는 것도 쓰라린 일이지만, 최근 3년 동안 민주주의의 실질적 후퇴를 거듭하는 한국이 모범사례의 하나로 거론된다는 것도 괴로운 아이러니다. 한국이든 이집트이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 민중의 각성된 역량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가 발행하는 다산포럼(www.edasan.org)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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